41. 마음의 여행, 2001년

by 국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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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여행, 2001년


국화리


새들이 떠난 빈 둥지에서 나와서 길 위의 여행을 한 지 수년이 된다.

한여름의 일본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때, 뜸했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몇 달 전 '우주공학의 두뇌'였던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슬픔에 있던 그녀는 놀랍도록 밝았다.


"M.I.T.T.(Mastery in Inner Transformation Training)의 고급 과정을 마쳤다며 “정숙 씨도 한번 해봐." 하는 것이었다.


바깥이 아닌 ‘안으로의 여행’, 즉 마음의 수련을 권한 것이다. UCLA 연구원인 그녀 목소리엔 세상을 다 얻은 듯 한 설득력이 있었다. 나도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려 했지만, 내면에서 이는 바람에 자주 휘청이곤 했기 때문이다.

며칠간의 합숙 일정과 만만치 않은 비용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60 서양인들 틈에서 듣는 그들의 고해는 낯설면서도 아팠다.

이혼과 재혼을 거듭한 부모, 배다른 형제들 속에서 길을 잃은 젊은이들. 버려진 듯한 그들의 방황을 마주하자 고민의 무게는 작아졌다. 소유에 매달려 잃어버린 자아가 떠오르며, 이해와 화해의 물기가 마음을 적셨다.

그런데 한 달 뒤, 다음 과정을 기다리며 평온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그가 결혼했어요."


나만을 위해 살겠다던 아이들의 아버지가 나를 떠난 지 얼마 후 결혼을?

나는 또다시 무너졌고 인간에 대한 배신감, 물질에 얽힌 이해관계,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 다시금 나를 삼켜버렸다.

시간과 돈을 들여 수련을 받았건만, 이기적인 자아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것이 나의 한계일까. 깊은 절망에 빠졌고, 다시 맞이하는 아침이 두려워졌다.


그때, 평소 가까이 지내던 이성적이고 냉철한 비판력을 지닌 소설가 지인이 한 달간 마음 수련에 집중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왔다. 그녀의 차분하지만 깊은 울림 있는 말에 나는 그날 저녁, 타운 내 수련원을 찾았다. 수련원은 조용했고 간단한 수속을 마쳤다. 작은 방에 들어서자 강사는 내게 백지를 내밀었다.


“여기에 유서를 쓰세요. 그리고 죽으세요.”


이 두 마디만을 남기고는 그녀는 방을 나가버렸다.

오늘 당장 죽으라고? 나는 당황했다. 판사가 내리는 사형선고 같았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죽음이란 막연한 미래의 일이었지, 중년의 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그 순간, 나는 진지해졌고 정신은 맑게 서 나를 바라보았다.

“ 죽음 앞에 무엇이 중한가? “

터질 듯 억눌려 있던 고뇌는 사라지고, 욕망과 질투에 가득했던 나의 참모습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헤겔은 인간 정신의 첫 단계를 감각과 물질에 의존하는 ‘자연’의 단계라 했다. 나의 정신이 바로 여기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더 성숙한 인격의 단계로 올라서기를 바라지만, 나는 스스로 갇혀 있었다.

나는 '유서'라고 제목을 적은 뒤, 두 딸의 얼굴을 떠올렸다. 부족한 모습만 보이고 떠나는 엄마였다는 참회의 글이 종이 두 장을 채울 즈음, 눈물로 종이는 흠뻑 젖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죽었다.


폭우 속 트럭을 피하다 벽에 부딪혀 산산이 깨진 유리 조각 속으로 흩어졌다.

내 영혼은 별이 빛나는 우주로 날아올랐다.

그곳에서 나는 반생을 살아온 과거를 응시하며, 인생의 장면들을 필름처럼 하나하나 되짚어보았다.


지도 강사는 말했다. “기억은 당신을 형성하고, 업이 됩니다. 그것을 버려야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어릴 때 기억들, 세상 살면서 부딪혔던 불편했던 감정들이 끝이 없이 올랐다. 질투와 증오로 얼룩진, 산산이 부서졌던 인간에 대한 믿음.

이혼 후 제2의 인생을 선언했지만, 여전히 벌레처럼 스며들던 그 모든 기억을, 나는 까만 점인 블랙홀로 던졌다.

그 순간, 무서운 사슬은 끊어졌고, 가슴은 열렸으며, 빛이 나에게로 왔다.

나는 자유로워졌는가.


원수 같던 그대를 축복해 줄 마음이 들었으니 말이다. 그에게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너그러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까.

불가에서 천국과 지옥도 내가 만들어 놓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이제야 받아들이고 있었다.

삶과 죽음의 분별을 넘어, 하늘과 사람이 합일하는 경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본 듯, 내 마음 안에 평화의 자리가 생기는 같았다.


마음의 여행을 시작한 지 2주가 지났을까. 어미 새는 이제 하얀 깃털을 달고 여유롭게 우주를 날고 있다.

나의 존재를 확인하며 정신 발달의 단계를 한 단계 높인 시간.

맑게 씻긴 눈으로 본 태양은 눈부시고,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조차 다정하게 느껴졌으니 말이다.

성철 스님의 말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그 뜻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어미 새의 둥지는 우주 자체가 되었다. 모든 새가 마음껏 드나드는 열린 둥지를 만난 이상, 나는 더 이상 지구의 피에로가 아니다.


2001년은

진정한 사랑과 자유의 길을 찾은, 아름다운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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