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6. 그리스의 연인, 아스파시아

by 국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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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리스의 연인, 아스파시아


여성의 목소리가 담장을 넘을 때


그리스 올림포스 신전의 12 신중 절반은 여신이었다. 제우스의 머리를 가르고 태어난 아테나여신은 지혜와 전쟁, 그리고 문명의 상징으로 아테네가 숭배했다.

그러나 신화 속 찬란한 위상과 달리, 현실의 그리스 여성들은 가사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 조용히 살았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 한다”는 한국의 옛말처럼 여성의 목소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랫동안 침묵을 강요받은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그늘 속에는 시대를 앞질러 걷는 여인이 있었다. 19-20세기 유럽에 루 살로메가 있었다면, 고대 아테네에는 아스파시아( BC 470~400)가 있었다.


이방인의 신분으로 아테네를 사로잡다


아스파시아는 소아시아 밀레토스 출신의 이방인이었다. 그녀는 빼어난 미모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통찰과 설득의 언어를 지녔다. 아테네 여성이 집 안에만 머물러야 했던 시대, 그녀가 당당히 아고라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신분에 있었다.

아스파시아는 ‘헤타이라(Hetaira)’였다. 그들은 단순한 창녀가 아니라, 세금을 내고 자립하며 예술과 철학, 정치 담론에 참여하던 지식인이었다. 우리 역사 속 황진이나 조선의 명기들이 그러했듯,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중심을 흔들던 존재들이었다.

플루타르코스기록에 따르면, 그 시절 아테네의 지성들은 아내의 교육을 위해 부인을 동반하고 아스파시아의 거처를 찾았다고 한다. 아름다운 여성의 지혜롭고 매력적인 이야기는 삶의 생동감을 주지 않았을까.

소크라테스조차 그녀와의 대화를 즐기며 수사학의 스승으로 존중했다 하니, 그녀의 지적 깊이는 가히 짐작할 만하다.


페리클레스의 심장이자, 제국의 머리로

아테네 황금기의 주역 페리클레스왕이 여인을 놓칠 리 없었다. 그는 전처와 이혼한 뒤 아스파시아와 동거를 시작했다. 그녀는 연인을 넘어 그의 정치적 조언자이자 사상적 동반자가 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희생자를 기리는 그 유명한 연설문 뒤에도 그녀의 도움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어린 페리클레스’가 태어났고, 왕은 공식 석상에서도 그녀에 대한 신뢰를 숨기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는 그녀를 두고 “그리스 제일의 남자가 사랑했고, 철학자들이 찬탄한 여성”이라 기록했다.


시련의 불꽃 속에서 살아나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깊은 법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앞두고 정적들은 페리클레스를 무너뜨리기 위해 아스파시아를 법정에 세웠다. 그녀가 아테네 여성을 타락시키고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허무맹랑한 혐의였다. 페리클레스왕은 당황했고 사랑하는 여인을 지키기 위해 법정에서 눈물을 흘리며 선처를 호소했다. 결국 무죄가 선고되어 추방은 면했지만 이는 지적인 여성이 감내해야 했던 시대의 잔혹한 시련이었다.

여성, 아스파시아를 기억하며

아스파시아의 삶을 떠올리며 나는 다시 아테네의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법적인 ‘부인’의 이름조차 허락받지 못한 채 이방인으로 사는 삶은 얼마나 고단했을까. 그럼에도 그녀는 제국의 심장부에서 가장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았다. 역사는 페리클레스의 시대를 칭송하지만, 그 황금기 문장 뒤에는 한 여인의 날카로운 사유가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게 한다.

만약 페리클레스가 전쟁 중에 역병으로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허망하게 무너지지 않았다면, 그리고 아스파시아의 아들이 죽지 않고 어머니의 지혜를 이어갔다면 아티네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아쉬움에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시대를 뜨겁게 사랑하고 치열하게 사유했던 아스파시아의 아픈 이름은 오늘도 지중해의 바람이 되어, 여성들의 가슴 깊은 곳에서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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