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편
10. 장편, 파리를 펴 들고
크리스마스 아침, 오랜 소망이 파리에서 피어났다.
이십여 년 전 딸과 서 유럽 여행길에서 파리의 중요한 유적지를 관광했다. 베르사이유, 에펠탑, 노틀담 성당, 몽마르트르언덕 등등. 그때 문화재의 보고인 루브르박물관에 들려 모나리자의 미소조차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채, 거대한 인파에 밀려 박물관을 빠져나와야 했다.
“이번엔 장편 소설처럼 파리를 읽어보세요.”
딸은 뮤지움 중심으로 루브르 박물관 사흘, 오르세 미술관 이틀, 로댕 미술관 하루를 넣어 일정표를 만들었다.
비행기의 넉넉한 좌석에 놀라는 나에게 딸은 말했다.
“이번 여행은 엄마를 위한 제 선물이에요.” 그래, 전에는 내 손에 이끌려 왔었지.
십수 년 전, 그녀는 한 달간 유럽 여행하며 파리에서만 이주를 머물러서 나의 가이드가 되어 주었다. 숙소는 루브르 맞은편. 우리는 파리의 중심을 걸어서 오갈 수 있었다.
루브르에서 세느강을 건너면 오르세 미술관이 보이고, 노트르담과 에펠탑도 멀지 않다. 파리의 도로에는 가로수가 드물고, 무채색의 건물들이 건고하고 반듯하게 들어서 있다. 다듬어진 돌 위에 세워진 건축물들은 수백 년의 시간을 견디며 확장되어 왔다. 그 육중한 돌 속에 켜켜이 쌓인 문화의 질곡을 읽어갈 것이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이방인들의 발소리가 겹겹이 포개진다.
루브르의 상징, 유리 피라미드
센강변의 루브르는 원래 요새였다. 프랑수아 1세 이후 궁전으로 사용되었고, 루이 14세가 베르사유로 왕궁을 옮긴 뒤 한동안 비어 있었다. 나폴레옹은 이곳을 다시 궁전으로 삼아 전리품으로 모은 예술품과 유물을 전시했다. 세계를 정복하면서 문화와 예술까지 장악하고자 했던 야망이었다.
딸의 설명을 들으며 유리 피라미드 앞에 섰다. 두터운 겨울 코트와 모자, 목도리를 두른 인파 속에 우리도 섞였다. 하루 평균 3만 명이 뿜어내는 감탄이 투명한 유리 위에 켜켜이 쌓이는 듯했다. 이오 밍 페이의 작품이다.
우리는 드농관, 쉴리관, 리슐리외관을 하루씩 나누어 보기로 했다.
드농관 2층 중앙 계단 위, 사모트라케의 니케가 비상하고 있었다. 배 머리에 내려앉는 승리의 순간을 상상한다. 니케는 여전히 인생의 승리를 꿈꾸는 이들에게 말을 건다.
2층에서는 자크 루이 다비드 서거 200주년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궁정 화가였어요.” 나폴레옹에 관한 그림이 많았다. 나폴레옹의 대관식. 화가는 이 대작을 그리며 방 뒤에 그림크기의 거울을 달고 그림을 그렸다.
우리는 그림 뒤편의 거울을 통해 작품을 바라보았다. 조제핀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나폴레옹. 그는 떠났지만, 존재감은 막 잡은 생선처럼 살아 있었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앞에서 딸은 좀처럼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딸 가이드 설명을 들으며 감상하니 좀 깊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반쯤 흘러내려간 상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손에는 무기를, 한 손에는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오늘날의 프랑스 삼색기를 높이 들고 있는 마리엔느. 1830년 7월, 혁명의 열기는 깃발처럼 솟구쳐 절대왕정의 벽을 두드렸다.
자유와 평등을 향한 그 혁명정신은 국경을 넘어, 깊게 흔들며 혁명의 용기를 주었다.
모나리자 전시실은 항상 사람이 많아 먼발치에서 여러 번 감상했다. 인파 뒤로 거대한 작품, 베로네세의 「가나의 혼인잔치」에 관심을 두었다.
이틀 동안 7번째 방문 중 나에게 보여 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모나리자의 시선이었다. 나의 가슴은 뛰었다.
쉴리관에서는 함무라비 법전을 찾았다. 한국에 여섯 번 다녀왔다는 프랑스인 안내원이 유창한 한국어로 나를 전시실까지 안내했다. 그 청년의 정중함 속에서 그가 만난 한국의 위상을 느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인류가 얼마나 긴 시간 이 서슬 퍼런 문장을 붙들고 살아왔는지. 예수는 그 말이 불편해하며 “서로 사랑하라”라고 다독였을 것이다. 이제야 내 마음에서도 그 말이 더 편하다.
이틀 동안 계단을 오르내린 다음 날, 몸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저녁마다 딸은 부은 발을 마사지해 주었다. 하루 충분한 휴식이 다음 날을 가능하게 했다.
일요일 오후에 노트르담 대성당을 찾았다. 미사에 참석하려 했지만 입장하려고 기다리는 행렬이 성당주위를 촘촘히 감싸고 있었다. 그 인기는 어디서 올까.
2019년 화재로 타버린 첨탑은 복원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국보 1호 남대문이 불탔을 때의 한국인의 감정과 겹쳐진다. 천년역사의 시간 속에 지금도 바라보며 역사를 기록한다. 노트르담 생존에 관해 아슬아슬한 시기가 있었다.
19세기 초, 낡고 흉물스러워 철거 위기에 놓였던 이 성당을 구한 것은 한 작가의 펜 끝,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의 꼽추』였다. 이 소설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고 노트르담 대성당에 대한 범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재건축의 자금이 모이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우리는 지금의 이 웅장한 종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파리를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빅토르 위고 때문인지도 모른다. 중학교 시절, 소녀의 감성을 송두리째 사로잡았던 『레미제라블』의 장발장, 지금도 내 인생의 최고의 작품으로 나의 정신적 성장의 지주처럼 살아 목소리를 낸다. 성년이 되었을 땐 『노틀담의 대성당』에 매료되었으니 대성당의 종소리는 마치 사춘기와 사추기를 건너며 사랑했던 나에게 건네는 다정한 인사처럼 느껴졌다.
오르세 미술관. 옛 기차역을 개조한 공간이다. 유리 천장으로 쏟아지는 자연광, 시간을 가로지르는 대형 시계. 고흐, 고갱, 모네, 마네, 르누아르, 세잔. 책에서만 보던 그림들 앞에서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밀레의 「만종」과 「이삭 줍는 여인」 앞에서는 오래 머물렀다. 평범한 삶을 성스럽게 끌어올린 그림은 우리의 일상과 겹쳐졌다.
5층의 미술관 카페에서 점심식사를 하며 건너편 몽마르트 언덕을 바라보았다.
전에 우리는 그곳에서 이름 없는 예술가 소품 3점을 사가지고 왔었다. 에펠탑그림, 물랑루주에서 캉캉을 춤추는 화려한 색채의 여인, 몽마르트언덕에서 내려다보는 파리의 전경. 늘 가까이서 대화하며 그려왔던 실물이 눈앞에 있다.
로댕 미술관. 정원을 품은 대 저택은 말년에 거주하며 아트리에로 쓰던 곳이다. 사후 그의 대부분의 작품을 전시해 놓았다. 1-2층에 많은 방을 돌며 감상하면 그곳에는 카미유의 작품도 있다. 로댕과 카미유 클로델, 스승과 제자의 사랑과 이별이 깔려있는 그곳에서 카미유의 작품들이 내 마음을 조각했다. 그녀의 환희와 고통의 감정을 쏟아 놓은 <왈츠> <성숙의 시대>등.
로뎅의 명작「생각하는 사람」과 「칼레의 시민」, 「지옥의 문」은 정원에서 볼 수 있다. 몇 바퀴 돌며 그의 작품들을 쉽게 떠날 수 없었다.
일주일 동안 우리는 파리에만 집중된 장편소설을 펼쳐 들었지만, 이번에도 책장을 빠르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강물 같은 그 세월의 숨결을 조금 더 느낄 수 있었다. 다음에는 페이지마다 숨은 문장들을 천천히 읽으며 더 깊이 들어가고 싶다
드골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 안. 창밖으로 멀어지는 파리 위로 딸이 말없이 앉아있다. 한때 내가 잡고 세상을 건너왔던 작은 손은 이제 나를 이끄는 손이 되었다.
딸 가이드의 밀착 안내 덕분에 파리의 겨울바람은 차가웠지만, 내 손은 오래도록 따뜻했다.
3번째 방문에도 급하게 책장을 넘기고 말았지만
때때로 샘물이 올라오듯 풍요로운 이야기의 씨앗이 될 것이다.
2025년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