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아무도 배신하지 않았다-기억하는 자들의 고을

by 국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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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배신하지 않았다

-기억하는 자들의 고을


국화리


권력은 때로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지렛대였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몽골의 징기스칸을 떠올리면 힘의 궤적이 보인다. 그러나 역사의 이면에서 권력은 누군가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피바람을 일으키는 화살이 되기도 했다. 최근 영화관을 적시는 영화, <왕과 함께 사는 남자> 자꾸만 마음을 건드리는 이유도 지점이다.


조카의 왕좌를 찬탈한 수양대군이 세조로 등극하며 벌어진 참화. 이는 비단 세대만의 비극이 아니었다. 할아버지 태종 이방원이 형제들을 죽였던 ‘왕자의 난’의 잔혹한 답습이었다. 권력이라는 괴물 앞에서 천륜은 맥없이 무너졌다. 하지만 서슬 퍼런 칼날 아래에서도 죽음보다 깊은 침묵으로 진실을 지켜낸 이들이 있었다. 강물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거둔 동네 아전 엄흥도, 그리고 비밀을 공유하면서도 입을 닫았던 영월의 백성들이다. "동네 사람 누구도 배신하지 않았다" 전설 같은 이야기는 그렇게 역사가 되었다.


나는 학창 시절 국사 시간을 좋아했다. 역사 선생님은 출석부 하나만 옆구리에 끼고 들어와 한국사의 타래를 이야기로 풀어내곤 하셨다. 선죽교에 뿌려진 정몽주의 피눈물도 슬펐지만, 어린 가슴에 가장 충격으로 남은 것은 단종애사와 사육신, 생육신의 이야기였다. 참혹한 역사는 세월이 흘러 드라마와 영화로 재현될 때마다 권력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화두가 되었다.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은 성군이었던 아버지의 치세를 곁에서 지켜보며 자랐다. 문종의 요절 이후 열두 어린 조카 단종이 즉위하자, 그는 자신이 왕이 되어야만 나라가 안정될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한명회와 손을 잡고 왕위를 찬탈한 , 그는 실제로 왕권 확립과 국방 정비, 경국대전 편찬 적지 않은 치적을 남겼다. 그러나 화려한 업적 뒤편에는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었던 집현전 학자들을 숙청하고, 조카를 노산군으로 강등시켜 끝내 사약을 내린 그 죄를 어떻게 물을까.

영국의 리처드 3세를 흔히 '영국판 수양대군'이라 부르지만, 그에게서 사육신이나 생육신 같은 숭고한 충정의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다. 권력이 정당성을 잃었을 , 지배자는 공포로 복종을 강요한다. 하지만 세조의 육신은 패륜의 기억을 지우지 못했나 보다. 꿈속에서 만난 현덕왕후의 원혼이 뿌린 침은 그의 온몸을 고름이 흐르는 병마로 괴롭혔고, 아들들과 아내를 차례로 보내고 그는 외로운 말년을 보냈다.


그의 시신을 거둔 엄흥도는 삼대를 멸한다는 어명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밤의 적막을 뚫고 아들들과 함께 강물에서 시신을 건져 올린 그는, 노루가 앉아 있던 따뜻한 묏자리를 찾아 왕을 모셨다.

"나는 옳은 일을 했으니, 너희도 값을 달게 받으라" 비장한 말을 남기고 흩어진 삼부자의 뒷모습은 지울 수가 없다.

놀라운 것은 영월 마을 누구도 이들을 밀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영월사람들은 비운의 어린 단종은 사후 태백산의 산신령이 되었다고 말한다.


여러 대가 지나 숙종 대에 이르러 단종이 복권되었을 , 엄흥도의 후손들은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와 그날의 증언을 이어갔다. 의로운 가문의 절개와 비밀을 품어준 마을 사람들의 의리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억울한 죽음을 기억하고 역사의 정의를 세운 ', 영화를 본 후 영월로 향하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는 소식에 나의 한국방문 행선지도 이미 정해졌다.


문득 200 , 영월의 어느 농가에서 어린 딸로 태어난 나를 상상해 본다.

할머니는 머리맡에서 나직이 속삭이던 말이다.

국화야, 우리 마을은 이런 의인이 살았던 곳이란다.”

콩쥐팥쥐 같은 권선징악의 이야기에 익숙한 아이였겠지만, 사육신의 고문 대목에선 무서워 귀를 막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을 어른들의 입을 통해 전해 내려온 비밀스러운 온기는 유년의 뼈대를 이루었으리라.

역사와 민심은 결국 비극의 주인공 편에서 살아남는다. 권력의 칼날보다 무서운 것은 잊지 않는 마음이다. 기억하는 자들, 그들이야말로 굽이치는 역사의 물줄기를 올바른 곳으로 이끄는 진정한 주인공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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