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일요일은 참으세요

by 국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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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은 참으세요”

-멜리나 메르쿠리를 추억하며


1 동안 몰두해 여행 수필집을 편집부로 떠나보냈다. 산고 끝에 아이를 세상에 내놓게 되었지만, 지난 시간 몰입했던 현장을 떠나보내는 마음은 허전하다 못해 슬프기까지 하다.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담지 못했다는 미련 때문이리라. 나는 지면상 생략해야 했던 문장의 잔향들을 다시 불러 모아 본다.

그리스 편에서 소개하고 싶었던 여인, 배우이자 가수였으며 정치가로 생을 마감한 멜리나 메르쿠리(Melina Mercouri) 못내 마음에 걸렸다. 마음이 같은 오늘, 카리스마 넘치는 미소를 지닌 그녀가 더욱 그리워진다. 그녀의 대표작 <일요일은 참으세요(Never on Sunday)> 적적함을 달래줄 것만 같다.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받은 경쾌한 멜로디가 귓가에 맴돌고, 이글거리는 햇살 속의 그녀가 환영처럼 다가온다.


아테네 인근 피레아스 항구. 수많은 배가 정박해 있고, 배를 수리하거나 출항을 준비하는 뱃사람들의 움직임으로 분주하다. 바다는 고요함을 깨고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생동감으로 가득하다. 그때, 바다 물결을 닮은 여인이 군함에 오르며 남자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그녀는 돌연 수영복 차림으로 바다에 뛰어들고, 이를 지켜보던 뱃사람들도 약속이나 푸른 바다로 몸을 던진다. 여주인공 ‘일리아’를 중심으로 사내 십수 명이 물놀이를 즐기는 풍경은 마치 편의 바다 교향시처럼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선술집에 모인 거친 사내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여인 역시 일리아다. 메르쿠리가 연기한 일리아는 고대 그리스의 재기 발랄한 여성 ‘아스파시아’가 환생한 , 춤과 노래로 남성들을 사로잡는 거리의 여신이었다. 부주키(Bouzouki) 연주에 맞춰 어깨를 맞대고 추는 그리스 전통춤 ‘시르타키(Syrtaki).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 안소니 퀸이 보여주었던 흥겨운 몸짓이 영화에서도 강렬하게 이어진다. 중심에서 메르쿠리는 누구도 흉내 없는 강인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잡는다. 삶의 열정을 온몸으로 뿜어내며 모두의 연인이 되었던 그녀는 당당히 말한다. “일요일만큼은 쉬고 싶으니 참아달라”라고. 영화로 그녀는 영화제 여우주연상의 영예를 안았다.


사실 그녀는 명문 정치가 가문에서 태어난 귀공녀였다. 1955 영화 <스텔라> 데뷔해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지만, 그녀의 진면목은 조국이 위기에 처했을 드러났다. 그리스 군사 독재 시절, 그녀는 해외에서 거센 저항 운동을 이끌었다. 대가로 국적을 박탈당하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나는 그리스인으로 태어났고 그리스인으로 죽을 이라며 서슬 퍼런 독재 권력에 맞섰다.

1974 민주화와 함께 귀국한 그녀는 그리스 최초의 여성 문화부 장관이 되어 다른 투쟁을 시작했다. 대영박물관이 소장한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 조각군, ‘엘긴 마블’을 되찾기 위해 세계를 누비며 목소리를 높였다. 일찍이 대영박물관에서 유물들을 목격했을 나는 전율했었다. 조상의 숨결이 깃든 파르테논의 가장 아름다운 조각들이 뜯겨 나가 타국의 박물관에 전시된 모습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문화재의 가치를 선점한 강대국들이 약소국의 유산을 약탈해 전시하는 행태는, 우리 민족을 지배했던 일본의 모습과도 겹쳐 동병상련의 아픔을 더한다. 비록 그녀의 생전에 유물은 돌아오지 못했으나, 그녀가 보여준 문화적 자존심은 그리스인의 심장에 깊이 박혔다. 1994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그리스 정부가 국장(國葬)으로 예우한 것은 당연한 경의의 표시였다.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 하드리아누스 광장에서 개선문과 개의 기둥만 남은 제우스 신전을 마주한다. 기원전 146 코린토스 전투 이후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아테네의 영광은 멈춘 보였다. 하지만 ‘군사적으로는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했으나, 정신적으로는 그리스 문화가 로마를 정복했다’는 역설적인 위안을 되새기며 신전 기둥 사이를 걸었다.

유시민 작가는 아테네를 “멋있게 자라지 못한 미소년이라 표현했다. 나는 미완의 풍경 속에서 메르쿠리의 흔적을 찾는다. 하드리아누스 광장 인근에는 그녀의 삶을 기리는 기념관과 흰색 동상이 있다. 조국 그리스를 뜨겁게 사랑했던 영원한 배우, 멜리나 메르쿠리.


전쟁과 약탈로 유물들이 세계 각국으로 흩어진 탓에, 정작 조국 그리스는 비어 있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빛을 잃은 도시의 모습이 방문객의 마음을 안쓰럽게 때도 있다. 하지만 메르쿠리 같은 뜨거운 영혼이 있었기에 그리스의 정신은 여전히 맥박 친다. 예술가이자 투사였던 그녀를 회상하고 나니, 원고를 보낸 뒤의 허전함이 조금씩 채워지는 기분이다.

그녀의 매력이 살아있는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 보며 그리스의 영혼을 추억한다. 조국을 그토록 사랑했던 그녀의 열정이 오늘 마음속에 줄기 빛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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