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난 양말도 할말이 있다

양말의 하루

by 글나라


옷장 오른쪽 첫 번째 서랍 속에는

내 친구들이 많다.

오늘은 누가 선택되어서 밖으로

나가게 될지 일렬로 서서 기다린다.


옆 서랍에 있는 키 큰 친구들 중에서

두툼하고 목이 긴 친구는 이미 밖으로

나간 지 오래다.


나는 그녀의 발을 감싸주는 양말이다.

얼굴에 썬크림을 잔뜩 바르고 그녀는

나를 꺼내 발을 집어넣었다.


신발장을 열고 검정 운동화를 꺼내

내 얼굴을 집어넣더니 고개를 살래살래,

다시 흰색 운동화를 꺼내 나를 밀어 넣었다.


검정 운동화가 더 넓어서 좋은데

그녀는 딱 맞는 흰색 운동화를 신었다.


발을 움직일 때마다 발등이 올라와

운동화 천장에 부딪쳐서 답답했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친구랑 통화 하느라

정신없이 걸어간다.


집 앞 편의점을 지나 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멈칫하더니 그냥 지나쳐간다.


붉게 물들었던 단풍잎들도 누렇게

말라버린 채 떨어져 뒹구는 공원을

가로질러 황톳길로 향한다.


좁쌀처럼 하얗게 피어있던 메밀꽃밭도

다 마르고 쭉정이만 남아 있다.

그녀는 황톳길 맨발걷기를 하려고

나를 벗어서 운동화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녀의 모습이 점점 멀어져 가고

나는 운동화를 지키는 신세가 되었다.


황톳길을 한 바퀴 돌고 온 그녀는

발이 시럽다고 나를 꺼내서 신었다.

그러더니 운동화도 신지 않고 그대로

나를 황톳길 위에 올려놓고 걷기 시작했다.


불그스름한 황톳길은 차갑고 딱딱했다.

그녀는 나를 신고 더 신이 나는 듯

날아갈 것처럼 빠르게 걸어간다.


내 살이 차가운 황토 바닥에 부딪칠

때마다 조금씩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걷기를 멈추고

운동화를 찾는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구멍 난 나를 벗어

그대로 휴지통 속으로 던져 버렸다.

엉겨 붙은 머리카락과 구겨진 화장지들이

나를 안쓰럽게 쳐다본다.


구멍 난 양말이 되어 그녀 곁을 떠나지만

그녀의 발을 감싸고 함께했던 시간들을

기억할 것이다.

나는 그녀의 발이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