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전

내가 나일 수 있게 나아가기

by 글루

살아가면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는 점점 넓어짐을 느끼고, 이에 대해 감사하다. 성장 없는 삶은 죽은 것과 다름없을 테니 말이다. 이러한 한계를 넓히는 순간이 아니더라도 가끔 찾아오는 버거운 시기가 있다. 어쩌면 내가 인지하지 않는 다른 측면의 한계가 벌어지는 것인데 내가 인지를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폭풍이 오고 있음을 알고 견디다 보면 이 또한 지나갈 것이란 말과 같이 정말 지나간 일이 되곤 한다. 한차례 재해에 휩쓸린 나는 화전민처럼 덩그러니 남은 땅을 다시 갈아내야 한다. 이때는 바로 착수하지 않고 잠시 쉬어도 내게 줄 변명이 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번엔 너무 힘들었잖아?' 그렇게 원 없이 쉴 것처럼 굴다가도 어느 정도의 새살이 차고 나면 땅을 일구기 시작한다. 그리고 느낀다. 내가 더 단단해지고, 더 성장했음을.


물론 그렇다 할지라도 다시 폭풍이 오면 휩쓸린다. 내게 폭풍의 정의는 폭풍을 맞을 때마다 더 엄격해지는 듯하다. 재작년에 맞은 폭풍과 같은 사이즈로 다시 휘몰아치면 더 이상 이는 자연재해가 아니다. 하지만 해일이 몰아치면 또다시 저항 없이 흘려가고 만다. 나는 이렇게 변주에 약한 사람인가 보다 싶다.


반면 무던하게 지나가리라 생각했던 때에 무너질 때가 있다. 이럴 땐 무기력한 나 자신을 변호할 거리가 없어 괜히 마음이 더 무겁다. 힘든 일이 생겼을 때 더 노력하는 사람이 일류라고 하던데, 아직까지 난 그 경지까진 도달하지 못하겠다. 꿈틀 해보기는 하지만 이렇게 방전됐을 땐 그냥 쉬고 만다.


책을 읽다 보면 30분 이하의 낮잠이 정신을 맑게 해 줘서 좋다고 한다.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해 낮잠을 싫어하던 사람이라 아픈 게 아니고서야 가까이해본 적이 없었는데, 최근에는 낮잠을 잔다. 하지만 책에서 말하는 것과는 조금 변질된 의미로 사용한다. 잠에서 깨는 걸 힘들어해서 보통 잠들면 1시간은 그냥 자버리는데, 이러고 깨면 멍하다가 죄책감이 들기 시작한다.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아무것도 안 한 나 자신을 두고 마냥 한심해지는 것이다.


그러면 일어나서 다시 뭐라도 하게 된다. 내가 쉼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시간 버리기(낮잠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를 만회하고자 하는 마음이 동력이 되고, 쉬었던 시간들은 그마다의 쓰임새를 찾아 또다시 내 상처를 덮기 시작한다. 의미없는 시간은 없다.


하나 더의 순기능은, 쉬다보면 생각이 맑아진다는 거다. 하나의 일에 몰두하고 그에 매몰되어있다가 잠깐 제3의 관점으로 일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편향된 사고를 하고 있다가 객관적으로 상황을 인지하고, 상황을 헤쳐나갈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이 정말 새 방법일 때도 있고, 아니면 내가 상황을 바라보는 마음의 변화일 때도 있다.



그래서 요즘 방전됐을 땐 그냥 나를 방치하고, 방치한다. 내가 죄책감을 느낄 만큼 회복이 되어 다시 일어설 때까지. 몇 년 후의 나는 어떻게 더 나은 방식으로 나를 충전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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