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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마 Jun 20. 2024

집중력이 좋아도 ADHD일 수 있다?!

ADHD는 '집중조절장애'다


ADHD를 진단받고 나서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다. 이 의사 저 의사에게 "집중이 안 돼요."라고 호소해 놓고는, 내심 집중력이 좋은 게 내 장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내가 감히 진료실에서 의사 상대로 공갈을 쳤다는 것이 아니고, 통용되는 '집중(력)'의 의미가 사실은 주의력집중력 두 차원을 넘나들기 때문이다.


"집중이 안 돼요."라고 말했을 때의 '집중'은 사실 '집중 조절'이다. 그리고 집중 조절이 곧 주의력이다. 사실 어느 누가 집중력이 좋다 나쁘다 따지는 게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지 않다. 하고 싶은 거 할 때는 모두가 자연스럽게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다. 중요한 건 하기 싫은 것에도 집중하는 능력이다. 그러니까 나는 집중력은 좋은데, 주의력은 나쁘다. ADHD(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이기 때문에, 집중력이 아닌 주의력의 문제다.




"우리 딸은 공부할 때는 아무리 불러도 못 들어." 엄마는 밖에서 은근히 이렇게 내 자랑을 했다. 고등학교 때 한참 과민성대장증후군에 시달릴 때는 복부불편감 때문에 석식을 거르고 야자 끝날 때까지 자리를 안 뜨고 공부할 때도 있었다. 내게 교실과 내 방 환경의 차이는 천국과 지옥 급의 차이가 있었으므로, 학교에서 그렇게 공부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침대와 스마트폰이 있는 곳에선 의지박약이었지만 교실에는 그 두 가지가 모두 없는 데다가 공부하란 강요와 압박이 정신없이 휘몰아쳤다. 눈치 많이 보고 말 잘 듣는 나는 더욱이 그 환경의 이점을 쥐어짜듯 탈탈 털어먹을 수 있었다.


어려운 건 공부를 하기까지의 과정이지 일단 하게 되면 몰입은 쉬웠다. 그런데 그 집중 상태를 적절히 전환하고 조절하는 게 힘들었다. 공부하다가도 요의가 느껴지면 화가 났다. 이 문장이 웃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대로다. 소변을 오래 참지 않는 것이 방광염 예방의 제1원칙인데 나는 그걸 지키지 않을 때가 많았다. 공부하던 걸 끊고 화장실에 바로 가는 게 어려웠다. 공부가 재밌어서가 아니라, 그 순간 그걸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공부보다 더 재밌는 걸 할 때는 더 어려웠다. 이게 주의력의 한 종류인 '전환주의력'이 부족해서 생기는 현상인 걸 최근에 알았다.




진짜 문제는 이게 헛짓거리를 하고 있을 때도 발동된다는 사실이었다. 특히나 그 헛짓거리를 공부와 같은 중대한 할 일로 시급히 전환해야 할 때는 심리적 압박감이라는 장애물까지 추가됐다. 나는 나를 공부시키려고 당근도 많이 주고 채찍도 많이 때렸다. 당근만 줬더니 선을 넘고 채찍질만 했더니 기운을 못 차리길래 그냥 둘 다 했다. 공부 미루고 딴짓하면서 속으로는 자책했단 뜻이다. 당근으로 배가 빵빵해지고 채찍질로 등이 엉망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맷집이 너무 센지 등이 쓰라린 것보다 당장 내 입에 당근이 안 들어오는 게 더 허전했다. 그래서 나는 당근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면서 공부하는 방식을 택했다. 나는 항상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서 공부했다. 야자 때는 전교에서 가장 무서운 선생님이 감독할 때만 피해서 노래를 들었다. 국어 같은 과목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사 없는 노래만 골라 듣지도 않았다. 좋아하는 건 아무 거나 들었다. 검정치마, 언니네이발관, 자우림, YB, 오아시스에 빚을 졌다. 하기 싫은 걸 꾹 참고 하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조금이라도 덜 하기 싫게 바꾸는 것뿐이었다. 발가락으로 리듬 타거나 가사에 꽂힐 때도 있었지만 그건 기꺼이 감수해야 할 리스크였다. 어쨌거나 안 하는 것보단 훨씬 나았기 때문에.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공부는 토익 LC다. 절대 노래 들으면서 할 수 없는 공부. 수능 영어듣기까지는 어찌어찌해냈으나 토익 LC는 가히 거대한 산이었다. 실전처럼 듣기 100문제를 집에서도 통으로 다 듣고 풀고 싶었다. 그런데 시험 전날까지 내 최대치가 그 절반이었다. 그것도 어르고 달래가며 늘린 거였다. 시험장에 가서야 처음으로 100문제를 한 번에 다 들었다. 시험 시작 전에 기도했다. 잘 보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었다. 제발 내가 이거 풀다가 쥐가 날 것 같은 끔찍한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뛰쳐나가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다행히 기도가 먹혔는지 말짱한 사람처럼 끝까지 다 풀고 나왔다. 목표 점수보다 65점 높은 성적을 거뒀다. 그게 기쁘고, 웃기고, 슬펐다.


토익 시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토익 공부라기보단 앉아있기 연습을 하던 애잔한 하루하루가 펼쳐진다. 공공도서관에 다녔는데 8시간 있다가 오는 걸 목표로 삼아 놓고는 서너 시간 지나 집에 올 때가 태반이었다. 몸 전체에 불쾌한 감각이 번져서 그걸 못 견디고 도망치듯 집에 왔다. 점차 목표를 바꿔 '폰 보면서라도 8시간 채우고 오자!'고 했지만 그마저 실패하고 털레털레 집에 왔을 때의 기분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나는 분명 집중을 잘했는데, 왜 지금은 집중을 못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견딜 수 없이 창피했다. 어디에도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말을 하는 것도, 원래는 이런 사람이었노라 고백하는 것도, 그 어느 것도 내키지 않았다.




ADHD약을 먹어도 바뀌지 않는 것들이 있다. 콘서타를 먹으면서도 내 전환주의력은 평균치에 못 미치는 것 같다. 뭔가에 열중하고 있을 때는 사람이 때 맞춰 밥을 먹는 존재라는 걸 잊은 사람처럼 배가 안 고프다. 그치만 방광은 위장보다 자기주장이 강한 것 같다. 그래서 요즘도 화장실 가는 게 귀찮고 짜증날 때가 있다. 이 글은 불현듯 방광염 증상을 검색해보고 느낀 공포를 잠재우기 위해 시작됐다. 어찌 됐건 내 방광은 소중하니까 화장실은 꼭 제때 가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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