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에 집어삼켜진 자의 딜레마
보여지는 일기를 한동안 적었다. 공개글을 쓰는 일은 피곤했다. 겨우 일기일 뿐인데 필요 이상의 공을 들였다. 좋은 문장을 적기 위해서가 아니라, 틀린 문장을 적지 않기 위해서. 내 감정과 생각을 나도 모르게 왜곡해 적을까 봐. 내가 서술한 내 경험에 과장된 부분이 있을까 봐. 그뿐만 아니라 누가 내 글을 보면 부끄럽고 두려웠다. 혹여 댓글 알림이라도 뜨면 가슴이 콩콩 뛰고 그 알림을 확인하는 것이 내게 큰 숙제가 되었다. 그 타협안으로 댓글창을 닫고 하트만 누를 수 있게 해 놨다. 그런데 누가 내 글을 보지 않는 것도 외로웠다. 네이버 블로그를 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방문자수와 조회수를 살폈다. 우습게도 댓글은 무서웠지만 숫자를 보는 건 괜찮았다. 내 일기를 찾아온 사람들 가운데 한 명쯤은 내게 공감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은밀히 위로받았다. 그래서 숫자는 가능성이었다. 난 거기까지만 괜찮은 사람이었다.
블로그를 비공개로 돌렸다. 내 일기인데도 솔직하게 적을 수가 없어서였다. 나만 볼 수 있어야 검열 없이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비공개로 돌리고 나서, 나는 더 이상 일기를 적지 않았다. 쓸 맘도 생기지 않았다. 일기란 수단이 있다는 것, 블로그란 적을 곳이 있다는 것, 내가 일기를 쓰던 사람이라는 것, 그 모든 게 희미해져 갔다. 일기 대신 메모나 자료 저장을 위해서만 가끔 들어갔다. 블로그는 점차 책상 옆 서랍 맨 윗 칸 같은 존재가 됐다. 온갖 잡동사니를 질서 없이 쑤셔 박아둔 좁아터진 창고 같은 공간이 됐다.
어제 친구가 말했다. 그 애는 아무 가면도 쓰지 않은 진짜 자기 모습을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그게 무섭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그 애가 조금 멀게 느껴졌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런 바람은 가져본 적이 없다. 가면을 쓰지 않은 모습으로 왜 사랑받고 싶은지, 왜 그러야만 하는지를 나는 내심 이해하지 못했다. 가면을 쓰지 않은 내 모습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 어떤 가면을 쓰지 않고도 오롯이 나라는 사람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스스로 의문을 갖는다는 것이다. 나는 자신이 없다.
이따금 특이한 실수를 하고 쩔쩔매며 사과한다. 최근 일 중에 생각나는 건, 친구가 내게 무언가를 제안하며 괜찮겠느냐고 걱정했다. 그 일을 처리할 정신적 역량이 내게 존재하는지를 묻는 거였다. 나는 할 수 있노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힘에 부쳤다. 그걸 스스로 인정하고, 할 말을 정리하고, 실제로 내뱉기까지 많은 에너지가 소모됐다. 그땐 내가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그것과는 별개로 근거에 기반해 판단했어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나를 속이고 너 또한 속였다고 했다. 그 애는 사려 깊게 되려 나를 다독였으나 부끄럽고 미안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드는 감정을 뭐라 표현할지조차 모르겠다. 내가 뭘 느끼고, 생각하고, 원하고, 할 수 있는지를 내가 모르고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건 수치심의 차원을 뛰어넘는 것 같다.
보여지는 일기를 적을 때에, 원래 이 정도 길이를 쓰고 나면 어떻게든 마무리를 하곤 했다. 억지로 좋은 방향으로 끝을 맺었다. 언젠가 정신과 진료실에서 일기에 관한 얘기를 하다가 이 얘기도 했다. 그때 선생님 표정을 보고서 이게 그리 좋은 습관이 아니구나 어렴풋이 짐작했다. 솔직한 게 아무렴 좋겠지. 근데 난 왜 그게 안 될까. 지금 이 글은 최선을 다해 솔직하고자 나름대로 애를 쓴 결과물이다.
나는 켜켜이 쌓인 가면들을 벗어던지고 진짜 나만 남았을 때 그게 과연 좋은 모습일지를 모르겠다. 어떤 모습일지가 우선 두렵다. 그리고 그다음으론, 어쩌면 좋고 나쁘고를 떠나 그냥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불안정한 내 모습이 불편하다. 얼마 전 상담센터에서 하는 집단 프로그램에 참여했는데, 원하는 자기 모습을 도화지에 그려보라고 했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기둥과 뿌리가 과장되게 크고 두꺼운 나무 한 그루를 그렸다. 정말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만한 안정된 특질을 여럿 갖춘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되면 나는 검열을 덜어낸 일기를 쓸 수도 있지 않을까? 보여지지 않는 일기도 이따금 길게 적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2023.12.29 AM 08:05
한 달 사이에 변화가 있었다. 어쩌면 그 변화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진행되고 있었던 것 같다. 댓글과 같은 피드백을 확인하는 것이 전처럼 버겁고 두렵지 않다. 처음 브런치에 댓글이 달렸을 땐 역시나 심장이 요동쳤지만 점차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편안해지고 있다. 지금은 오히려 댓글 알림이 설레고 재밌다.
그래서 이 글을 지울까 고민했다. 그러나 그대로 남겨두기로 했다. 이런 어려움을 안고 이런 고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세상에 꼭 나뿐이진 않을 것 같아서. 이 또한 과거의 내가 남긴 솔직한 기록이니까. 완벽하지 않은 나에 대해서도 연민과 애정이 생겨나고 있는 것 같다. 이 변화가 달갑고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