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책의 기능 (1)
자책은 어떻게 역기능적 자기보호 수단이 되는가
자기소개서엔 쓸 수 없는 비장의 특기가 있다. 손톱만 한 실수로도 나를 벼랑 끝에 몰아세우는 데 있어서는 능수능란한 천재다. 세상에 있는 모든 욕을 다 끌어다 내게 퍼붓는다. 논리의 비약과 파국적 사고가 가히 일품이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나는 순식간에 토를 달 수도 없는 죄인이 되고 만다. 그리고 언제나 내게는 변호인이 없다.
이쯤에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하 갓반인)이 보일 반응을 상상해 본다. "저렇게 살면 피곤하고 힘들겠다." 정도가 아닐까? 그런데 한평생 프로자책러로 살아온 입장에선 부연설명하고 싶은 것이 있다. 자책이 어떤 의미에선 나를 보호하기도 했다는 것. 자책이 아늑하고, 달콤하고, 중독적이기까지 했다는 것.
인간은 불일치와 모순을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더불어 익숙하고 편한 것을 좋아한다. 스스로에 대한 역기능적 신념이 수학적 공리만큼이나 당연한 것으로 단단히 뿌리 박힌 사람(이하 프로자책러)에게는, 칭찬과 격려도 고통을 초래한다. 좋은 마음으로 좋은 말 해준 누군가를 의식적으로 미워한다는 게 아니다. 몸과 마음이 자연스럽게 그것을 시급히 추방할 유해 바이러스쯤으로 여기기에, 내적으로 갈등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그 대신 기존 신념에 부합하거나 이를 강화할 수 있는 사례가 발생한다면 평화는 유지된다. 자책은 심리적 자해이기에 유혈사태에 비견되어야 언뜻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책으로 부가되는 고통보다는, 자책의 재료가 될만한 근거를 묵인하거나 방어할 때의 갈등이 훨씬 크다. 게다가 프로자책러들은 애당초 내면에 고통이 그득하게 흐르고 있기 때문에 자책으로 부가되는 고통쯤이야 사실 그리 크지도 않다.
"뭔 개소린지 모르겠다면 당신은 필시 갓반인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갓반인이 이런 글을 여기까지 읽어내렸을 확률은 낮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그러니 이해가 안 간다면 그건 내 탓이다. 그래서 조금 더 풀어쓰자면, 대개 프로자책러들의 자아는 분열되어 있다.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소리치는 망상을 앓고 있다는 게 아니다. 자책에는 주체와 객체가 필요하다. 당연히 주체도 객체도 나 자신일 때 자책이 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 둘은 별개이다.
이쯤에서 정말 불현듯 내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내 아버지는 일상적으로 가정폭력을 저질렀다. 은총인지 저주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충분히 기억할 만한 초등학교 때의 일조차 제대로 기억하지를 못한다. 대신 흐릿한 사진으로 남은 몇 개의 장면들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내 기억임에도 불구하고 내 뒷모습이 보인다. 나는 방과 거실의 경계인 열린 미닫이문 틈에 서있다. 그날은 아마 경찰을 불렀던 날들 중 하루였을 것이다. 그리고 거실에 세워진 옥색의 스탠드 옷걸이가 폭력의 도구로 쓰였던 것 같다.
내 기억은 왜 보일 수 없는 내 뒷모습이 보이도록 연출을 꾀했을까. 그게 내 죄책감 때문임을 이제야 안다. 나는 그 문틈을 넘어서지 못한 열 살의 나를 미워했다. 겁에 질려 서있지만 말고 내가 뭐라도 하기를 바랐다. 엄마를 구하길 바랐다. 겨우 열 살 난 여자애가 체격 좋은 성인 남성의 무자비한 폭력을 어떻게 멈출 수 있겠느냐는 이성의 논리는 오랜 세월 와닿지 않았다. 그래서 내 기억의 장면은 실제 내 시야에 들어오던 폭력의 주체를 전면으로 비추지 않고, 대신 내 뒷모습을 허구적으로 배치했다. 무력하고, 비겁해 보이도록.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나를 다시 자책하도록.
프로자책러의 내면에는 묘한 균형이 흐른다. 자책의 순간에 객체인 나 자신은 피 흘리고 상처 입더라도, 주체로 분리된 또 다른 나는 승리와 우월감에 도취된다. 나날이 의기양양해지고 몸집도 커진다. 그러니 프로자책러가 평소처럼 자책하지 않고 스스로 다독이려는 순간에, 그들은 내면의 적을 무너뜨려야만 한다. 너무 많은 순간 패배해서 이길 의욕도 들지 않는 상대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