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온통 다른 세계에 살고 있구나 싶으면서도 희한하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가 있다. 나보다 몇 살이 어리고, 성별은 같고, 한때 직장 동료였지만 여하튼 지금은 친구다. 그녀는 외동딸이다. 때때로 '철이 없다', '맹랑하다', '무모하다' 등의 평가를 듣지만 난 그녀를 보면서 '좋은 의미로' 자주 충격을 받았고, 그로부터 많이 배웠다.
예를 들면 이런 거. 온실 밖으로 단 한 걸음 걸어 나가지 않고도 안전하고 행복할 수 있었을 환경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미성년자 시절부터 알바를 했다고 한다. 곱게 자란 티가 너무도 역력해서 지저분하고 무례한 소리엔 결코 면역이 없을 듯하고 조금이라도 궂은일은 반나절도 안 되어 포기할 것 같은 인상인데, 편의점 알바를 2년을 했다고 했다.
정말 그 말마따나 우리는 같은 직장에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입사해서 함께 의지하며 꽤나 버텼다. 어떤 부분에서는 그녀가 나보다 월등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상대적으로 역량이 부족한 업무에 대해서는 짧은 시간 동안 미련하리만치 열심히 준비해 와서 모두의 입을 다물게 했다.
우리는 엊그제 오래간만에 모여 술을 마셨다. 나보다 몇 살 어리다고 모두가 내 동생처럼 정이 가진 않는데 그녀는 어쩐지 늘 내 친동생이라도 된 양 애틋하고 기특했다. 이번에 만났을 때도 그랬다. 퇴사 후 곧바로 다른 곳에 취업했다는 얘기까지 듣고 한동안 연락이 끊겼는데, 새 직장은 일주일 다니고 다른 공부하려고 그만뒀다고 한다. 진로를 위해 일본어 공부를 하고 있다면서 정작 숙제가 올라오는 단톡방을 '조용한 채팅방'으로 분류해 놨다며 웃었다. 그게 참 귀엽고, 어이가 없고, 그래서 여전히 잘 살고 있구나 싶었다.
늦은 시간 모여 마시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새벽이었다. 그녀는 운전을 해야 해서 한 잔도 마시지 않았고, 나와 다른 한 명도 주량에 훨씬 못 미치게 마셨다. 2차는 안 가고 아이스크림집으로 향했다. 새벽 1시에도 아이스크림 전문점이 문을 여는 데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막상 들어가니 포장 전문점이라 앉아서 먹을 곳이 없었다. 걱정 말라며 그녀가 데려간 곳은 바로 근처 공원이었는데, 귀신이든 미친 사람이든 뭐라도 나올 것처럼 심상치 않게 무서웠다.
와중에 작은 연못가의 개구리 떼가 발악하듯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이스크림 수저를 내려놓더니 자기만 믿으라며 비상히 연못가로 향했다. 그리곤 발을 구르며 조용히 하라고 외쳤다. 딴엔 호통이었겠지만 누가 보나 하찮은 짜증쯤으로 보였을 거다. 타이밍 좋게 개구리 떼가 삽시간에 잠잠해질 때면 그녀 얼굴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어렸다. 외딴 공원이라 조금 더 놀다 갈 수도 있었지만, 드세고 악랄한 모기들이 우릴 공격하기 시작하자 우리는 차로 도망쳤다.
새벽 2시가 넘은 야심한 시각인데 그녀가 엄마더러 마중 나오라고 연락을 했다.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마중 나온 엄마랑 같이 집으로 들어가는 게 일상이라 했다. '사랑받는 외동딸의 삶은 역시 다르구나.' 하며 그러려니 넘기려던 찰나 답지 않게 그녀가 말을 보탰다. 전부터 불미스러운 일을 종종 겪을 뻔해서 늦은 시간 귀가할 때는 비록 주차장에서 집으로 향하는 짧은 거리더라도 부모님께서 마중을 나오신다고. 그리고 부모님께서도 이렇게나마 함께 보내는 시간을 달가워하시고 소중히 여기신다고.
"근데 듣고 보니까 우리 엄마였으면 아예 마중은커녕 밤늦게 못 나가게 했을 거 같은데?" 그 말이 곧장 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약간의 술기운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순화되어 표현된 게 천만다행이었다. 실제로 머릿속에 울려 퍼진 말은 이러했다. "이 미친년이 그런 일을 겪어 놓고도 또 새벽 늦게 기어 들어오네. 정신 넋 빠진 년...(이하 생략)" 물론 이건 마중 같은 건 부탁하지도 않고 그냥 혼자 늦게 들어왔을 때를 상상했을 때이다.
금세 또 어린 날 기억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5학년 땐가 학교에서 물건을 잃어버렸다. 엄마한테 말하니 '견물생심'이란 사자성어를 일러주며 내 책임도 크다고 했다. 내가 물건을 보이는 곳에 두지 않았으면 훔쳐간 애한테도 나쁜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 거라고. 내가 조심성 없이 물건을 보이게 두어서 그런 일을 자초한 꼴이라고. 다 여물지 못한 어린 마음에 그 말의 의미가 스미는 동안,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밖에서 억울하고 서러운 일이 생기더라도 엄마에겐 말하지 않게 됐다. 그러나 엄마가 내게 심은 그 말은 저 혼자서도 왕성히 자라나서 무슨 일을 겪을 때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어제는 거실에 있다가 재채기인지 감기 기침인지 모를 뭔가가 연달아 두 번 터져 나왔다. "너는 왜 온 식구 다 옮기게 감기를 걸려 왔냐? 몸 관리를 잘했어야지." 이런 말은 이제 다 닳아져 내겐 너무 공허한 말이다. 수도 없이 들었다. 감기에 걸려올 때마다. 우리 집에선 당연한 규칙 혹은 문화가 다른 집엔 전혀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갈 무렵에도 이 부분에 대해선 구태여 생각해 본 바가 없다. 그러다 이제야 정말 처음으로 곱씹고 생각해 보게 됐다.
어린 날의 그 어느 날에는 한 번쯤 따져보기나마 했을까? 감기에 걸리고 싶어서 걸린 것은 아니라고. 가족들에게 옮기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고. 감기에 걸려온 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고. 내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고. 무엇보다, 지금 내가 아프다고.
누운 채 아직 잠에 들진 못했을 무렵, 그녀에게 카톡이 왔다. 아까 우리가 나눈 대화에 자신감이 '뿜뿜'해서 혼자 '씩씩하게' 집에 왔다고 했다. 우리는 헤어지기 전 차 안에서 납치강간범에 대항할 방법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와중에 전제된 사실은 그 모든 대화에 어떠한 실익도 없다는 것이었다. 언어화된 개꿈이나 다름없는 얘기들이었다. 개중 가장 그럴듯한 아이디어가 목도리도마뱀처럼 걷는 거였으니 말이다.
정말로 그녀가 엄마 마중도 없이 혼자 귀가하는 동안 목도리도마뱀 흉내를 냈는지는 모른다.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그냥 멋지다는 뜻의 이모티콘을 보냈다.
누구에게든 꽤나 의존적인 모습을 보이는 그녀가 아이러니하게도 왜 가장 홀로 서 있는 듯 보이는지에 대해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담배를 피우는 그 잠깐새도 혼자 있기 싫다며 비흡연자인 내가 같이 있어주길 바라고, 외로운 게 싫다며 끊임없이 사람을 만나고, 용건 없이도 거리낌 없이 전화를 걸어오는 그녀에겐 있고 내겐 없는 것.
그건 기준과 규칙이다. 곧 마음의 중심이다. 견고한 믿음이다. 그게 객관적으로 옳고 그른지는 중요치 않다.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여진대도 마찬가지로 중요치 않다. 그녀 세상은 대개 반짝거리고 화려하지만 속을 낱낱이 들여다보면 아주 단순한 믿음과 규칙으로 구성된 듯하다. 의도치 않은 불상사는 죄로 치부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로 인한 제한도 속박도, 뒤따르는 죄책감도 없다. 그리고 그녀 말에 따르면(물론 농반진반이겠지만) 그녀는 세상 가장 강하다고 한다. 그래서 시끄러운 개구리 떼도 잠재우고, 집에도 혼자 걸어갈 수 있다고 한다. 그 믿음에 얄밉게 반기를 들어 따지고 괴롭히는 내적인 목소리가 그녀에겐 없다. 그녀가 정하고 그렇게 믿는 한 그 효력은 무한정 강력하다.
의심의 늪에 빠져 사는 이는 기를 펼 새가 없이 무력하고 나약하다. 결실도 없이 늘 지쳐있다. '그때 내가 화를 낸 건 옳은 행동이었을까?', '나는 이기적인 걸까?', '나는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 따위를 고민하며 시간을 허비한다. 그러는 새에 누군가의 세계는 비할 데 없이 명료하게 안전하게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새도 없을 만큼.
내 감정과 생각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 누구도 절대적인 선악의 이분법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 '살 만한 가치'라는 건 결국 허상이라는 것, 그런 게 있대도 그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이는 나 자신뿐이라는 것, 어쩌면 살고 싶은 마음 하나가 가치를 압도할지도 모른다는 것. 이런 믿음들이 견고히 토대를 이룬 세상에 살고 있는 이와 속절없이 무너져내리는 모래성 사이를 배회하며 사는 이에게는 이해할 수도 좁힐 수도 없는 간극이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