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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마 Aug 20. 2024

수상할 정도로
착한 사람들만 있는 회사

나르시시스트 대표와 에코이스트 직원들



"선생님, 근데요. 거긴 진짜 신기할 정도로 착하고 좋은 사람들밖에 없어요. 어떻게 이런 사람들만 모였을까 싶어요."

"우와. 엄청 빨리 깨달으셨네요? '그런 곳'은 원래 그런 사람들만 남게 돼요. 전 그걸 2년 차에 깨달았는데..."


'그곳'을 나온 직후 상담사와 나눈 대화. 착하지 않은 사람들은 일찍이 제 발로 나갈 수밖에 없는 곳에서 나는 반년을 일했다. 희한하리만치 결이 비슷한 사람들만 모여 있는 그곳에서 인생에서 가장 밀도 높은 반년을 보내면서, 속절없이 정이 들었다. 남들 보기엔 겨우 반년이겠으나 내게는 몇 번의 고비를 넘기고 버틸 만큼 버틴 반년이었다. 그리고 나를 버티게 한 건 오직 그곳의 '사람들', 그뿐이었다. 여길 나가면 지금처럼 이들과 부대끼며 오랜 시간 함께할 수 없으리란 게 다만 안타까웠다.


그러나 그런 한편, 나는 '그런' 사람들만 모여 '그토록' 유대를 쌓을 수밖에 없게 되는 그 모든 상황들이, 결코 바람직하거나 정상적이지는 않다고 규정했다. 그래서 5월 말 그곳을 떠났다. 퇴사자가 재직자들과 어울려 논다는 게 조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자연히 연이 끊길 줄 알았건만, 아직도 자주 연락하고 만나면서 인연을 유지하고 있다.


나는 그곳을, '나르시시스트 대표와 에코이스트 직원들'이 모인 회사라고 마음속으로 결론 내렸다. 성급하고 부정확할 순 있어도, 이보다 경제적인 표현은 없을 것이다.




내가 나르시시스트 관련 지식에 가닿게 된 계기는 대략 1년 전 한 심리학 연구에 참여하면서부터이다. 모녀관계에 대한 설문에 참여한 후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연구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설문 결과를 토대로 인터뷰 대상자로 선정되었다면서 5만 원의 페이를 지급할 테니 1시간가량의 인터뷰에 참여해 달라고 했다. 그저 개꿀이란 생각밖에 안 들어서 곧장 하겠다고 했다. 


곧이어 연구자로부터 인터뷰 질문 목록을 메일로 받았다. 인터뷰가 매끄럽게 진행되도록 미리 질문을 숙지하고 어느 정도 답변을 준비해와 달라고 했다. 그제야 나는 그 연구가 나르시시스트 엄마를 둔 딸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정확히는 '자기애적인격장애 성향'이라고 표현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자기애적인격장애나 나르시시스트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건 뭔가 잘못되었을 거라고 무작정 부정하고 싶었다. 질문들을 읽어 내려갈수록 거의 마음이 무너지다시피 했다.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돈 5만 원 벌겠다고 엄마 흉을 보는구나 싶었다. 엄마의 폭언, 폭력, 가스라이팅을 상기하면서 마음이 아팠던 게 아니라, 밝혀지면 안 될 것을 밝히게 되었다는 어떤 공포 같은 것에 사로잡혔다.


그래도 인터뷰에는 참여했다. '이 정도 사건들은 다른 모녀관계에서도 충분히 일어나겠지' 하는 마음으로 애써 태연히 준비해 온 답변을 뱉었다. 인터뷰가 끝나자 연구자는 내가 성실히 답변해 준 덕에 인터뷰가 조금 길어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겪은 일들이 자기애적인격장애 성향을 가진 어머니를 둔 딸로서는 보편적이고 전형적인 경험이라고 했다. 심리상담을 꼭 받을 것을 거듭 당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니 자기애적인격장애니 하는 것들을 그 당시에는 결코 알고 싶지도 믿고 싶지도 않았다. 그 일을 잊는 것이 속 편하겠단 생각이 들어 그렇게 했다. 그러고 나서 한참 후에야 우연히 다시 관련 지식을 접하게 됐고, 더불어 알코올중독이 오래 진행되면 성격장애로 발전할 수도 있단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됐다. 그리고 바로 얼마 뒤에 '그곳'에 입사하게 됐다.




대표에 대한 내 초기 인상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사실 면접 때만 해도 무섭고 냉랭하게 보이긴 했으나, 그로 인해 기대치가 현저히 낮아진 탓인지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일 때마다 호감도가 널뛰듯 올랐다. 무엇보다 내가 갖고 있지 않은 특성들을 많이 갖고 있다는 데서 나는 그에게 높은 점수를 줬다. 그는 나로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을 만큼 자신감이 넘치고 확신에 차 있었다. 그가 살고 느끼는 세상이란 모든 것이 분명하고 간단해 보였다. 자기 자신이라는 거대한 중심이 자리하고 있으니 의심도 후회도 없이 앞만 보고 내달릴 수 있는 듯했다. 나와는 다른 세계 사람 같았다. 동시에 저렇게 살면 인생 살기 참 편하겠단 생각도 했다. 무의식 중에 그를 동경하고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내가 판단력을 잃게 된 시점은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그를 닮고 싶었고, 그렇기에 그는 그럴 만한 존재여야만 했다. '사람들을 도구로만 취급했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듣고도, 그 말이 과거형이니 현재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퇴사한 사람 중에 잘 된 사람이 있을 줄 아느냐'는 뻔한 가스라이팅을 교육기간부터 들으면서도, 그 말에 내포된 악의를 짐작지 못했다. 급여, 근무시간, 근무환경 모든 것이 채용공고 및 면접 때 접한 정보와 판이하게 달랐음에도 부당함을 느끼지 못했다.


돌이켜 보건대 내 가장 큰 실수는, 반년 간 그곳에서 보고 듣고 겪은 모든 것들을 외부와 공유하지 않은 것이었다. 누군들 상황을 들으면 당장 나오라고 할 것을 내심 알았다. 하지만 내가 제 발로 들어간 회사가 말 그대로 '이상한' 곳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무참히 현실이 된다면, 차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모든 게 내 잘못일 것 같았다. 하필이면 거길 들어간 것도, 그 안에서 그만큼을 버틴 것도 다 내가 미련하고 부족해서 벌을 받은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나는 예상되는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대표가 세뇌하듯 주입한 그놈의 '열정'과 '사명감' 때문에, 나는 가장 일찍 출근해 가장 늦게 퇴근하기를 자처했다. 휴일에도 당연한 듯 출근했다. 그 반년 가운데 단 몇 시간이라도 근무하지 않은 날은 손에 꼽는다. 휴일을 앞둔 날마다 동료들이 '내일도 출근하면 다시는 너랑 야식 먹지 않겠다'며 협박했지만, 끝내는 말 더럽게 안 듣는다며 나를 포기했다. 물론 그렇게 일했다고 해서 추가로 받은 돈은 단 한 푼도 없었다.


나는 거짓말쟁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게 내가 그토록 미련하게 일한 이유였다. 일반적인 직종이 아니었다. 프리랜서 계약을 맺었지만 어떠한 권리도 보장받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맡은 수십 명의 고객들에겐 할 수 있는 한 정성을 다하고 싶었다. 그래서 대표가 고객들을 거의 속이다시피 하면서 제공되는 서비스의 시간과 횟수를 거짓으로 부풀려 설명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그 책임을 모두 떠안았다. 그는 말만 잘하면 될 일이라며 태연했으나, 나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늘 시간이 모자랐다. 양심껏 일하려고 하니 정말로 물리적 시간이 충분치가 않았다. 


그래도 내가 하는 일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사람을 성장시키고 돕는 일이라고 애써 합리화하다가도, 정말 이건 아니다 싶을 때가 수십 번은 있었던 것 같다. 그럴 때마다 같은 공간에 있는 동료들을 지긋이 관찰했다. '나는 그렇다 쳐도, 저기 앉아있는 저 사람들도 속고 있는 걸까?' 하고 생각하다 보면... 글쎄, 그럴 것 같진 않았다. 너무도 멀쩡하고, 건강하고, 심지어 행복해 보였다. 그러다 보면 그 부글부글 끓던 마음이 적잖이 달래져서 그냥 다시 일이나 하곤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히 깨달은 것은, 한데 부대껴 울고 웃던 그들이 그저 착하기만 한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착하고 병든 사람들'이었다. 착해서 병이 들었는지, 병이 들어 착해졌는지는 몰라도, 여하튼 그들은 그 두 속성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그저 평범해 보이지만 얇은 한 꺼풀만 벗겨내도 드물게 순수하고 연약한 모습들이 그대로 비쳤다. 한 사람 한 사람 깊이 대화를 나눠볼수록, 그들 모두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자존감이 낮았다. 개중엔 겉보기에 자신만만해 보이는 사람마저 있었으나 속내는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예민했다. 지극히 예민한 기질을 타고나서 정작 남들은 필요로 하지 않는 고도의 배려를 하느라 남몰래 진을 빼고, 그탓에 오히려 둔하고 무던한 사람으로 오해받기 십상인 이들이 있는데, 그들이 그러했다. 그래서 우리끼리만 있으면 도무지 불편할 일이 없었다. 그걸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이 안에서 만난 사람들이 참 소중하다고, 계속 인연이 유지되길 바란다는 누군가의 말에 모두가 묵묵히 동의했다.


함께 휴가를 갔었다. 퇴사 직전 업무를 마무리할 즈음이었다. 본디 여행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 사람들이랑 가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생전 처음 물수제비도 던져보고, 비눗방울을 원 없이 불고, 마시멜로우 기가 막히게 잘 굽는 법도 배웠다. 나는 그 여행 내내 틈만 나면 잠을 퍼 잔다며 욕을 있는 대로 먹었으나, 사실은 그 모든 순간이 참 편안하고 행복했다. 무방비하게 잠이 들 수 있을 정도로 나를 둘러싼 그들이 안전하게 느껴졌다.




수십 년간 상담 경력을 쌓아오신 센터장님을 종종 뵙는다. 그분께도 이 얘기를 털어놓았다. 예상과 달리 은근한 반색을 띄우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상이 원래 그렇게 이치대로 안 돌아가는 법이야. 이제 조금씩 익숙해지면 되는 거야. 또 하나 배웠겠구먼."


내가 떠난 후 한 명이 더 그곳을 떠났다. 다른 둘도 퇴사 예정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조금 더 남아있을 듯하다. 언제 어디서든, 어떻게든, 그들이 안전하고 행복하길 바란다. 그런 한편,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만큼 조금은 날이 서고 때가 타길 바란다. 때로는 자기주장을 내세우며 서로 다투는 날도 오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기도 안에 내가 포함되기를, 다른 사람 말고 나를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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