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아이는 착한 어른이 될 수 있는가
지독하게 낯 뜨거운 사춘기를 나이 서른 먹고 겪어야 하는, 이 은밀한 쪽팔림과 당혹감을 달리 호소할 곳이 없어, 다시 이 방치한 창고 같은 곳을 찾았다. 나는 이제 와서, 이제 와서야, 내가 도무지 누구인지 모르겠다. 모르겠다는 건 달리 말하면, 이제야 알고 싶어졌다는 뜻이다. 아마도 그전에는 내가 무엇으로 구성된 인간인지를 속속들이 파헤치고 싶은 열망이나 애정이 없었을 것이므로. 하지만 이제야 알고 싶고 다시 세우고 싶어진 나를, 파헤치고 가다듬을수록, 어쩐지 하루하루가 더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 부정할 수 없는 그 서슬 퍼런 감각이 나날이 경보음을 울릴 때마다, 나는 차라리 도망치고 싶었고, 때론 정말 그랬다. 그런데 나를 온전히 구할 만큼의 능력과 용기는 없고, 나를 아주 버릴 만큼의 냉소와 증오도 이젠 없어서, 애매하게 숨이 붙어 떠내려오는 꼴이 되어 기어이 오늘을 맞았다.
90년대생으로서 나는 여느 또래처럼 온갖 만화영화를 섭렵한 아이였는데, 그에 비해 주요 내용이나 장면은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지몬에서 유난히 내 어린 마음에 콕 박혀 서른 먹고도 기억하는 장면이 하나 있다. 이름은 기억 안 나는 어떤 캐릭터가, 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떴을 때, 그 애 부모가 짐짓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아마도 그 애 어머니가 이런 말을 했다. 차라리 편식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그 캐릭터는 기이할 정도로 나이에 비해 어른스럽고, 그래서 손이 갈 곳이 없는, 참 착하고 의젓한 캐릭터였을 것이다. 나는 그 장면이 몹시 마음이 쓰여서 오래도록 간직했다. 그게 당장에, 그 후 오랜 세월 동안, 어떤 변화를 초래하진 못했다. 다만 나는 그 장면이 언젠가 내 안에서 다시 울릴 경보장치가 될 것을, 그때 이미 알았다.
누구나 요란스러운 사춘기를 겪고서야 어른이 되지는 않겠지만, 마땅히 지나야 할 최소한의 격동이 없이 세월 따라 어른이 된 이는, 필연적으로 어느 순간 무언가 잘못됐다는 느낌에 휩싸이게 된다. 사람으로, 어른으로 제 구실을 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그리고 이미 갖고 있어야 할 그 무엇들이 내겐 없는 것 같은 기묘한 불안감. 어느 교육과정에도 없고, 웬만큼 허심탄회한 대화 속에도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 주제. 예를 들면 이런 거. 나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남들에게 얘기해야 할 때, 그게 그렇게 부끄럽다. 짧은 말로, 때론 긴 문장으로 나를 소개해야 하는 상황도 늘 처음처럼 곤혹스럽다. 이 나이쯤 되면 다른 내 또래들은 어지간히 잘 벼려진 문장으로, 혹은 그것들이 얼마나 멋진 표현들인지는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거리낌이 없는 확신으로 자기를 소개할 줄 아는 것 같다. 나만 빼고. 그런 날 밤에는 사춘기를 벼락치기하려고 나를 들들 볶으며 취조하게 된다. 넌 누구고, 어떻게 살고 싶고, 뭘 잘하고, 뭘 좋아해? 그런 질문들은 성급하고, 무례하고, 기준도 없고, 만족을 모른다. 나는 무수한 답을 얻고도 어느 것에도 확신하지 못한 채, 다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다.
이제야 나를 알아가려는 뒤늦은 발버둥에 일말의 애정조차 없었을 리는 없다. 하지만 나는 더 다정하고 세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를 알아가려는 모든 순간들이, 내가 나를 모르고 있다는 어찌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직면하는 연속이었음을 알았다면, 그래서 나를 잘 달래줬더라면, 지금 이런 기분을 겪진 않았을 것이다.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가. 충분히 잘 살고 있을 때 그걸 의식적으로 음미할 수 있는 이가 충분히 많은지 나는 모르지만, 잘못 살고 있을 때 도무지 그걸 모를 수가 없다는 사실 쯤은 나도 안다. 외면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한 가지는, 나를 돌보지 못하고 내 공간도 돌보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언젠가 유튜브에서 이른바 쓰레기집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업체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각기 다른 듯 비슷한 사연들로 쓰레기집 안에 몸을 누이고 매일 눈을 뜰 그들이 그때는 조금 가여웠고, 그보다 조금 더 안도했다. 나는 아무리 추락해도 그렇게는 안될 사람 같았다. 그렇게 된 적이 없었으니 당연히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았다.
오늘 아침에는 처음으로 나도 그런 정리업체를 불러볼까 생각했다. 검색을 하거나 견적을 알아보진 않았지만, 그렇게까지 하는 건 좀 오바 아닌가 생각도 했지만, 여하튼 나는 내가 과거 철저한 타자로 분류했던 그들과 별반 다름이 없음을 마침내 인정해야 했다. 발끝에 채이는 빈 생수병과 맥주캔을 주워 들기는커녕, 이미 이렇게 된 김에 아무 쓰레기나 바닥에 버리고 쌓아두는 마음을, 치울 용기가 없어 차라리 불을 끄고 살게 되는 심정을, 영영 모르고 살았으면 좋았을 그 마음을, 내가 알게 된 것이다.
'내가 소중하다면, 조금이라도 나를 돌볼 마음이 있다면, 내가 나를 이렇게 대할 수는 없을 텐데...' 하는 마음으로 매일을 산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에 몰두한 날에도 나를 위한 한 줌의 뿌듯함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나를 정말 무너지게 하는 건, 내가 의식적으로 내 노력이나 성과를 경시하거나 나를 채찍질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요즘은 그 반대가 되어, 작은 일이나마 스스로 인정하고 칭찬해 주려고 노력하는데, 단지 내게 '뿌듯함'이란 감각에 대한 데이터가 없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이미 수없이 겪어봤음직한 그 느낌에 대한 데이터가 내겐 전무해서, 필요할 때 불러오려고 해도 매번 실패한다. 짐작컨대 뿌듯함이란 아주 착실하고 요긴한 성취의 동력이 아닐까. 그래서 내겐 그게 없기 때문에, 아무 목표도 세울 수 없는 게 아닐까.
어린 날 나는 궤도의 가장 바른 자리에 서서 선두를 달리던 아이였는데, 어른이 된 지금은 어느 틈엔가 궤도를 이탈해 아무렇게나 걷고 달리는 사람 같다. 이제는 귀엽지도 가엾지도 않은 어른이 되어 누구의 살뜰한 보살핌도 기대할 수 없는데, 나는 이제야 내가 한참을 덜 자란 사람인 것을 안다. 서른 살의 사춘기는 언제가 돼야 잠잠해질까. 아직 어리고 서둘러 철들지 않아도 되었을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무서울 때 무섭다고 말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달라 말할 거다. 실수와 잘못들을 무수히 저지르면서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을 익히고, 온몸으로 부딪치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이미지를 선명히 쌓아갈 것이다. 아주 솔직히는, 서른 살도 아주 늦진 않았다고 나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