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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핵보컬 Mar 15. 2024

마음이 혼란할 때는 힙합을 듣는다

Eric B. & Rakim - Follow the Leader

예전에 친한 친구 하나가 머리를 좀 식히고 마음의 정리가 필요할 때면 Korn의 4집을 듣는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의도와 미묘하게 엇갈려있는 음악이지 않나 싶은 감은 있지만 개인의 취향이 그렇다니 그냥 그러려니 했던 것 같은데, 비슷하게도 요즘 나는 뭔가 의욕이 떨어지거나 마음이 붕 뜬 기분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을 때는 힙합을 들으면서 마음의 평화를 갈망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말하는 힙합은 Cardi B나 Travis Scott 같은 요즘 힙합 아티스트의 음악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올드 스쿨 힙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비트와 그루브에 정직하고 명료하게 꽂히는 가사, 침착하지만 살짝 격앙된 분노가 느껴지는 딜리버리와 플로우, 시 낭독과 거리 연설 사이 어디쯤에 위치한 듯한 발성 등이 적어도 나에게는 이러한 힙합의 매력을 확실하게 만드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Notorious B.I.G., Wu-Tang Clan부터 A Tribe Called Quest, Jurassic 5와 Cypress Hill, House of Pain, DJ Jazzy Jeff & the Fresh Prince까지 각자의 영역에서 본인들의 어그레시브하며 강직하고 때로는 유연한 면모를 자랑하는 매력 있는 아티스트들이 각자의 매력을 뽐낸다.

노트북과 인터페이스만 있어도 음악이 되는 시대이지만 턴테이블을 우직하게 돌리는 DJ는 언제나 동경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나도 한 때는 트렌디한 힙합 아티스트들의 궤적을 좇으며 스스로의 음악적인 취향을 유행에 뒤처지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던 적도 있다. 당시에 온갖 이슈를 몰고 다니며 새로운 시대의 락스타로 등극한 Travis Scott이나 A$ap Rocky, Lil Uzi Vert부터 Jpegmafia, clipping.처럼 다소 주류에서 살짝은 벗어나 있긴 하지만 매니아층에게 어필하며 업계의 주목을 받는 힙합 아티스트까지 파고들어 그들의 음악을 열심히 들으면서 그 혼란스러운 듯하면서도 화려한 그루브에 적응해 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매력에 어느 정도는 공감하면서도 이제는 나도 나이가 들어버린 것인지 이들의 비트에 몸을 맡겼다가는 고꾸라져 궤도에서 이탈할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결국 '요즘 힙합'에는 온전히 빠져드는 데에 실패하고 말았다.


일을 마치고 피곤한 몸이 휴식을 부를 때에 재즈와 클래식은 졸릴 뿐이라는 생각이 들 때에, 올드 스쿨 힙합을 재생하면 생각보다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자연히 어깨를 들썩이게 만드는 'Boom! Shake The Room'이나 'Jump Around' 같은 대중적인 넘버들이나 다크하면서도 팝적인 어필을 놓지 않는 Notorious B.I.G.의 'Hypnotize'나 'Mo Money Mo Problems' 같은 명곡, Chali 2na의 극저음 래핑이 매력적인 Jurassic 5의 곡들이나 Q-Tip의 독특한 음색이 귀에 바로 꽂히는 A Tribe Called Quest의 음악까지 의외의 트랙들이 혼란한 마음에 묘한 평화를 가져다준다. 예전에는 '신나는 락/메탈 연주에 랩까지 얹은 랩메탈/뉴메탈 곡들이 있는데 굳이 왜 힙합을 들어야 하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은 군더더기가 없이 본질에 치중한 랩 음악에 강한 매력을 느낀다.

약간 색다른 쪽이 당길 때에는 동쪽으로 눈을 돌리면 Nujabes, Cradle, Kenichiro Nishihara 등의 아티스트들의 음악이 본토와는 아예 다른 정서와 감성을 어필하는데 이 또한 굉장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재즈를 샘플링했으나 노골적이지는 않은 따뜻한 사운드 위에 얹히는 담담한 래핑, 한창 유행할 시기의 2000년대 시부야 케이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아기자기한 효과음의 디테일들이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힐링 음악'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대중적인 성향이 강해서 묘한 쌈마이 정서마저 느껴지는 M-Flo의 음악이나 적당한 어그레시브함을 보여주는 초창기의 Dragon Ash의 음악 역시 궤를 달리 하긴 하지만 때로는 굉장히 끌리기도 한다.


이런 힙합 음악을 즐겨 듣기는 하지만 내가 힙합 매니아임을 자처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고, 사실 이 장르의 앨범을 통째로 온전히 즐겨 듣는 경우는 많이는 없다. Cypress Hill의 'Black Sunday', House of Pain의 셀프타이틀 같은 앨범은 굉장히 자주 즐겨 듣지만 사실 이러한 앨범들은 기본적으로 랩메탈, 뉴메탈을 듣는 이라면 좋아할 수밖에 없는 느낌이라 조금은 식상하기도 하다. 마치 림프 비즈킷과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을 좋아하는 음악 팬이라면 에미넴과 비스트 보이즈를 어느 정도는 즐겨들을 확률이 높은 것처럼 말이다. 그런 차원에서 이러한 올드 스쿨 계열의 음악 중에 즐겨 듣는 앨범을 제대로 꼽아보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 Eric B.와 Rakim의 'Follow the Leader'가 아닐까 생각한다. 무려 1988년에 발매된 앨범인데 시간을 초월한 명작 앨범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확실히 클래식한 느낌은 있지만 촌스럽거나 뒤쳐졌다는 기분은 전혀 들지 않는다. 긴박한 리듬 구성이 돋보이는 'Follow the Leader'와 훗날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이 리메이크하기도 한 명곡 'Microphone Fiend'가 초반부터 강렬하게 듣는 이를 사로잡는다. 'Follow the Leader'의 경우 재즈 음악계의 대부인 Bob James의 'Nautilus'를 샘플링한 것으로도 음악 매니아들의 입에 오르내리는데 재즈를 좋아한다면 흥미로운 요소로 느껴질 수도 있을 법하다. 중간부터 뒤로 갈수록 조금씩 페이스가 루즈해지는 감이 없지는 않지만 '근본 힙합'의 정수를 느끼고 싶다면 강력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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