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ne Inch Nails - The Downward Spiral
디지털 스트리밍이 음악을 듣는 가장 보편적인 수단이 된 지금, 세계적으로 그 선두주자라고 할 만한 플랫폼은 애플 뮤직과 스포티파이의 양대 산맥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액면상으로 둘은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이나 사실 리스너에게 어필하는 메커니즘의 측면에서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양쪽 모두 한쪽에 없는 기능이 있다거나 다른 쪽에 비해 엄청난 독보적인 강점이 존재하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본 바로는 설정을 제대로 해놓은 상태에서는 온전히 하나의 앨범을 처음부터 감상하는 데에는 애플뮤직이, 내 취향에 맞는 음악을 추천받거나 신경 끄고 적당한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해서 돌려놓고 싶을 때에는 스포티파이가 더 유용하지 않나 생각한다. 특히 스포티파이는 애플뮤직에 비해 플레이리스트의 큐레이팅 면에서 좀 더 해당 유저의 취향에 맞는 음악을 기가 막히게 골라주는 강점이 있는데, 접근성 면에서 월등할 수밖에 없는 애플 뮤직의 존재 하에서도 아직 스트리밍 플랫폼으로서 꾸준히 명맥을 이어가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스포티파이에서는 주로 락이나 메탈 음악을 많이 듣는 편이었기에 추천받는 플레이리스트도 그런 쪽이 많은 편인데, 며칠 전에 눈을 사로잡은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Misfits 2.0'이라는 재생목록이었다. 새로운 시대의 사회적 부적응자를 의미하는 것인가 싶은 느낌의 제목에 대충 훑어보니 눈에 보이는 아티스트가 Bring Me the Horizon, Yungblud, Poppy 같이 요즘 락 쪽에서 여러 장르를 센스 있게 잘 믹스하는 이들이었기에 흥미를 갖고 재생을 시작했다.
해당 플레이리스트에는 처음 보는 아티스트들의 음악도 꽤 존재했는데, 대부분이 다양한 장르를 접목해 놓은 음악이었다. 음침한 느낌의 테크노와 락 사운드를 조합한 것도 있었고, 아예 컨트리 음악에 데쓰코어 사운드를 융합한 듯한 신기한 곡도 존재했으며, 90년대 펄잼이나 앨리스 인 체인스가 떠오르는 얼터너티브 락 사운드의 연주에 멜로딕 힙합을 얹은 듯한 음악도 있었다. 신선하고 좋은 곡들도 있었고, 신기하기는 하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는 않는 음악, '이 아티스트의 곡은 좀 더 들어보고 싶은걸' 하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것들도 적잖이 존재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받은 느낌은 이 곡들이 현세대만의 독창적인 것들이라기보다는 마치 나의 고등학생 시절에 호러 영화나 SF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샀을 때 들었던 음악들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특정 영화나 애니메이션 및 드라마의 사운드트랙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연주 스코어를 말하거나 엔딩 곡 정도로 발매되는 싱글 한 두곡 정도를 가리키지만, 약 20~30년 전에는 영화 OST라고 하면 주로 컴필레이션 앨범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사운드트랙을 차지하는 지분의 대다수는 뉴메탈이나 랩메탈, 헤비메탈, 인더스트리얼, 혹은 거친 힙합곡 및 그것들을 조합한 그 사이 어디쯤의 음악들이 차지했다. '스폰', '매트릭스', '엔드 오브 데이즈', '프레디 vs 제이슨', '블레이드', '드라큐라 2000' 등의 영화의 OST 등이 떠오르는데 이들은 히트하는 영화와 시너지를 일으키며 윈윈 효과를 내거나, 혹은 영화는 망하더라도 'OST는 좋았다'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대부분 각 사운드트랙의 곡들만은 훌륭했기에 영화를 보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사운드트랙 CD는 구매하는 경우가 꽤 있었던 것 같다.
상기한 플레이리스트에서 내가 처음 보는 뮤지션들이 성공하는 흥행 아티스트들이 될지, 아니면 이미 유명인들인데 나만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앞서 말한 OST들의 13번 트랙 정도에 위치했던 끼워팔기 신인 뮤지션들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묻힐지에 대해서는 확답을 내리기가 힘들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 가장 지배적으로 드는 생각은 '이런 음악을 요즘도 듣는 사람들이 많은가? 수요가 있으니 이런 뮤지션들이 속출하는 것이겠지?'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근 몇 년 동안 뉴트로 열풍에 힘입어 서양에서 뉴메탈이나 90년대 말 문화의 재유행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느꼈고 이전에 쓴 글들에서도 수 차례 언급한 적은 있지만 이런 붐이 현재 사그라들기보다는 오히려 더 심화되어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Balenciaga나 Vetements, Off White나 Rick Owens 같은 패션 브랜드들에서 근래에 내놓는 상품들을 보면 대부분 영화 '매트릭스'와 예전 개콘에서 보았던 '패션 No.5' 코너의 사이 어딘가쯤에 있는 듯한데, 속된 말로 'ㅂㅅ같지만 멋있어'와 '일부러 웃기려고 저렇게 만드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들기도 한다. 소위 말하는 '중2병'이라는 단어 자체가 사실 90년대 중후반에 유행했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주인공 이카리 신지나 세기말 여러 작품들의 세계관이 그 원류이지 않을까 싶은데 인구 절벽과 젠더 갈등 및 정체성 혼란 등으로 인해 진정한 '중2병'과 '세기말' 정신이 단순한 잠깐의 유행이 아니라 현세대의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게 된다. 내가 어릴 때 좋아했던 것들과 비스무레한 것들에 대한 수요가 요즘도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반가움과 '과연 이래도 되는 것일까' 싶은 우려가 동시에 나의 뇌를 스치는 순간이다.
이런 음악이나 정서라고 하면 그 조상님 격이라 할 수 있는 앨범 중 하나가 바로 Nine Inch Nails의 'The Downward Spiral'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 성공한 영화음악가로 등극한 점잖은 근육질의 중년 남성이 된 트렌트 레즈너의 모습에서는 쉽게 떠올릴 수 없지만, 이 당시만 하더라도 그는 같은 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깡마른 몸에 눈이 안 보일 정도로 앞머리로 얼굴을 뒤덮고 중성적인 옷차림을 하고 디스토피아적인 절망을 작열하는 일렉트로닉 락/메탈, 인더스트리얼 사운드 위에 절규하는 창법으로 노래했던 진정한 세기말적인 아티스트였다. 뒤틀린 섹슈얼리티와 말세의 불안한 정서를 불길한 굉음에 녹여낸 '중2병의 끝판왕'이라고 볼 수도 있는 음반이라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한다. 재미있는 점은 이 당시 비슷한 아티스트들의 음반을 지금 와서 다시 들으면 오래 듣기가 힘들 정도로 '아, 나올 당시에는 좋았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 듣기에는 사운드가 촌스럽거나 질리기 쉬운 것들이 꽤나 존재하는데, 이 음반은 오히려 지금 들어도 몇십 년 전에 나온 앨범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을 정도로 현시대/세대와도 공명을 일으킬 만하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세기말적 중2병'의 시대를 아우르는 올타임 클래식이라고 해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