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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핵보컬 Mar 01. 2024

사이버펑크는 죽지 않는다

The Prodigy - The Fat of the Land

일본 애니메이션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었던 시절인 80, 90년대에 상당수의 대표 작품들은 스팀펑크 계열과 사이버펑크 계열로 나누어졌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를 주축으로 한 지브리의 애니메이션들은 스팀펑크의 메카닉을 내세우는 작품들이 많았다. 전자기기를 배제하고 증기기관을 기계의 주축으로 삼아 작게는 비행정부터 크게는 거대 로봇까지 아우르는 독특한 비주얼을 내세우는 작품들이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는데 '천공의 성 라퓨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부터 '하울의 움직이는 성'까지 시대상을 알 수 없는 개성적인 비주얼과 세계관으로 보는 이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이와는 다르게 '아키라', '공각기동대' 같은 작품들은 미래의 도시를 배경으로 사이보그와 컴퓨터, 디스토피아적인 분위기를 아우르는 사이버펑크 계열의 세계관을 선보였다. 이런 작품들에서는 주로 기계와 인간의 경계가 애매해지는 데에 있어서 오는 갈등과 고찰, 높아지는 범죄율에 따라 자유와 방종과 통제의 정당성이 논란의 도마에 오르는 등의 진지한 주제를 매력적인 비주얼, 강렬한 액션과 섞어서 그려내어 매니아층을 이끌어냈다.

사이버펑크 vs 스팀펑크

이로부터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스팀펑크 컬쳐는 적지 않은 매니아층은 존재하지만 대중적인 어필은 많이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이버펑크 문화는 여전히 건재한 듯하다.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엄청난 붐을 일으킨 영화 '매트릭스' 시리즈를 필두로 하여 다양한 영화와 애니메이션, 게임, 심지어는 음악 씬과 패션 쪽에서도 여전히 사이버펑크의 비주얼과 분위기를 내세운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근래에는 아예 '사이버펑크'라는 단어 자체를 제목에 내세운 '사이버펑크 2077'이 게임과 애니메이션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반면에 스팀펑크는 영화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나 '젠틀맨 리그', '모털 엔진' 등의 작품이 모두 흥행에서 쓴맛을 봤으며, 근래에 1965년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듄' 시리즈가 그나마 관객의 주목을 받고 있으나, 이 역시 전자기기를 배제했을 뿐 비주얼적으로나 기계의 작동 원리 면에서 스팀펑크와는 거리가 있는 편이다.

사이버펑크 심벌 키아누 리브스

스팀펑크와는 다르게 사이버펑크가 현재까지도 문화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우리 안의 중2병을 자극하는 미묘한 분위기와 비주얼, 작품의 청각적 공백을 가득 채우는 신나는 일렉트로닉과 메탈, 힙합 음악이 아드레날린을 극도로 끌어올리는 점도 큰 매력 포인트일 것이다. 하지만 사이버펑크 어필의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체감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스팀펑크 작품의 배경은 평행세계나 환상 속일 수밖에 없는 반면에 사이버펑크 작품의 배경은 '실제로 우리에게 다가올지도 모르는 미래'이다. 과거의 사이버펑크 영화나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기술이나 이벤트들이 현재에는 상용화되거나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재현되기도 했으며, 작품 속 캐릭터들이 하는 고민은 어느새 성인이 된 우리가 겪는 갈등과 밀접하게 닿아있다. AI 기술의 발전을 현재의 제도와 인간의 윤리가 따라잡지 못하게 된 지금 시점에 '인간과 기계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 '어느 순간 인공지능이 인류를 삼켜버리는 날이 오지 않을까'라는 고민과 걱정은 이제 공상과학이 아닌 우리의 현실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공상과 잡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우던 무렵 했던 엉뚱한 상상이 두 가지 있었다. 한 가지는 영화 '매트릭스'에서처럼 인류가 기계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AI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상현실의 오감 만족도가 현실 이상으로 높아진다면 어느 순간 인류는 자발적으로 AI가 만들어주는 세계와 자극에 스스로를 플러그인 해버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실제로 코로나 판데믹이 세계를 휩쓸던 무렵에 언론과 기업에서는 '메타버스'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여 인류가 현실보다 가상 세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돈을 쓰게 만들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비록 그 기술적 완성도가 기대에 비해 형편없었기에 '다행히' 실패로 마무리되기는 했으나 더 발전한다면 그 유혹을 뿌리치기는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상상 하나는 내가 죽어서 천국에 가면 거기에는 마법의 기계가 있어서 내 취향에 맞추어 존재하지 않는 너바나의 정규 4집 앨범이나 아놀드 슈워제네거 주연의 '나는 전설이다', 안노 히데아키가 뚝심을 가지고 완결을 제대로 낸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시즌 2같이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은 나만을 위한 작품들을 마음껏 찍어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 상상이 이제 천국이 아니라 근 미래에 우리의 현실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도 현재 AI의 발전 양상을 보면 무리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 그 기술이 현실화될 무렵에는 그건 천국이 아니라 크리에이터들에게는 지옥이 되겠지만 말이다.

다행히(?) 환불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고 하는 애플 비전 프로

그런 세상이 오지는 않아야 하겠지만 만약에 온다고 가정하면 그때까지 우리의 소양과 취향을 잘 다듬고 길러놓아야 하지 않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본다. 눈앞에 마법의 기계가 떡 하니 놓여있는데 거기에 대고 "어, 적당히 요즘 유행하는 거 좀 틀어주세요."라고 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비록 안 좋은 얘기로 결론을 낸 감이 없잖아 있지만 내 취향을 가장 저격하는 작품들이 이런 사이버펑크 풍의 컨텐츠들이다. 영화, 애니메이션, 음악부터 패션까지 앞서 잠시 언급했던 '나의 40대가 와도 죽지 않는 중2병'을 제대로 자극하는 데에 사이버펑크만 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색깔에 있어서 끝장을 보여주는 앨범이 바로 The Prodigy의 'Fat of the Land'라고 생각한다. 록밴드의 작법과 에너지를 일렉트로닉 음악에 녹여낸 이 앨범은 'Smack My Bitch Up', 'Firestarter', 'Funky Shit', 'Serial Thrilla' 같은 곡들 하나하나도 좋지만 라이브 공연에서의 화끈한 무대매너와 뮤직비디오, 보는 이를 벙찌게 만드는 독특한 앨범 커버까지 모든 요소가 음반을 빛나게 만든다. 97년에 출시한 음반이니 발매로부터 거의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 들어도 전혀 낡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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