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st Action Hero OST
어릴 적에는 친구가 많이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름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어울리는 무리도 있었기에 딱히 인간관계에 크게 문제가 있던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자주 함께 노는 동네 친구 같은 것이 나에겐 없었다. 살던 곳 근처에 놀이터 같은 곳이 별로 없기도 했고, 애초에 나가서 뛰어놀거나 피구 같은 것을 하기보다는 집에서 TV나 비디오를 보거나 책을 읽는 것이 더 좋았던 철저한 인도어파였던 것도 큰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렸을 적 나의 친구는 옆집 민수가 아니라 우주보안관 장고와 고스트버스터즈, 닌자거북이였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됐을 무렵 나의 영웅은 아놀드 슈워제네거, 실베스터 스탤론과 브루스 윌리스였다.
1993년 개봉한 영화 '라스트 액션 히어로(마지막 액션 히어로)'의 주인공 대니는 잭 슬레이터라는 형사를 주인공으로 한 액션 시리즈 영화에 빠져있는 소년이다. 불우한 가정환경, 겉도는 듯한 학교 생활에 지친 탓에 그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가공인물과 픽션에 탐닉한, 지금의 기준으로 보자면 오타쿠와 히키코모리 사이쯤 어딘가에 위치한 캐릭터라고 볼 수 있겠다. 우연히 받은 마법 티켓을 통해 실제로 픽션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 주인공은 본인이 동경하던 액션 히어로인 잭 슬레이터와 함께 영화의 세계에서 짜릿한 모험을 즐기기도 하고, 이로 인해 뒤틀려버린 현실로 돌아와 둘이 같이 이를 해결하기도 한다.
당시에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이 영화를 거의 10번 정도 돌려봤던 것 같은데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주인공에게 어떤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가정환경이 불우했던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어머니가 일하시던 약국에서, 또는 집에서 혼자 만화나 영화 비디오를 돌려 보면서 거기에 몰입하던 나와 주인공 대니의 모습이 겹쳐 보였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 중 하나인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액션 히어로인 잭 슬레이터 역할을 맡았으니 이 영화는 거의 나를 위해서 누군가가 특별히 커스텀 제작한 작품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라스트 액션 히어로'의 사운드트랙은 영화 속 액션만큼 화끈한 메탈 밴드들과 뮤지션들의 음악으로 실속 있게 채워져 있는데, 이 중 특히나 AC/DC의 'Big Gun', Megadeth의 'Angry Again', Queensryche의 'Real World', Michael Kamen과 Buckethead의 콜라보레이션인 'Jack and the Ripper' 등의 트랙을 강하게 추천하고 싶다. 그 외에도 Anthrax, Alice in Chains, Def Leppard와 Aerosmith 등 쟁쟁한 밴드들의 음악이 귀를 즐겁게 해주는 데다가 상당수의 곡들은 이 앨범에서만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액션과 메탈의 팬이라면 필청 음반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대니는 현실 세계에, 잭은 픽션의 세계에 머물러야 하기에 둘은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기 위한 작별을 하게 된다. 볼 때마다 이 장면이 굉장히 뭉클하고 슬펐는데 어렸을 때 느꼈던 슬픔의 원인과 지금 느끼는 안타까움의 이유는 조금 다르다. 어렸을 적에 볼 때에는 그냥 단순히 주인공 둘이 작별하고 다시는 함께 만나서 모험을 즐길 수 없다는 사실이 슬펐는데, 지금은 나중에 주인공이 어른이 되어 현실에 찌들어가며 자신이 사랑했던 픽션 속 캐릭터를 잊게 되거나 하찮게 여기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씁쓸한 마음이 든다.
모 연예인이 초등학교 때 자신의 팬이었던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면 자기의 가장 큰 안티로 돌변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저학년 때에는 파워레인저에 탐닉하던 친구들이 고학년이 되면 그것을 유치하다고 폄하하고, 포켓몬을 즐기던 초등학생이 중학생이 되면 피카츄를 분쇄해 버리는 플래시 영상을 보며 키득거린다. 고등학교, 대학교 때 함께 락밴드에 빠지고 동아리 활동도 하던 친구들의 8할 이상은 이제 멜론 차트 Top100만 돌려 듣고 있다. 픽사의 애니메이션 'Coco'에서 사람은 잊혀질 때에 진정한 죽음을 맞이한다고 했는데 우리가 사랑했던 픽션 속 주인공이나 컨텐츠가 사람이라면 우린 이미 대량학살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어릴 때 좋아했던 영화나 음악, 이전에 즐겼던 게임들을 이따금 다시 보고 듣고 할 때 당연히 처음 접했을 때만큼의 즐거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도 가끔 추억으로 돌아가는 이유는 내 안에서 이것들이 잊혀지고 죽어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다마고찌도 아니고 굳이 예전 게임을 켜서 나와 함께 모험을 하던 피카츄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할 필요는 없지만 내가 즐기고 좋아했던 세계의 시간이 무한으로 멈춰 있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생각이 날 때 이따금 이전 게임을 켜보기도 하고 관동지역 체육관도 괜히 한 번 더 돌아본다. 누군가는 이것을 쓸데없는 시간 낭비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심하게는 어떤 강박이 아닌가 여길 수도 있지만 나는 내 나름 이것을 추억과의 의리라고 여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