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igma와 George Winston
어린 시절 영화와 음악에 심취했던 나는 크게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작품의 감상을 즐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폭력적인 액션 영화와 굉음의 헤비메탈을 즐기는 아들에 대한 걱정이었던지 아버지는 당시에 나에게 읽어보라며 책을 하나 건네주셨는데 그 책의 제목이 '사탄은 마침내 대중문화를 선택하였습니다'였다. 반감이 들긴 했지만 어쨌든 나도 신앙심이 있는 사람이고 이 책의 내용에 반박할 수 있어야 역으로 당당하게 문화 컨텐츠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꽤나 집중하고 그 책을 읽었다. 예상은 했지만 책의 내용은 당시의 어린 내가 읽기에도 한숨이 나올 정도로 대중문화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로 가득했고, 반기독교적이거나 폭력을 조장하는 류의 소수 메탈 밴드와 가수 스티비 원더를 동일선상에 놓을 정도로 이미 'TV 및 매체에서 대놓고 주를 찬양하지 않는 이상 모두 사탄이다'라는 기조에 작가는 사로잡혀 있는 듯했다.
책에서 가장 큰 악의 축으로 꼽은 세 가지는 내 기억에 뉴에이지, 헤비메탈, 그리고 스필버그였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그냥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한 영화감독이 외계인이나 귀신이 등장하는 영화를 만든다는 이유로 비판 아닌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것 같고, 헤비메탈은 그냥 사탄의 찬송가로 규정지어졌다. 가장 의외였던 부분은 뉴에이지에 대한 저자의 적대감이었는데, 당시 대중의 인식은 그냥 뉴에이지라 하면 듣기 편하고 좋은 평화로운 연주곡 정도의 느낌이었기에 왜 이 정도로 비난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뉴에이지 운동 자체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자체에 일종의 종교 대통합과 유사과학 신봉을 추종하는 기조가 있었으니 어느 정도 이해는 가지만, 애초에 잔잔한 연주곡을 만드는 모든 뮤지션들이 이러한 사상을 추구한다고 볼 수 없었기에 과한 일반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책을 읽을 당시 나는 기껏해야 중3 정도였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의혹이 들었던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진정 이 시대의 문화는 모두 악에 물들어 있는 것일까? 스필버그는 진짜 프리메이슨 운동의 꼭두각시인 것인가?' 같은 잡념들이 나를 지배하며 마음을 착잡하게 했다. 책에서 뉴에이지 뮤지션 중 가장 악질로 꼽은 아티스트가 둘인데 하나가 Enigma였고 다른 한 명은 George Winston이었다. 이니그마는 사탄주의적 정서를 음악에 녹여낸 죄질이 나쁜 악의 전도사 정도로 묘사되었던 것 같고, 조지 윈스턴은 듣기 좋은 평화로운 선율 속에 본인의 히피 정신을 담아 듣는 이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악마의 달콤한 속삭임과도 같은 음악을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는데 당시에 두 뮤지션 모두 TV에서 하던 컴필레이션 음반 광고에서 본 정도가 다이기에 그냥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어느 날 이모의 집에 방문했다가 CD 컬렉션을 훑어보던 나는 큰 당혹감을 맛보게 되었는데, 바로 위에 언급된 두 아티스트의 앨범이 모두 꽂혀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Enigma의 MCMXC a.D., 그리고 George Winston의 December 두 음반을 본 나는 속으로 잠시나마 혼란에 빠졌다. '이모와 이모부는 사실 악의 유혹에 빠져있는 것인가? 그러고 보니 둘 다 교회에 잘 가지 않는 것 같았는데...' 등의 생각을 했지만 한 편으로는 이 '악마의 음반들'을 듣고 싶다는 강렬한 유혹에 빠졌다. 그래서 조용히 CD 두 장을 집어서 잠시 빌려가겠다고 얘기했더니 이모는 "응. 그거 그냥 가져가도 돼."라고 흔쾌히 나에게 주었다.
묘하게 떨리는 손으로 집에 돌아와 Enigma의 MCMXC a.D.부터 재생하였다. 달콤하게 주문과 같은 말을 속삭이는 고혹적인 여성 나레이터의 목소리로 시작해서 절묘하게 치고 들어오는 일렉트로닉 사운드, 거기에 얹어지는 그레고리안 성가의 신비로운 분위기로 '아, 이것이 악마의 음악이구나. 기묘하군.'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약간의 죄책감과 함께 마지막까지 재생을 마치고 CD를 꺼냈다. 전체적으로 꽤 괜찮았고 특히 'Sadeness'와 'Mea Culpa'라는 트랙이 좋았는데 다 들었는데도 특별히 신앙심이 옅어지거나 밖에 나가서 죄를 저지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기에 바로 연이어서 George Winston의 December 재생을 시작했다.
여러 드라마나 CF에서 이미 들어서 귀에 익숙한 음악인 'Thanksgiving'을 들으며 '아, 역시 사탄은 대중문화에 폭넓게 침투했다더니 조지 윈스턴 역시 이미...'라는 생각을 했는데 두 번째 트랙을 들으면서부터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2번 트랙 이름이 'Jesus, Jesus, Rest Your Head'인데 왜 사탄의 음반에 예수라는 말이 들어가는 것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기독교에 대한 인스트루멘탈 디스 트랙인 것이었던 걸까. 이것이 뉴에이지 버전의 'God Save the Queen'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이후 세 번째 트랙인 'Joy'는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5번 트랙 'Carol of the Bells'는 영화 '나 홀로 집에'에서 들은 그대로에서 크게 편곡적으로 바뀐 부분은 없는 느낌이었다. 9번 트랙은 캐논 변주곡이었는데 듣기 좋을 뿐 뭔가 크게 장난을 친 느낌은 없었고, 앨범을 다 들은 이후에 든 생각은 '그냥 듣기 좋을 뿐이다' 정도의 좋은 감상이었다.
이런 감상은 지금 와서 보면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게 Enigma는 자신이 꿈에서 들은 환청과 비전으로 MCMXC a.D.를 만들었다고 주장은 하지만 악몽에서 본 비전을 작품으로 승화시킨 사례는 사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터미네이터'나 H.R. Giger의 작품들도 마찬가지이기에 그 자체만으로 대단할 게 없는 것이고, 사실 그 주장도 당시에 자신의 음악에 대한 신비주의를 높이려는 일종의 마케팅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음반에 나오는 그레고리안 성가 자체가 로마 카톨릭에서 나온 것으로 크게 변형을 가한 것도 아니기에 듣기에만 묘한 음산함이 있을 뿐이지 다른 암묵적인 메시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얼마 전 사망한 조지 윈스턴의 경우는 오히려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고, 조금이라도 본인을 뉴에이지와 엮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불쾌해하는 아티스트이기에 저자가 이야기한 히피 출신의 사탄주의자라는 주장은 근거 없는 매도에 다름없을 뿐이다. 그냥 충분한 사전 자료 조사 없이 싸질러낸 글에 애꿎은 아티스트들만 국내 기독교인들에게 (큰 영향은 없었지만) 포화를 맞은 것이다.
당연히 이 두 앨범은 내 청소년기에 나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음반 컬렉션 중 하나로 당당히 자리매김했고(사실 원래 이모의 소유이긴 했지만), 이후에 단 한 번도 이 앨범들을 들으며 찝찝하거나 불쾌했던 적은 없다. 문제의 책은 한 동안 나의 책꽂이에 꽂혀있다가 몇 차례 이사를 하게 되는 사이에 나머지 쓰레기들과 함께 걸려서 버려졌을 것이다. 문화로 사람들을 갈라치기하고, 특정 컨텐츠를 규제하는 이들은 언제나 타인을 억압하고 조종하는 강자들이었고, 적어도 사랑을 전파하는 종교라면 그러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 어떤 내용물을 즐길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그것을 누리는 이들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며칠 전 하늘나라로 가신 조지 윈스턴 옹을 기리며 간만에 'December'를 재생하며 하루를 마무리지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