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에 부르짖는 소소한 아날로그식 외침
모바일 스트리밍이 대중화된 지금에는 감이 잘 오지 않을 수 있지만 불과 15~20년 전만 해도 어떤 음악이 궁금하다고 해서 바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돈과 시간을 어느 정도 투자해도 물리적으로 여건이 되지 않는다면 일반적인 경로로는 들을 수 없는 음악이 수두룩했다. 여유가 많은 음악 매니아라면 수입 레코드, CD를 일반적인 경로에 비해 몇 배가 되는 돈과 시간을 들여 구할 수 있었을지 모르나 당시에 학생이었던 나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도 소리바다나 멜론, 벅스뮤직 같은 게 있지 않았나 하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지금에 비해 해당 플랫폼의 데이터베이스가 엄청나게 협소했기에 대중적으로 이미 인기 있는 노래가 아니라면 검색조차 되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원하는 음악을 검색해서 듣기조차 힘든 시대에 어떤 음악이 나의 취향에 맞을지, 아니 애초에 나의 취향이 어떻게 정립이 될지는 그러면 당시에 어떻게 정해진 것일까? 우연히 길 가다가 들은 좋은 음악이 있다고 해도 지금처럼 실시간 검색으로 내가 들은 음악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주변 입소문만으로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소위 음악 좀 듣고 살아왔다는 사람들도 각각의 경우 차이가 있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음악을 글로 먼저 접한 경우가 많다.
90~0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그들 중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읽으며 재즈라는 장르를 접하고 동경을 품은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락/메탈 매니아라면 어릴 때 핫뮤직이라는 잡지를 통해 많은 밴드와 음악을 추천받았을 것이다. 나는 하루키도 읽지 않았고, 핫뮤직의 구독자도 아니었지만, 중고등학생 무렵에 우연히 부모님이 사 오신 '이럴 땐 이런 음악'이라는 책을 통해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간접적으로 체험함을 통해 음악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된 것 같다.
'이럴 땐 이런 음악'은 1999년과 2000년에 출간한 음악 매니아 이헌석의 책이다. '아침 새로운 의욕을 위해', '나른한 오후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을 때',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음악' 등의 챕터로 나누어져 있고, 각 경우에 적합한 음악을 작가의 취향대로 몇 곡씩 추천하고 거기에 맞춰 각 곡별로 짤막한 소개글과 감상이 곁들여져 있는 식이다. 추천곡들 중에는 클래식부터 재즈, 제이팝에서 아트록, 헤비메탈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크게 구분 없이 나열되어 있었다.
작가가 당시의 기준으로는 상당한 컬렉터였기에 당연히 거기에 추천되어 있는 음악 중에 과반수는 당시 내 여건으로 들을 수 없는 곡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렇기에 글로 쓰여진 작가의 표현으로만 나는 그 음악들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그려봤던 것 같다. '술이 덜 깬 아침에 듣는 음악'이라는 챕터를 읽으면서 '과연 어른이 돼서 술이 덜 깬 채로 이런 음악을 듣는다면 멋지지 않을까' 하며 스스로의 모습을 그려보았고(실제로는 술이 덜 깨면 두통을 이겨내기 바쁘기에 음악 찾아들을 여유는 별로 없더라), '머리가 좋아지는 음악' 섹션에 있는 아트록 음반 커버를 보면서 '공부할 때는 클래식이나 인스트루멘탈 듣는 게 일반적인데 머리가 좋아지는 락이라니 대단한데?'라고 생각했다.
스트리밍과 다운로드 여건이 갖추어지고 나도 음반을 정식으로 돈 내고 구매할 여유가 생기면서 정작 실제로 그 책에 나왔던 음악을 듣고 나니 '아 작가와 나의 음악적 취향은 애초에 매우 달랐구나(애초에 나와 세대가 다른 사람이니 취향이 맞기 쉽지 않았다)'라는 감상이 주였고, 내 머릿속에서 상상한 음악이 훨씬 더 (나에게는) 좋았더라라는 생각이지만, 적어도 장르를 가리지 않고 좋은 음악을 많이 듣고 싶다는 하나의 신조는 당시에 그 책이 나에게 확실하게 심어준 것 같다. 많은 음악을 실제로 접하지는 못하지만 글을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혼자 그려보고 상상하던 것이 지금에 와서 스스로 음악을 만들고 표현하는 것에도 도움이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양한 음악을 바로 접할 수 있고 알아서 스트리밍 서비스와 유튜브 등에서 나의 알고리즘에 맞추어 노력하지 않아도 내 취향의 노래를 귀에 꽂아주는 지금이 확실히 더 편하지만 그렇기에 스스로 무언가를 찾아보고 뒤져보는 재미는 확실히 줄어들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나의 음악적 취향이나 소견은 십 년 전에 비해 더 발전하고 넓어졌는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든다. 어릴 때 함께 밴드 동아리를 하던 친구들에게 요즘 뭐 듣냐고 물어보면 그냥 음원 차트 순위 1~100에 있는 거 랜덤으로 재생한다고 하는 걸 들으면 서글픈 생각마저 든다. 오히려 이전에 비해 메인스트림이 아닌 아티스트나 밴드/그룹은 더 묻히게 되고, 매스 미디어의 추천에 더 의존하는 경향이 생기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생긴다.
그렇기에 나는 요즘도 굳이 일부러 Metal Hammer나 Q 매거진을 이따금씩 e-book으로라도 구매해서 읽고 굳이 취향이 아닌 음악, 이전에 취향에 맞지 않았지만 고전 명반으로 꼽히는 음반들도 찾아서 들어보는 편이다. 억지로 스스로 불편함을 만들어내고 고전 미디어로 회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음악으로 인해 감동을 받고 싶다면 개인이 음악을 소비하는 방식도 과도하게 자동화와 기계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혹시라도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다시금 지금까지의 매너리즘에서 조금은 벗어나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스스로의 취향, 자신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