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 오브 뱀파이어 OST
몇 년 전부터 시작된 현상이지만 90년대 후반에 태동한 트렌드, 흔히 세기말로 칭하던 시기의 문화와 경향이 어느새 우리 문화의 유행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90년대 말 유행했던 힙합 패션을 연상하게 하는 오버핏 트렌드를 지나 이제는 Balenciaga 등의 브랜드들은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 등장한 가죽 코트와 선글라스 룩에서 한 발짝 더 나간 듯한 의상을 패션쇼에서 선보이고 있으며, 호러 영화 '스크림' 시리즈는 이제 6편에 이르렀음에도 건재하고, '매트릭스'의 영웅 키아누 리브스의 새로운 프랜차이즈인 '존 윅' 시리즈의 클라이맥스인 4편이 극장가를 휩쓸고 좋은 평가를 얻고 있다.
음악 쪽에서도 팝이나 케이팝 분야에서는 당시에 히트했던 몇 가지 요소들을 끌어와서 적극적으로 요즘의 음악에 녹여내려는 시도가 보이고, 힙합 쪽에서는 멈블링 랩이나 트랩 비트를 슬슬 버리고 있는 추세이며, 심지어 해외 메탈 쪽에서는 뉴메탈을 다시 부활시키려는 듯한 움직임까지 느껴지는 것이 근래의 트렌드이다. 물론 패션이나 영화, 음악 모두 당시의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는 않고 요즘의 발전된 요소들과 적당히 믹스하고 있으니 이것을 퇴보나 회귀라고 비난할 필요까진 없을 듯하나, '그래도 그때가 좋았지'라는 현시대에 대한 불만족감이 이러한 트렌드의 핵심에 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정서적으로 가장 예민했던 청소년기에 이런 문화를 온몸으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물로 2023년에도 뉴메탈 음악 쪽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사실 이러한 흐름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경향에 약간의 경계심과 걱정 역시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 문화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의 영광에 매혹되었기에 당연히 그것을 향유하였지만 한계에 이르고 몰락했을 때의 초라함도 기억하기 때문이다. 물론 현시대에는 예전보다 다양성이 존중되고 이전에 비해 모두 업그레이드된 부분이 있기에 더 건강하고 단단하게 유지될 수도 있지만, 진정성과 오리지널리티가 없이 당시의 카피와 흉내에 그친다면 매우 빨리 무너질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건재하던 세기말 시기의 문화는 왜 급속히 무너졌는가?"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2000년대 초중반의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으면 알 수 있으리라고 답해줄 수 있겠다. 사실 90년대 후반에 시작되고 짧은 절정을 맛본 그 문화의 태동은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중반까지의 영화, 음악, 애니메이션의 요소를 집대성함으로써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공각기동대'와 '아키라', 여러 가지 사이버 펑크적인 요소들과 철학을 SF 영화라는 틀 속에 집결하여 폭발시킨 것이 영화 '매트릭스'였고, 그 영화의 OST에 수록됨으로 유명세를 새로이 얻고 이후 당시의 MTV를 휩쓴 밴드나 일렉트로닉 아티스트들 역시 이미 90년대 초중반에 활동을 시작한 이들이다. 게다가 그들 역시 80년대, 90년대의 여러 음악적 요소를 섞어 자신들만의 개성을 지닌 새로운 목소리를 냈을 뿐, 아예 제로 베이스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이들은 아니었다.
즉, 세기말의 문화 트렌드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여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이전 세대의 문화에서 좋았던 부분들을 짜집기한 하이브리드 컬처였다. 이러한 문화적 결과물들의 특징은 그 조합이 좋은 시너지를 내면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굉장한 것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을 영혼 없이 그대로 카피하면 쓸모없는 빈 껍데기가 될 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 자체로서는 긴 생명력을 갖기 힘들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의 추억 보정을 지우고 지금 '미녀 삼총사'나 '트리플 엑스', '언더월드'나 '더 원' 같은 영화들을 다시 봐보자. 물론 이 영화들에도 재미있는 부분이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고, 메인스트림 영화에서 신나는 락과 일렉트로닉 음악을 듣는 것은 여전히 신나는 일이지만 객관적인 짜임새는 솔직히 조악하고 끔찍하다. 영혼 없는 스토리에 슬로우 모션과 어설픈 CG를 떡칠한 액션, 중2병 걸린 듯 계속 진지하고 심각하기만 하거나 조증에 걸린 것처럼 시종일관 업된 무드로 폼만 잡고 있는 매력 없는 캐릭터들, '와 이게 끝이라고?' 싶은 생각이 드는 허무하기 짝이 없는 억지 반전과 급조된 해피엔딩을 보고 있자면 "역시 이런 문화는 사라져야 돼!!"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된다.
이러한 2000년대 초반 메인스트림 팝콘 플릭(이 당시에도 나름 '메멘토'나 '이터널 선샤인', '킬 빌' 등 좋은 영화도 꽤 있었다)이 형편없었던 이유는 이 영화들이 '매트릭스'의 외형적 요소만 갖다가 베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매트릭스'를 만든 워쇼스키들은 실제로 90년대 초중반의 애니메이션이나 다른 문화적 요소의 영향을 받았고 이에 대한 진심 어린 애정이 있었던 이들이다. 90년대 후반의 음악적 트렌드를 이끈 밴드 및 뮤지션들 역시 이전 세대의 음악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좋아했던 이들이 그것들을 연구하고 거기에 자신의 개성을 섞어 자기들만의 무언가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히트하자 영화 제작자들은 화면빨만 잘 찍어내는 신인 감독들(주로 뮤직비디오나 광고 쪽에 종사했던 이들이었다)을 기용해서 뭔가 멋있어 보이게만 뽑아내는 것에 치중했고, 음악 쪽에서도 기획사들은 모든 뮤지션들한테 "야, 림프 비즈킷처럼 랩해봐." "린킨 파크 걔네 요즘 뜨던데 일단 이 부분에 무조건 랩 넣자."라는 투로 강요를 해서 공장에서 짝퉁을 찍어내듯이 반쪽짜리 음악을 쏟아내게 되었다.
'퀸 오브 뱀파이어'라는 영화를 기억하는가? 지금은 당시 문화의 흑역사 중 하나로 묻혔지만 나름 제작할 때는 꽤나 시선을 모았던 작품이다. 당시에 이 영화가 화제가 되었던 것은 첫 번째로 일단 원작자가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라는 명작 영화의 원작 소설을 쓴 앤 라이스였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당시의 라이징 스타였던 R&B 가수 알리야가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기 전 촬영한 그녀의 마지막 유작이었기 때문, 그리고 마지막으로 뉴메탈의 선봉장이었던 밴드 Korn의 조나단 데이비스가 록 가수로 변신한 뱀파이어 레스타트의 곡들을 전담해서 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영화가 망작이었기에 이 모든 것들이 다 역사의 뒤편으로 묻히고 말았다.
망작이 된 이유는 일단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 레스타트의 캐릭터성 자체가 선역과 악역을 미묘하게 오가는 매력적이고 입체적인 느낌이어야 하는데, 영화에서는 그냥 '쟤 왜 저래?' 싶게 보였던 것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관객이 몰입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냥 중2병 걸린 어린이가 "나 외로우니까 락가수 할거얌!!"이라고 했다가 절대 깨워서는 안 되는 뱀파이어의 여왕도 심심해서 깨웠다가 또 혼자 막판에 급격히 개심해서 다른 선역들도 도왔다가 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보이는 듯한 막장 주인공이 되었기 때문에 관객들의 호감도가 떨어졌고, 레스타트 못지않게 여주인공 역시 "난 뱀파이어가 될 거야!!"라고 호기롭게 갔다가 막상 진짜 뱀파이어들을 마주하니 줄행랑이나 치기 바쁘고, 알리야가 맡은 뱀파이어의 여왕 아카샤는 중후반부에 그냥 나와서 휘적휘적 북북춤 좀 추다가 죽어버리고, 다른 선역들 역시 '얘네 뭐 하는 거지...' 싶은 행보를 보였으니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관객들이 당시 정서로서도 전혀 공감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중간중간 보이는 조악한 CG와 어설픈 와이어 액션 등은 2000년대 초중반 기준으로도 실소를 유발한다.
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의 많은 망작들이 그랬듯('스폰'이나 '엔드 오브 데이즈', '드라큐라 2000' 등), '퀸 오브 뱀파이어' 역시 "영화는 구렸지만 OST 음악만은 좋았다."라는 표현에 걸맞은 듯하다. Korn의 보컬 조나단 데이비스가 작곡 및 곡 큐레이션을 맡았기에 뉴메탈 팬이라면 전체적으로 들을 가치가 있는 앨범이다. 그가 작곡한 자작곡들은 이 앨범에서만 들을 수 있는 데다가 Disturbed의 David Draiman이나 린킨 파크의 Chester Bennington과 마릴린 맨슨 등이 자신들의 개성을 섞어 불렀기에 나름 희소성과 가치가 있는 트랙들이고, 수록된 다른 기존곡들 역시 각 아티스트들의 앨범에서도 들을 수는 있지만 Deftones의 'Change', Static-X의 'Cold' 등 당시의 메가히트 곡들과 제2의 마릴린 맨슨이 되고 싶었던 밴드 Godhead, 제2의 린킨파크를 노렸던 Dry Cell 등 뜰 뻔했던 뉴메탈 신진세력의 곡들도 들을 수 있으니 장르 팬이라면 반가울 앨범이다.
어쨌든 추억의 향수를 되살리는 듯한 현재의 트렌드가 반가운 면도 있지만 또다시 처참하게 무너지지는 않을는지 우려도 되기에, 지금의 트렌드를 이끄는 크리에이터들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무엇보다 유행은 순서대로 돌고 돌기 마련인데 이 이후에는 2000년대 중반의 원색 꽃무늬 패션과 샤기컷, 혈액순환이 끊길 것 같은 스키니진과 듣기만 해도 우울해지는 emo 락과 소몰이 발라드가 기다리고 있기에 그것들의 재림은 방파제를 쌓아서라도 막고 싶을 뿐이다. 제발 지금대로 오래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