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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핵보컬 Sep 21. 2023

2000년대의 멋쟁이 음악, 재즈힙합

Sound Providers - An Evening with the...

"힙합이 뭔가요?" "재즈를 뭐라고 생각하세요?" 한 때 인터넷에서 밈화까지 되었던 문장들, 단순히 어떤 음악장르에 대한 질문일 뿐인데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단순히 웃기다는 리액션부터 진지하게 장르에 대한 담론으로까지 빠지는 이들까지 다양하다. 그만큼 두 장르는 항상 정통성 및 질적 평가에 대한 격한 논쟁과 범주의 모호함 등으로 처음 접하는 청취자에게는 혼란을 가져올 때도 있는데, 이 두 가지를 합친 서브장르가 2000년대에 소위 음악 좀 듣는다는 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기도 했으니, 그것이 바로 '재즈힙합'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 때 Nujabes나 Guru, Common 같은 뮤지션들이 한쪽에서는 디제잉 및 인스트루멘탈 분야에서, 다른 한 편에서는 사색적인 래퍼로서 힙합에 재즈적인 요소를 도입해서 새로운 매니아층을 유입하여 음악 매니아층 사이에 유행을 불러온 적이 있었다. 좀 더 깊이 파고드는 이들은 Madlib과 A Tribe Called Quest를 이 장르의 근본으로 치켜세웠고, 국내에서도 Loptimist나 E-SENS 같은 뮤지션들이 이런 요소를 도입한 적도 있었다.

재즈힙합의 조상님 앨범

지금은 사라졌지만 예전에 홍대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나가면 있는 거리에 퍼플레코드라는 음반점이 있었다. 나의 중학교 친구이자 현재 우리 밴드의 키보디스트이기도 한 이정헌 군의 마수(?)에 이끌려 그곳을 방문한 나는 그 가게를 지배하고 있는 힙스터와 스노비즘의 기운에 강렬히 경도되었고, 뭔가에 중독된 것처럼 일주일에 두세 번은 그 가게를 방문해야 하고 적어도 1~2주에 한 번은 거기에서 뭔가를 구매해야만 하는 병에 걸린 적이 있다.


인스트루멘틀 힙합, 일렉트로닉, 인디 록부터 어쿠스틱 포크음악까지 다양한 장르의 생전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뮤지션들의 음반이 진열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당연히 애플뮤직이나 스트리밍 서비스가 보편화되지 않은 시기였기에 미리 들어보고 마음에 드는 앨범을 구매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운이 좋다면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어? 이거 마음에 드는데 어떤 음반이죠?"하고 점원이 그걸 찾아서 꺼내주어서 마음에 드는 앨범을 집에 가져가는 것도 가능했겠으나, 십중팔구 나의 초이스는 그냥 앨범 아트가 마음에 들면 사는 것이었다.

2000년대 힙스터들의 성지

당연히 그렇게 구매한 앨범 중에는 꽤나 들을만한 앨범도 있었고, 처음에는 좀 그냥 그랬으나 듣다 보니 최소한 돈값은 하는 듯한 음반도 있었으나, '이런 걸 용케도 나에게 팔았겠다?' 싶은 괘씸한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에 안 드는 것들도 있었다. 그런 복불복 가챠에 가까운 음반 구매에 슬슬 피로도가 느껴질 무렵에 어느 날 퍼플 레코드 점원과의 대화가 나에게 근원적인 질문과 회의감을 가져다주었다.


"이 Blockead라는 뮤지션의 앨범은 장르가 뭔가요?"

"그건 보통 Abstract라고 합니다."

"Abstract가 뭔데요?"

"난해하고 추상적인 음악이요."(아니... 저도 영어 의미는 안다구요...)

"음... 그럼 어쨌든 이건 재즈힙합 쪽에 속하는 건가요?"

"아니요. Abstract라고 밖에는 설명드릴 말이 딱히 없네요."

"..."


'과연 내게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이 음악을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 아니, Abstract라는 음악 서브장르라는 게 존재는 하는 것인가? 굳이 이런 걸 듣고 알고 이해하고 좋다고 생각해야 음악 좀 듣는다고 인정받을 수가 있는 것일까? 아니, 애초에 그런 걸 인정해 주는 주체가 누구인데?'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된 날 이후, 나는 결국 그 음반점에 들르는 발걸음이 뜸해지게 되었다.

커버가 예뻐서 끌렸고, 대화가 피로해서 안 샀던 문제의 앨범

이런 피로도가 높은 상황에서, 앞서 말한 뮤지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굉장히 쉬운, 소위 말해 접근성이 좋은 재즈힙합 아티스트가 있었는데, 바로 1998년 결성한 힙합 프로듀서 듀오인 Sound Providers이다. 대놓고 색소폰이나 피아노, 플룻과 마림바의 사운드가 '이것은 재즈 사운드입니다, 여러분.'이라고 노골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면서도, 비트는 일정하게 정석적인 90년대~2000년대 힙합 그루브를 유지하면서, 잘 하긴 하지만 틀에서 크게 벗어나는 구석은 없는 안정적이고 무난한 랩이 한 데로 묶여 듣기 편하면서도 뭔가 있어 보이는 느낌을 내는 그런 음악이다.


2004년에 발매된 'An Evening with the Sound Providers'는 Nujabes의 앨범처럼 이들이 기본적인 인스트루멘틀을 만들고 그 위에 게스트 래퍼가 랩을 얹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Nujabes가 따스한 감성의 파도에 청취자의 몸을 던지는 느낌이라면 Sound Providers는 가상의 스팀펑크 연회에 초대되어 술 한 잔 하는 것 같은 상상을 펼치게 만드는 음악이다. 그렇기 때문에 20대 시절에 소위 접대용(?) 음악으로는 이만한 게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혼자 드라이브할 때, 술 한 잔 할 때 BGM으로도 실패가 없는 앨범이었다.

현 시대 재즈힙합의 양갈래

현재 재즈힙합은 여전히 Madlib, Blue & Exile과 같은 아티스트가 한 편에서는 매니아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독특한 음악을 선보이며 그 예술성을 지키고 있고, 다른 한 편에서는 LoFi라는 형태로 힙해 보이고 싶은 이들의 공부 및 작업용 BGM으로 그 대중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An Evening with the Sound Providers'를 처음 듣는 이들에게는 오히려 'For Old Times Sake', 'It's Gonna Bee (Alright)', 'The Throwback' 같이 랩이 들어가 있는 트랙들보다 예전엔 다소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었던 'Night Steps', 'Autumns Evening Breeze'와 같은 인스트루멘틀 트랙이 LoFi 트렌드의 선구자처럼 느껴지며 그 가치를 발할지도 모른다.


2020년대에 다시 듣는 이 앨범은 추억 보정을 빼고 들었을 때 그 단점이나 한계가 보이기는 한다. 깊이가 부족하고 인스트루멘틀만 들었을 때 그 반복이 굉장히 심하다. 재즈의 사운드는 잘 재현하고 있지만, 어느 정도의 즉흥성이나 불협화음을 하나의 전개의 요소로 승화시키는 재즈의 정신은 전혀 들어있지 않은, 의외성이라고는 아예 찾을 구석이 없는 뻔한 음악이다. 그러나 아웃백의 오지치즈후라이나 샤이바나의 칠리와 맥앤치즈가 뻔하지만 안정적인 즐거움을 나에게 가져다주는 것처럼 'An Evening with the Sound Providers'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예측할 수 있는 흐름과 변치 않는 퀄리티로 다시 들어도 어느 정도의 가치를 유지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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