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렁큰 타이거 - 위대한 탄생
고등학교 시절 힙합을 좋아하던 친구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한 축에는 외국 힙합을 숭배하고 찬양하되 국내 힙합은 그 몇 수 아래로 보고 무시하던 이들이 있었고, 다른 축에는 한국의 랩퍼들이 본토의 아티스트들보다 뒤처지는 부분이 있을지는 몰라도 국내 힙합 뮤지션들도 충분히 훌륭하다고 치켜세우는 이들이 한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당시에는 힙합 유닛인 허니 패밀리가 어느 정도 유명세를 얻고 있었고, 2001 대한민국 같은 힙합 컴필레이션 앨범들이 발매되면서 어느 정도 '랩'이 아닌 '힙합'이라는 장르적 용어가 정착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랩이라는 것이 단순히 가요에 양념처럼 몇 소절 아무 말이나 라임만 맞춰서 주절거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랩 자체가 비트에 맞추어 하나의 시로서 유연하게 흘러가면서 음악의 주축이 되어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국내의 랩퍼들이 제대로 된 '힙합'을 보여주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노력을 기울이고 있던 시기라고 생각된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에 힙합 뮤지션들도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는 점이다. 한쪽에는 국내 자체의 방식대로 토속적인 느낌의 랩을 만들어가며 대한민국 힙합 특유의 개성을 살려보고자 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최대한 영어의 사용을 자제하고 가사의 내용이나 정서 면에서도 본토 힙합보다는 국내의 가요에 가까운 음악을 하는 것이 이들의 특징이었다. 반면에 본토 힙합에 최대한 가까운 음악을 하려는 이들도 꽤 있었는데 화려한 테크닉으로 영어와 한국어를 번갈아 사용하면서 랩의 가사 내용보다는 기교를 자랑하는 데에 좀 더 비중을 두었으며, 랩의 배경으로 쓰이는 비트와 샘플에도 좀 더 세련미를 중시하는 측면이 있었다.
1999년에 2인조로 데뷔한 드렁큰 타이거는 대한민국 힙합 뮤지션들 중 명백히 두 번째 부류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교포 출신답게 속사포 같이 빠른 영어 가사의 랩과 캐치한 한국어 후렴구를 동시에 구사하면서 당시에 국내 힙합을 무시하던 이들조차도 이들의 테크닉에는 쉽사리 태클을 걸지 못할 정도로 '이것이 본토의 힙합이다'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며 씬에서 단번에 주목받았다. 반면에 1집 앨범 자체가 실질적으로는 타이거 JK의 이전 데뷔앨범 곡 몇 개와 오리지널 곡 3 트랙을 영어 버전이나 리믹스 등으로 돌려써가며 실질적으로는 EP에 가까운 구성물을 풀 렝쓰 정규앨범으로 부풀린 구성이었기에 비판받을 만했고, '난 널 원해'가 Camp Lo의 'Black Connection'을 무단 샘플링했기에 오히려 이러한 점 때문에 이들을 더 안 좋게 보는 힙합 팬들도 꽤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의 2집인 '위대한 탄생'이야말로 이들의 제대로 된 첫 정규앨범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전 앨범에 비해 보다 확립된 팀으로서의 개성, 우려먹기와 재탕이 없는 순수 오리지널 트랙들로 이루어진 구성, 교포 랩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보이는 한국어 가사의 발전 등으로 단순히 랩의 테크닉만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음악적 가치가 있는 앨범이 나왔고 이전보다 분명하게 한 발짝 나아간 것으로 보이는 음반이다. '그의 끝에 시작', '위대한 탄생', 'The Movement', '난 널 원해 II' 등의 트랙들이 유독 돋보이며, 그냥 외국 힙합을 흉내 낸 것이 아니라 제대로 드렁큰 타이거만의 음악을 하기 시작한 앨범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며 그렇기에 애정을 갖고 있는 음반이기도 하다.
스윙스를 주축으로 화제가 되었던 디스전과 TV 프로그램 'Show Me the Money' 이후로 국내에서 힙합이 어느 정도 메인스트림 장르로 떠오른 지금에 와서는 한 때는 대한민국에서 '힙합'이라는 용어 자체가 생경했다는 점이 신기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내가 좋아했던 2인조 드렁큰 타이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이고, 심지어 2018년에는 타이거 JK가 드렁큰 타이거로서의 활동 종료까지 선언했기에 이제는 과거의 추억에만 존재하는 아티스트가 되었다. 지금은 자주 듣는 음반은 아니지만 이따금 소위 말하는 '근본'의 느낌이 그리울 때 들으면 여전히 촌스럽지 않고 우직하면서도 세련된 맛이 있다. "힙합이 뭐죠?"라는 질문에 빵 터지는 조소로 응답하는 패기 넘치는 인트로로 시작되는 이 앨범을 들을 때면 문득 지금보다 좀 더 제멋대로였던 예전의 내가 그리워지기도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