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코어 911 - 비정산조 & 피아 - 3rd Phase
거의 30년 전쯤인 1996년에 발표된 곡 '말달리자'는 좋은 노래였다. 이후에 1999년에 그 뒤를 이은 '서커스 매직 유랑단'도 국내 락 역사에 남을 만한 명반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당시 내 좁은 식견으로 보았을 때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 국내 인디 밴드 중 과반수 이상이 모두 소위 말하는 '조선펑크'를 하는 건 개인적으로는 좋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조금 더 헤비하게 들어가자면 삼청교육대 같은 밴드가 있었고 약간 더 감성적인 계열로는 델리스파이스와 언니네 이발관이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비슷한 계열에서 크라잉넛의 라이벌로는 노브레인, 레이지본 등이 각자의 존재감을 크게 어필하고 있었던 것이 당시의 인디 씬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따지면 다 다르고 다양한 느낌의 다채로운 라인업이긴 했으나 뭔가 Green Day나 Blink-182와 같은 팝적인 멜로디나 Korn이나 Limp Bizkit 같은 그루브가 돋보이는 팀은 왜 국내에 없는 것일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씬에 대해서 당시에도 더 깊이 파고들었다면 팝펑크나 뉴메탈 및 더 다채로운 장르를 하는 팀들도 눈에 띄었겠으나, 쉽게 인디밴드 공연장에 드나들 수 없었던 청소년 시기에 내가 보고 들을 수 있는 인디밴드는 kmtv, m.net에 나오거나 음반점에서 앨범을 살 수 있는 밴드에 한정되었기에 당시의 내 눈에 들어온 팀 중 8할 이상이 조선펑크나 비슷한 계열의 음악을 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하여튼 그러한 아쉬움을 학교에서 토로하던 중에 "그럼 이거 한 번 들어봐."하고 친구가 내 손에 쥐어준 음반이 닥터코어 911의 '비정산조'라는 앨범이었다. 별다른 기대 없이 재생을 시작했는데 첫 트랙인 'Hostile'부터 내 귀를 사로잡아버렸다. 당시에 다른 국내 팀에서는 쉽게 들을 수 없었던 공격적이면서도 정제된 리프 위에 깐죽거리는 듯한 톤의 랩핑과 흉포한 그로울링 창법을 번갈아 구사하는 두 명의 보컬의 카리스마에 뭔가 압도되는 느낌이 들었고, '아, 국내에도 내가 좋아하는 이런 류의 음악을 하는 훌륭한 팀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지금 다시 돌아보았을 때에 '비정산조'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무결한 세련된 앨범이라고 하는 데에는 조금 무리가 있긴 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꼭 단점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당시의 씬에서 유행하던 펑크나 하드코어에 가까운 리듬과 그루브가 중간중간 치고 나오는 것을 보면 일반적인 뉴메탈과는 조금 거리가 있긴 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고, 사운드도 당시의 환경을 감안했을 때는 충분히 훌륭하지만 지금 들으면 다소 날것의 느낌이 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이런 요소들이 또 이 앨범만의 개성을 부여해 주는 것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과도하게 서양의 음악을 흉내 내고 베끼기에 바쁜 음반보다는 이렇게 국내 밴드만의 색깔이 이따금 보이는 앨범이 더 훌륭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공격적인 느낌이 강한 'Max', '98', 나무 위 저 까치' 같은 트랙들 속에서 의외로 음반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트랙은 이들의 감수성이 돋보이는 '비가'라는 곡이다. 서양 메탈 씬에서도 사실 린킨 파크 전에는 어떤 식으로 뉴메탈을 발라드에 녹여낼 것인가에 대해 뚜렷한 해답이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뉴메탈과 가요의 감성을 적절하게 섞어 훌륭히 조합한 곡이라는 생각이 든다.
2000년에 닥터코어 911이 '날것의 매력'이 두드러지는 뉴메탈 음반을 만들어냈다면, 이보다 조금 늦은 시기인 2003년 발매된 밴드 피아의 '3rd Phase'는 세련된 한국형 뉴메탈 사운드의 완성과도 같은 앨범이라고 생각한다. 인디밴드 느낌이 전혀 나지 않는 고퀄리티의 사운드에 그로울링과 멜로디, 랩 모든 요소에서 뒤지는 면이 없는 다재다능한 보컬, 그것을 뒷받침하는 탄탄한 연주까지 서양의 메탈 씬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음반이라고 생각한다. 대학 시절 쌈지 사운드 페스티벌을 비롯한 국내의 락/메탈 행사에 가면 앨범의 1번 트랙 '소용돌이'의 인트로만 나와도 관객들이 난리가 났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사실 국내 메탈 씬에서 인트로만 들어도 관객 모두가 열광하는 Rock Anthem을 만들어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꽤나 대단한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소용돌이 외에도 감성적인 멜로디라인이 돋보이는 'Gloomy Sunday', 난폭한 그루브로 내달리는 'Pipe Boy', 한국형 림프 비즈킷 그루브의 완성과도 같이 느껴지는 'Kick Flip'과 'Triangle'까지 서양식 뉴메탈을 완벽하게 한국에 도입한 느낌이 드는 트랙들이 앨범을 알차게 채우고 있다. 밴드 피아는 이 이후 이모코어, 일렉트로닉 팝락 등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활발히 음악 활동을 하다가 15주년 기념 앨범 발매를 끝으로 해체하였다. 닥터코어 911 역시 해체와 재결성을 반복하다가 현재까지 이따금 재결합 소식이 들릴 때도 있지만 빠른 시일 내에 복귀할 조짐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지금 더 이상 이 팀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조금은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 뜬금없이 재결성이나 복귀를 선언하는 팀들이 국내나 해외에 심심치 않게 보이는 요즘이라 막연한 기대감이 들기도 한다. 내게 국내 락 앨범 중 가장 좋아하는 앨범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이 두 장을 뽑을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콘이나 림프비즈킷, 린킨파크만큼이나 내가 밴드 활동을 하는 데에 크게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