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심야괴담회, 그리고 키스 자렛

Keith Jarrett - My Song

by 핵보컬

어릴 때부터 친할머니와는 왠지 모를 거리감이 있었다. 실제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섬에 살고 계시기에 자주 뵙지 못한 것도 있고, 언젠가부터 항상 할머니를 대하는 것이 불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억 속 할머니는 항상 종잡을 수 없는 분이었다. 보통 때는 자식이나 손자들에게 늘 친절하셨고, 지혜로우셨지만 때로는 무표정하고 무뚝뚝하셨고, 이따금씩은 갑작스럽게 불같이 화를 내시기도 했다. 특히 화를 내실 때가 문제였는데 모두가 웃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을 때도 갑작스럽게 예전 일이나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트집을 잡으며 분노를 쏟아내었고, 대부분 그럴 때는 누군가가 거의 울면서 사죄하지 않는 이상 풀리지가 않았다. 매번 그런 것은 당연히 아니었고, 손자인 나에게 직접적으로 화를 내신 적은 거의 없었지만 이따금씩 그런 일이 있으니 어느 순간부터 나는 친할머니를 대하는 것이 무서웠다. 어릴 때의 감정이나 태도가 쉽게 변하지는 않는지라 성인이 된 후에도, 친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도 나는 항상 불편한 거리감을 느껴왔던 것 같다.


내가 즐겨보는 TV 프로그램이 몇 개 되지 않는데 그중 하나가 '심야괴담회'이다. 시청자가 보낸 사실인지 가짜인지 모를 초자연적인, 대부분은 공포스러운 경험이 얽힌 사연들을 출연진의 내레이션과 배우들의 재연으로 보여주는 예전 '토요미스테리'나 '이야기 속으로'가 생각나는 포맷의 호러 예능프로인데 청소년기 때부터 공포물을 좋아했던 나에게 소소한 재미를 주는 프로그램이기에 좋아한다. 이따금씩은 웬만한 호러영화보다도 기승전결이나 연출 퀄리티가 좋은 스토리도 있고, 그렇지 않아도 대부분 꽤나 재미있거나 가볍게 볼 수 있는 흥미로운 내용이라 공포물 팬으로서 반가운 프로라고 생각한다. 자주 시청하던 이 프로그램에 다른 스토리들에 비해 그다지 공포스럽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 인상에 깊게 남은 사연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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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할머니가 어느 날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찾아뵀을 때 기묘한 경험을 했다. 할머니 댁으로 가는 길목에서부터 인상이 음침한 어떤 여인이 주인공을 따라오기 시작했는데, 당연히 꺼림칙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 여인이 할머니댁 근처를 이유 없이 배회하기 시작했고, 마음씨 좋은 할머니는 그 여인을 집에 들여 정성껏 차려놓은 밥상을 대접했다. 그 여인은 고맙다는 인사 하나 없이 자리를 떴는데, 놀랍게도 주인공과 할머니가 잠에 든 새벽에도 몰래 집에 다시 들어와서 남은 음식까지 싹 먹어치우고는 또다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에 대해 분노한 주인공과는 다르게 할머니는 배가 많이 고팠나 보다며 사람 좋게 웃으시며 넘어갔다. 이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장에 도착한 주인공은 큰 충격을 받았는데, 영정 사진 속에 있는 젊은 시절의 할머니의 모습이 그 수수께끼의 여인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즉,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식사를 대접했던 상대는 고생하던 젊은 시절의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라는 내용이다.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황당하게도 이 내용을 보며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아니, 정확하게는 몇 년 만에 이 정도로 심하게 눈물이 터진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꽤나 오랜 시간 눈물을 멈출 수가 없을 정도였다. 주인공의 할머니와 젊은 시절의 모습이 마주앉아 식사하는 장면에서 쉴새없이 눈물이 흘렀다. 왠지 모르게 이 사연을 보니 돌아가신 친할머니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사실 꽤 오랫동안 자식들에게 숨기고 계셨지만, 오랜 시간 동안 할머니는 중년기 무렵부터 조금씩 찾아온 치매와 싸우고 계셨다는 것을 모두가 뒤늦게 알았다. 시골집의 책상에 놓여있던 일기에는 많은 것들을 잊지 않기 위해 많은 정보들이 빼곡히 기록되어 있었고, 집 여기저기에는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 분투하신 흔적들이 있었다고 한다. 사실과는 다르게 조금씩 왜곡되었던 기억들, 그로 인한 당황과 혼란과 분노 때문에 할머니는 이따금씩 그렇게 화를 내셨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 사실을 알게 되긴 했지만, 납득이 간다고 해서 어릴 때부터 쌓였던 불편한 감정이 바로 해소되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리고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할머니께서 내가 손자인지 누구인지도 헷갈려하실 무렵이었기에 다시 사이가 가까워지는 일은 안타깝게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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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할머니는 고생을 많이 하셨다. 본래 부잣집 딸로 태어나서 남부럽지 않게 살고 계셨으나 6.25 전쟁 중에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외딴섬 시골에서 선생님을 하며 함께 교사 일을 하시던 할아버지와 결혼하셨고 부부 사이 금슬도 좋았지만, 이제 좀 함께 쉬며 여행이나 다녀볼까 생각하시던 정년퇴임 시기 즈음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이후에도 서울보다는 본인이 원래 사시던 시골집이 편하다며 혼자 계시기를 고집하셨고, 서울에 올라오실 즈음에는 이미 병세가 많이 악화된 이후였는데, 본래 몸만은 건강하셨던 편이었기에 이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치매와 싸우다가 돌아가셨다. 항상 성실하고 지혜로우셨지만 고생이 많으셨던 할머니와 사연 속 주인공의 할머니가 겹쳐 보이면서 갑자기 슬픔, 아쉬움, 좀 더 가깝게 지내지 못했던 후회 같은 감정들이 복받치듯 밀려와서 그렇게 눈물이 났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시골집에 대한 따뜻한 기억, 어렴풋한 그리움이 있을 때에 듣는 앨범은 키스 자렛의 'My Song'이다. 첫 트랙 'Questar'부터 왠지 모르게 어릴 때 배 타고 들렀던 그 섬이 떠오르기도 하고, 워낙 유명한 명곡인 'My Song', 아예 제목부터 대놓고 시골을 전면에 드러내는 'Country'까지 따스한 정서가 느껴지는 트랙들이 앨범을 가득 채우고 있다. 독특한 퍼포먼스와 고집스러운 성격 탓에 다소 기인에 가까운 이미지가 있는 키스 자렛의 디스코그래피에서는 유달리 튈 정도로 포근한 느낌이 두드러지는 음반인데, 평소 그의 팬이라면 'Tabarka'나 'Mandala', 'The Journey Home' 같이 그의 화려한 연주 테크닉과 변박 활용이 전면에 치고 나오는 곡들도 있으니 아쉬울 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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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이제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시골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로 배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었던 그 섬, 가로등이나 포장도로 하나 없이 흙길을 달려야 했던 그 시골은 이제 차를 타고도 드나들 수 있을뿐더러 포장도로는 둘째치고 아예 공항철도를 타도 갈 수 있는 곳으로 개발되었다. 어릴 때에는 악몽에나 등장하던 어두운 시골집은 이제는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고,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조부모님을 이따금 추억하며 아쉬워하게 되었다. 20대 시절에는 수준 높은 음악을 듣는다는 허세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기 위해 키스 자렛을 들었지만 지금은 곁에 없는 가족을 떠올리기 위해 'My Song'을 듣는다. 음악을 만든 이는 키스 자렛이지만 그 제목이 'My Song'인 것처럼 앨범을 소유하고 그 곡을 들으며 관련된 정서와 추억이 쌓일 때 그것은 온전히 청자인 나의 것이 되어버린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음악은 철저히 개인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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