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eko Ohnuki - Sunshower
70, 80년대부터 90년대 초중반까지의 일본 문화 컨텐츠는 화려했다. 소위 버블 경제 시절이라고 불리던 그때 일본의 경제 수준은 미국까지 위협할 수준으로 발전했고, 이를 토대로 쌓인 엄청난 자본력은 게임, 애니메이션의 수준을 세계 제일의 레벨까지 끌어올렸고 그 완성품들은 쉽게 넘볼 수 없는 스케일을 자랑했다. 인력과 자본을 갈아 넣어서 만들어낸 AKIRA, 공각기동대 등의 애니메이션은 개봉 당시에는 크게 흥행하지 못했으나 시간을 초월한 걸작으로 역사에 남을 만한 작품이 되었고, 닌텐도는 아타리 쇼크로 인해 침체된 게임 시장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는 음악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한국 가요에도 좋은 음반들이 많았지만, 당시의 일본에서 발매된 앨범들은 사운드의 결 자체가 달랐다. 싸구려 신디사이저로 대충 찍어낸 연주가 아니라 수준급의 재즈 뮤지션들과 세션맨들이 실제로 연주한 뛰어난 인스트루멘탈 위에 대중 가수가 노래를 한 음반들이 리스너를 압도했고, 이는 손으로 일일이 그려낸 애니메이션이 요즘 나오기 힘든 것처럼, 미디 연주가 발전한 지금에 있어서는 효율 상에서 절대 다시 나올 수 없는 당시에만 가능했던 음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특이성은 이 시기의 J-Pop을 특별한 음악으로 재조명되게끔 했고, 현재는 이러한 류의 음악들이 하나로 묶여 '시티팝'이라고 불리며 뉴트로 열풍과 함께 특정 매니아층에게 강하게 다시 어필하고 있다.
이러한 화려함과 스케일에 있어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음반 중 하나가 바로 오오누키 타에코의 'Sunshower'이다. 사카모토 류이치, 와타나베 카즈미, 이마이 유 등 일본 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걸출한 인물들이 세션으로 참여했고, 시티팝의 대부로 인지되는 타츠로 야마시타가 단순히 백킹 보컬로 소모될 정도로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하는 앨범이다. 당시에 24세에 불과했던, 인지도가 그렇게 높지 않은 여성 뮤지션의 앨범인데도 말이다. 스케일 큰 크레딧에 걸맞게 모든 트랙은 보컬 멜로디를 제거해도 하나의 재즈 인스트루멘탈 트랙으로서도 훌륭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연주를 선보이고 있다. 물론 독특한 음색과 멜로디를 자랑하는 오오누키 타에코의 보컬은 이러한 연주에 화룡점정의 역할을 하며 왜 이 앨범이 현재에 재조명받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2020년대에 고전 애니메이션이나 이러한 클래식 J-Pop 음반들이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컴퓨터 기술이 발달한 지금에는 다시 나오기 힘들다는 희소성도 큰 이유일 것이지만 아무래도 예전의 화려했던 시절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나 마음만 먹으면 자수성가해서 부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던 시절, 좋은 대학만 나오면 이후에 적당히만 살아도 안정된 미래가 보장되던 그 시기, 보다 단순하고 편안했던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여름마다 '쥬라기 공원' 같은 새로운 블록버스터의 개봉 소식이 우리를 설레게 했고, 비디오만 빌려보고 새 게임 하나만 사도 주말 내내 즐거웠던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 등이 현재와 같은 뉴트로 열풍을 불러온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시절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세대들도 그러한 정서에 휩쓸려 몇 십 년 전에 대한 환상에 휩싸여 겪어보지 않은 과거를 그리워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그 시절이 좋기만 했을까? 사실 10분만 깊이 생각해 봐도 그건 아니었다는 걸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시절 '쥬라기 공원', 'E.T.' 같은 명작 영화도 있었지만 '배트맨 & 로빈', '하워드 더 덕' 같은 쓰레기 같은 영화들도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80, 90년대에는 즐거운 것들도 많았지만, 당시 서울의 거리는 지금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더러웠고, 차도보다 인도에 오토바이들이 더 많이 질주하면서 수시로 우리의 생명을 위협했다. 전력을 다해 손을 흔들지 않으면 버스들은 정류장에 서지 않았고, 학교폭력과 군대 가혹행위는 한국의 남자라면 당연히 겪어야 할 성장통 같은 것이었다. 남녀차별 역시 너무나도 당연했고, 직장이나 학교 내에서 성희롱이 섞인 유머는 그냥 재미있는 농담일 뿐이었고 거기에 반발하면 왜 유난을 떠냐며 이상한 사람 취급받기 일쑤였다. 지금 그 시절보다 소위 말하는 '낭만'이 부족할지는 몰라도 결코 그 시절이 지금보다 객관적으로 무조건 풍요롭고 아름다웠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Sunshower' 역시 조금만 깊이 들어가 봐도 액면상 보이는 것과 그 실체는 많이 다른 음반이다. 겉으로만 보면 마치 돈이 남아도는 소속사에서 신인 여가수의 음반에 막대한 자본을 쏟아부어 화려한 세션을 기용해서 만든 블록버스터 앨범 같지만, 실제로 당시 아이돌도 아니었고 돈도 안 벌릴 거 같은 여가수의 음반에 회사는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오오누키 타에코 본인이 어린 나이에 비해 오랜 기간 동안 밴드 활동 및 탄탄한 음악 활동을 해왔기에 스스로 쌓은 인맥으로 당대의 걸출한 연주자들을 불러 모을 수 있었고, 소속사 및 음반사에서 큰 관심 및 간섭이 없었기에 본인과 연주자들의 자유로운 협업으로 개성적인 색깔의 명반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회사에서 예측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앨범은 기대에 비해서도 많이 팔리지 않았으나 이후에 낸 음반들이 어느 정도 흥행하면서 오오누키 타에코는 대중 가수로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Sunshower' 역시 뒤늦게 다시 주목받으며 현재는 J-Pop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반으로 자리 잡았으며, 그녀 역시 아직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며 일본 음악계의 원로 여성 뮤지션으로 대우받고 있다.
아무도 돈을 대주지 않으려 했던 싸구려 공포영화 '나이트메어'가 영화의 새 역사를 쓰고,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화투 만들던 중소기업 '닌텐도'가 게임 업계를 되살렸듯이 화려한 과거에도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이들은 빵빵한 뒷받침을 받던 버블 경제의 수혜자들이 아니라 외면받던 언더독들이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며 과거의 훌륭한 아티스트들이 그 창의적인 결과물로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듯이 현재에도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충실한 노력을 통해 좋은 컨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어린 시절에 게임하고 놀며 즐겁게 보냈던 기억도 가치가 있지만 지금 성인이 되어 우리의 삶에 대한 주도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도 충분히 행복하고 소중하다. 과거를 추억하고 오래된 명작들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것은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이고 고상한 취미이지만 거기에 매몰되어 현재를 폄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취향 타지 않는 명곡 'Summer Connection'과 '都会 (Tokai)'를 들으며 잠시 찬란했던 과거를 회상하되 현실로 돌아오는 것도 잊지 말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