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줄 아는 자의 미덕

플레이어에게 추억을 아름답게 마무리지을 수 있을 권리를

by 핵보컬

"안녕.


모든 이들이 정말로 행복해진 것 같아.

괴물들은 지상으로 돌아왔고.

이 세상엔 곧 평화와 번영이 찾아올 거야.

숨 좀 돌려.

이제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어.

...


그래, 딱 하나, 딱 하나 남은 위협.

모든 걸 지워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자.

모든 이들이 공들여 왔던 그 모든 걸.

내가 누구를 말하는지 너는 알고 있지, 안 그래?


맞아. 널 말하는 거야.

너는 여전히 모든 걸 지워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


만약 네가 원한다면...

모든 이들은 이 시간선에서 뜯겨져 버릴거야...

그리고 이런 일들이 있기 전으로 되돌아가 버리겠지.

아무도 이런 일들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지 못할거야.

너는 네가 원하는 걸 뭐든지 할 수 있지.

...


난 그 힘을 알아. 세이브, 로드, 리셋

그 힘은 네가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던 거잖아, 안그래?

내가 정말로 사용하고 싶었던 그 힘.

하지만, 지금에 와서 모든 것을 되돌린다는 건...


나... 난 두번 다시 그런 일을 벌이고 싶지 않아.

그 일들을 겪고 나서 말이야.

그러니까 제발.

그들을 보내줘.

그들을 행복하게 해줘.

그들이 자신만의 삶을 살게 해줘.

...


하지만.

만약 네가 마음을 바꾸지 않을거라면.

만약 모든 걸 지울 생각이라면.

내 기억 역시도, 지워야 할거야.

...


미안해.

아마 천 번도 넘게 들은 얘기겠지, 응...?

...


뭐, 이게 다야.

나중에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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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게임 '언더테일'의 진엔딩을 본 이후 게임을 다시 시작하려 하면 나오는 작중 캐릭터 플라위의 대사이다. 엄청난 몰입감으로 플레이한 게임의 엔딩을 보았을 때, 그리고 한 번 마무리한 게임을 다시 시작하려 할 때 드는 복잡 미묘한 감정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것이 있을까 싶은 명대사라고 생각한다. 한 편으로는 내가 즐겁게 플레이했던, 한 동안 현실 세계보다도 더 몰입하고 많은 시간을 보냈던 가상 세계로 돌아가고 그 안에서 친구처럼 함께 지낸 캐릭터들에게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 세계는 더 이상 현실 세계의 나와 함께 진행되지 않는다. 플레이어인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둘 중 하나이다. 이미 내가 행복한 결말을 부여한 세계로 억지로 돌아가서 고장 난 CD 플레이어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는 NPC가 되어버린 캐릭터들과 무의미한 상호작용을 반복하거나, 그 세계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다 지워버리고 리셋해서 플레이하거나 하는 것이다. 한 편으로는 다시 처음 플레이했을 때의 그 경험을 반복하고 싶지만, 그것이 나에게 똑같은 감동을 줄 확률은 극히 낮은 편이고, 행복한 결말을 부여받은 그 세계의 캐릭터들이 현실 세계의 내가 아닌, 가상 세계에 여전히 존재하는 나의 캐릭터와 함께 그 삶을 영위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Rachid-Lotf-Retro-Gaming-Art-1152x410.jpg 추억...소중히 간직하거나 그 안에 매몰되거나

이러한 심리를 가리켜 현실 세계에 충실하지 못하는 부적응자의 과한 몰입이라고 폄하할 이들도 있겠지만, 훌륭한 문화 컨텐츠는 그것이 소설이든, 영화든 게임이든 상관없이 이를 향유하는 이들에게 그만한 몰입감과 감동을 선사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때 친구들과 동네에서 놀고,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낸 추억이 마음속 깊이 자리하여 성인이 된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듯이, 동일한 시기에 재미있게 본 영화나 감명 깊게 읽은 문학 작품, 방과 후에 즐거움을 주었던 게임들 역시 하나의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서 성인이 됐을 때도 그 주제가나 그것을 연상시키는 무언가만 보아도 잠시나마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며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의 즐거움이나 감동을 느꼈던 것이라면 그것이 비록 가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무언가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경험한 개인에게는 그만큼의 중요성과 무게를 갖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 세계에서 만난 학교 동창들이나 동네 지인들이 우리의 소중한 인연인 것처럼 마리오나 소닉, 춘리나 피카츄 등도 우리의 친구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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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내가 좋아하는 게임이나 영화의 속편이나 리메이크가 나오는 것이 두려워졌다. 사실 이런 것은 위에 언급한 측면으로 봤을 때 해당 작품의 팬에게 있어서 사실 매우 반가운 일이어야 한다.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 가상 세계 속 내가 사랑했던 캐릭터들을 다시 한번 만나볼 수 있고 그들의 성장한 모습, 이후의 모험을 함께 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이들이 새로운 모험을 위해 돌아왔다는 것은 새로운 갈등이나 위협이 생겼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고, 이전에 부여된 해피 엔딩에 균열이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다. 리메이크라면 원작보다 얼마나 업그레이드되었을까 기대를 주기도 하지만 뭔가 기존의 작품을 훼손하거나 그 감동이 퇴색되지는 않을지 우려가 생기기도 한다. 물론 여기까지는 큰 문제는 아니다. 당연히 아무 갈등이나 위협이 없는 상태에서의 게임이나 영화는 재미가 있을 리 만무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임팩트를 주려면 당연히 그 갈등의 스케일은 이전보다 훨씬 커져야 할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상당수의 속편들이나 리메이크가 이전 작품이나 해당 작품의 팬들을 향한 존중 없이 이루어질 때가 많기 때문에 그것을 플레이하거나 관람하는 이들에게 불쾌감과 당혹스러움만 주는 얼토당토않은 방향으로 전개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maxresdefault (7).jpg 해본 사람에게는 분노를 유발할 장면

아마 게임에서 이 분야의 가장 악명 높은 타이틀은 근작 중에는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일 것이다. 전작에서 큰 임팩트를 주었던 캐릭터들을 파괴하고, 매력 없는 새로운 캐릭터를 억지로 플레이어에게 들이밀고 불쾌한 플레이 경험까지 제공한 이 게임은 발매 후 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심심치 않게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플레이어의 추억을 파괴한' 속편의 대표 격으로 역사 속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비단 이 타이틀뿐만 아니라 꽤 많은 게임이나 영화, 소설 등에서 우리는 이러한 경우를 생각보다 흔히 접할 수 있다. 전작에서 세기의 사랑과 같은 감동적인 전개와 결말을 맞은 커플을 강제로 이별시키고, 행복한 결말을 맞은 세계는 뭐 한 달 정도 그 평화가 유지되다가 다시 무너져버린다거나, 심한 경우에는 주인공이 속편의 초반부에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아예 주연급 인물인데도 "걔 그냥 이러이러해서 죽었어."라는 대사 몇 마디로 작품에서 어이없게 퇴장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작품의 팬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실망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추억의 한편이 부서지는 느낌을 받고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5단계를 거치기도 한다(때로는 부정의 단계에서 머물고 이따금 분노가 찾아오는 단계에서 영원히 고착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게임이란 플랫폼은 그 특성상 플레이하는 그 자체의 경험도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잘 만든 스토리를 이어받거나 재현한다 하더라도 속편이나 리메이크에서 소위 말하는 최적화(게임이 콘솔이나 PC에서 문제없이 잘 돌아가게 하는 것, 그래픽이나 프레임 및 플레이 자체의 원활함 등의 많은 요소들이 이에 따라 좌우된다)가 성의가 없거나 엉망이라면 팬들의 분노를 자아낼 수도 있다. 아마 대표적인 케이스가 '포켓몬스터 브릴리언트 다이아몬드/샤이닝 펄'과 'GTA 트릴로지 리마스터', 최근작 중에는 '포켓몬스터 스칼렛/바이올렛'일 텐데 이들은 게임의 스토리보다는 그 퀄리티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경우이다. 단순히 그래픽이 후지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 '정말로 애정과 성의가 없이 대충 만들었구나'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영혼이 없는 빈 껍데기 세상 속에 내던져진 느낌이 들기 때문에 불쾌감마저 야기한다.

image_9396419411635758445599.jpg 진짜 ???를 유발하는 심각한 퀄리티

모든 이들의 기준이 동일하지는 않겠지만, 속편이나 리메이크에 있어서 나에게 가장 중요하게 다가오는 요소는 해당 작품에 임하는 창작자들의 애정과 헌신이라고 생각한다. 이전에 자신이 만든 작품과 그 안의 세계와 캐릭터들을 크리에이터가 얼마나 사랑하는가, 자기의 것이 아니더라도 바통을 이어받은 후속 개발진들이 얼마나 강한 헌신과 책임감으로 임하는지가 속편이나 리메이크에 있어서는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한다고 본다.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거나 미완성작을 어쩌다가 시장에 내보냈다고 하더라도 만드는 이가 진정한 책임감으로 임한다면 이를 수정하고 다시 제대로 된 완성작으로 팬들에게 제대로 된 응답을 할 수도 있다. 스토리나 게임플레이에 약간의 아쉬움이 있더라도 무언가 기존의 것을 존중하는 선에서 새로운 요소를 도입하려는 진지한 고민과 즐거운 경험을 플레이어에게 안겨주려는 노력이 느껴진다면 상당수의 플레이어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프랜차이즈가 돌아온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제발 이러한 팬들의 관용과 사랑을 크리에이터들이 악용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GettyImages-800570080-e1613586628113.jpg 물론 과한 팬덤이 작품을 망치거나 산으로 가게 만들 때도 있다

플레이어, 팬들에게 즐거운 경험을 안겨주었던 그 세계와 캐릭터들의 또 다른 이야기, 새로운 모험에 대해 진정한 고민이 이루어졌고 변함없는 애정으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환영이다. 그러나 단순히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기가 어려워 기존의 안정적인 프랜차이즈에 기대려는 얄팍한 시도, 전보다 나은 결과물을 만들 수 없다는 컴플렉스의 비뚤어진 발현으로 인한 일탈, 돈 몇 푼 쉽게 벌어보겠다는 욕심으로 우리의 추억을 더럽히는 짓거리는 제발 멈춰주기를 간절히 크리에이터들에게 부탁하는 바이다. 우리는 이미 당신들이 안겨준 훌륭한 경험에 만족하고 감사하고 있다. 때로는 떠날 줄 아는 자의 미덕을 발휘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 플레이어가 소중한 추억을 아름답게 간직할 수 있게 제발 내버려 두어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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