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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이륙 Sep 06. 2023

<쓰라는 대본은 안 쓰고>

(1) 굿을 할 걸 그랬어


- 대박 날 텐데! 결혼도 그렇고 더 잘 풀리려면

굿을 한 번 해야 해! 그게 이륙씨의 운을 막고 있어!


그래. 아무래도 그때 굿을 했어야 했다.

아침 일찍 걸려온 전화를 끊으며 든 생각이었다.


- 올해보다 내년이 더 좋아요!

- 내년에 아주 꽃을 피우겠네

- 올해 바쁜 건 바쁜 것도 아니야!



작년에 작가인맥을 통해 연예인도 가고

유명 CEO도 간다는 점집만 7곳을 갔다.

그리고 모든 무당들이! 1명도 아니고 2명도 아닌,

무려 7명이! 하나 같이, 마치 짠 듯이.

나의 성공을 예언했다.


마침 그때는 방송작가 인생 처음으로 종소세를

뱉어낼 만큼 일이 많았기에

‘이보다 바빠지면 내년에 작업실을 따로 얻을까?

월천 작가? 그게 바로 나?!‘ 하는 꿈을 꿨었다.

실제로 올해 1월. 프로그램 2개 기획,

유튜브 콘텐츠 제작 등  동시다발적으로

일이 들어왔고 덕분에 꿈이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나를 돌아보면,

내 모습은 어떠한가?


올해 초에 기획하고 있던

2개의 프로그램들 중 하나는

‘투자금‘ 이슈로 여태 질질 끌어오다가 엎어졌고.


다른 하나는 소리소문 없이 본인들 멋대로

제작을 연기하더니, 결국 작가료 조정 협상

‘3차’ 끝에 결렬되며 엎어졌다.


그리고 이 글의 시발점이 된, 정말 ‘시발’점이 된

오늘 아침 일을 빼놓을 수 없지?

한 달 전부터 예정돼 있었던 강의가 3일 앞두고

주최 측의 변심으로 폐강됐다.

이어서 다음달 강연도 없어졌다.


결국 나는 6개월가량 변변한 기획 하나 못한,  

땡전 한 푼 못 받은,

이력  한 줄 못 남긴 ‘백수’가 됐다.


어릴 때도 그렇게 엎어져서 무르팍 성할 날이

없더니, 커서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 점집들을 찾아가 불이라도

질러야 이 속이 풀릴 거 같다.

*

*

*

점집을 불태우는 대신 잠시 밖에 나가 산책을 했다.

골치 아프거나 속 상한 일이 있을 때,

한참을 걷다 보면 마음이 조금 풀리기도 하는데.

오늘은 좀처럼 마음이 풀리지 않는다.


나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작가 인생 15년이 허무하다.

다른 일을 하기에는 특별한 기술도 없고

나이 제한도 있고 학벌도 걸리고...

사실 제일 걸리는 건, 저 15년 안에 두고 온

내 청춘이다.


예전에는 ‘워커홀릭’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방송’밖에 모르고 살 때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밖에 나오면 손 많이 가는

칠칠맞지 못한 ‘어른이’가 된다.


그런 내가, 돌아갈 곳은 어디며.

나아갈 곳은 어디일까?

 

걸어도 생각이 떨쳐지지 않는,

지금처럼 생각이 많을 때는 책들을 뒤적거려 본다.  

어떤 내용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런 시기에 읽는 책은 음악이나 영화처럼

사람에게 위로와 위안이 되어주기도 한다.


너무 멀리 와버렸다 한들
이제 와서 어쩌랴
우리 인생은 너무 무겁지 않았던가
그 무거움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고단하게 날개를 퍼덕였던가

더 이상 묻지 말자
우리 앞에 어떤 운명이 놓여 있는가를
묻지 말고 가자
멀리 왔다면
더 멀리 한없이 가버리자.

-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 장석주 시선집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자, 이제 몇 가지만 정리하고 자리에 일어나서

사랑하는 나의 어리고 아픈 강아지를 재울 예정이다.


“더 이상 묻지 말자.

우리 앞에 어떤 운명이 놓여 있는가를.”


어쩐지 우스운 결심이지만 올해부터는 절대,

점집을 찾지 않으려 한다.


“멀리 왔다면 더 멀리 한없이 가버리자.”


그리고 일단은 운명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보련다.

저 멀리 뭐가 있을지, 그 끝에는 뭐가 보이는지.

이 두 눈으로 확인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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