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는 상처를 통해 인간이 성장한다고 믿지 않는다
꽤나 괜찮은 술자리였다.
바람도 시원하게 불고, 그날따라 사람이 적었던
힙지로 골목길의 술집도 맘에 들었다.
특히 함께 마시는 사람들이 좋았다.
약 10년 전, 같은 프로그램에서 일을 한 걸 계기로
지금까지 연을 이어오고 있는 피디 A, B와의
만남이었다.
당시 “작가님 이거 어때요?” 하고
오케이컷을 묻던 입봉 1년 차 A피디는
이젠 부르는 게 값이 된 프로 편집러가 됐고,
녹화 테이프 나르며 선배들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던 AD였던 B는
어느덧 콘텐츠 회사에서 ‘디렉터’가 되어
나에게 일감을 갖다 주기도 한다.
코로나며 뭐며 2여 년 만에 만난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회포를 풀었다.
과거 함께 일할 때 추억부터 최근 가진 고민까지.
어린애들로만 보였던 이들이
어느새 어른이 돼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 보고 있으니 ‘참 잘 컸다.’ 하는
생각이 드는 게, 누가 보면 내가 키운 줄 알겠더라.
잠시 B가 화장실을 간다며 자리를 비운 사이,
A가 물어왔다.
“작가님, 그거 기억나요?”
“뭐?”
“예전에 작가님이 저한테 그러는 거예요.
‘넌 참 바르고 반듯하게 잘 자랐다고.’
그래서 제가 집 망하고, 아빠 사업 실패하고...
이런저런 저희 집 사정을 얘기하면서 그 덕분인 거 같다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작가님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
“아니? 내가 그런 말을 했었는지도 까먹고 있었어. “
“푸하하. 이럴 줄 알았어. 뭐라고 했냐 하면요.
작가님은, 꼭 상처가 사람을 성장시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시련들이 날 이렇게 만든 게 아니라, 원래 난 좋은 사람이었던 거라고.
그러니까 굳이 그 상처를 합리화하면서 억지로
밝은 척하지 않아도 된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라고요. 그때 알았잖아요. 내가 사실은 상처받고 있었구나. 그걸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 거구나
하고요. 그래서 저는 그 말이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요. “
“...”
“에? 뭐야? 왜 작가님이 울라고 그래요? 작가님이 나한테 해준 얘기라니까? “
사실 내가 저런 말을 했었는지, 아직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분명 저 정도로 멋들어지게 말했을 거 같진 않은데 말이다.
하지만 A에게 내가 저런 얘기를 했다면,
아마 아래 글에서 영감을 얻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직도 이 글이 진짜, 이상이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상처를 통해 인간이 성장한다고
믿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상처를 통해
성장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들은 상처가 없이도
잘 자랐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당신을 상처 없이 지켜주고 싶다.
심지어 그대 전혀 성장하지 못한대도
상관없다.
- ‘이상’이 연인 ‘금홍’에게 보낸 편지로
알려진 글
이후 화장실에서 돌아온 B는 두 눈이 붉어진
우리를 보며 “뭔데? 무슨 일인데?”하고 물어봤다.
하지만 우린 그 대답을 웃음으로 대신하며,
잔을 부딪혔다.
그리고 알딸딸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쌀쌀맞고 잘 표현 못하는 나지만,
조금은 더 다정한 이야기를 전해도 좋겠다고.
다정한 말은, 듣는 사람만이 아닌 말하는 사람도
따뜻한 마음이 들게 하는구나.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