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모님의 명절 차례를 집에서 모시고 친정에 늦게 출발하는 우리 가족은 막내 삼촌네 가족과는 거의 마주칠 수 없다
삼촌은 그날 우리에게 할 말이 있으셨는지 도착과 동시에 짐을 챙기시고 우리를 마중하러 나오셨다.
엄마에게 든든한 큰 아들 같은 막내 삼촌은 제부와 남편의 힘든 점을 삼촌에게 고스란히 이야기하며 우리 집안의 흑역사를 돼 뇌였을 것이라는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가족경영에 삼촌이 들어오실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다.
마침 삼촌은 경기도 지방에서 식당을 하다 모두 접고 가족이 있는 서울로 돌아갈 참이라 했다.
우리 자매들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삼촌을 포함해서 제부, 남편 남자 셋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삼촌은 우리들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처가로 떠나셨다.
그렇게 명절이 지나고 잊어버릴 때쯤 삼촌이 우리 집에 오셨다
그냥 어떤지 보러 오셨거니 했는데 서울 모든 걸 정리하고 오셨다 했다.
내가 성격 급하고 앞 뒤 생각 없는 건 타고난 우리 집안의 내력이 아닌가 싶다.
절차도 없이 상의도 없이 모든 걸 정리하고 내려오는 삼촌을 보고 우리 모두는 황당했다.
난 정말 싫었다.
또 내 가족이다. 그것도 막내 삼촌.
나와는 애틋함에서 애증의 관계로 맺어진 막내 삼촌이 왔다.
황당했다.
제부로 모자라 이제는 피로 맺은 삼촌이라니... 나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후에 알고 보니 삼촌이 다니러 오신다 했는데... 그렇게 바로 오실지는 몰랐다고...
그렇게 나는 나의 가족을 또 얄궂은 가족 경영에 참가시켜야 했다.
아빠의 형제는 10 남매이다. 할머니가 40세가 넘어서 낳은 막내 삼촌은 우리에겐 삼촌이라기보다는 큰오빠였고 엄마에겐 아들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가진 건 없지만 철저한 유교 집안의 교육을 받고 자란 할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빠의 형제들은 우애가 좋아서 동네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던 중 어려서 서울로 올라가신 큰아빠는 60년대 70년대 서울에 상권을 잡고 있던 세운상가에서 지금의 L사 K전자제품을 파셨다. 냉장고, tv가 막 우리나라에 보급되던 때라 사업은 커졌고
집안의 형제들이 그곳에서 일을 시작해 셋째 작은 아빠는 독립을 해서 자기 사업을 하기도 하셨다.
큰 아빠의 사업이 커지면서 경제적 부분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우리와 함께 살던 막내고모도 큰아빠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서 결혼 전까지 그곳에서 일을 했다.
작은 시골동네였지만 우리 집은 서울서 잘 되는 사업을 하던 큰 아빠 덕분에 그 당시 나왔던 새로운 전자제품은 말만 하면 언제든 우리 집 곳곳에 배치가 되었고 남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렇게 잘 나가던 사업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큰 아빠께서 갑자기 혈압으로 쓰러지면서부터였다.
당시 사우디 까지 가서 일하고 돌아온 작은 아빠는 지금의 H사 시멘트에서 근무하셨다.
큰 아빠의 갑작스러운 병세로 작은 아빠가 사업을 맡게 되었고 사장이 두 명이 된 그곳은 날마다 살얼음 판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 것 같다. 내가 끌지 못하는 배를 대신해서 노를 저어줄 사공의 자리를 내어주는 순간 배의 방향을 좌지우지하는 건 내어준 사공의 몫이라는 걸...
한발 물러선 사공은 그냥 묵묵히 타고 가다 풍랑을 만났을 때 돗을 잡아줘서 방향을 잡을 수 있게 해 주는 게 자리를 내어준 그 사람의 몫이라는 걸...
간간히 할아버지를 따라서 올라간 서울 집은 각별했던 큰아빠 작은 아빠의 가족 간에도아래 위층집에 살면서
왕래가 뜸 했다.
작은 아빠는 70년 말 세운상가 자리가 용산으로 옮겨지면서 무리를 했던 큰 아빠의 빚까지 그대로 물려받았다.
방학 때 작은 아빠집에 가끔 놀러 가면 내가 본 작은 아빠는 늘 바쁜 사람이었다. 아침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출근하신 적이 없으셨던 것 같다. 금방 구운 김에 밥만 넣어 김밥을 입에 물고 나가시거나
샌드위치를 입안 가득 넣고 채 목에 넘기지도 못하고 새벽길을 가시는 모습을 자주 봤다.
유일한 휴일은 일요일 교회 가시는 날 빼면 새벽부터 밤늦게 퇴근해 오셨다.
미워할 수 없는 어른
방학이 되면 번잡스러운 조카들이 작은 집에 놀러 가 눈치 없이 한 달을 넘게 있어도
작은 엄마, 작은 아빠는 늘 한결같이 대해주셨다.
철이 들어 생각해 보니 작은엄마, 작은 아빠를 떠올리면 그분들은 진정한 어른이었다.
그렇게 저렇게 운영해 오던 사업체가 몇십 년을 근무하며 가족같이 믿었던 직원의 배신으로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졌다.
0으로 시작해 100을 만들어 놨던 돌아가신 아빠의 땅은 온전히 그 사업체에 들어갔다.
유난히 우애가 좋았던 형제들은 그 둘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모두 동원해서 그곳에 넣었다.
90년대 초 은행에 다니던 막내 삼촌은 그 중심에 있었다.
지금과는 다르게 모든 건 보증서에 도장만 찍으면 되는 문제여서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아빠의 땅이 누군가에 손에 가는지도 모르면서 그곳에 도장을 찍었다. 나에겐 오빠 같고 아빠 같았던 막내 삼촌과 엄마의 권유로 싫다는 주장 한번 하지 못하고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설상가상이라 했던가?
그해 큰 아빠는 자신의 젊음을 바친 사업체가 힘들어지면서 충격으로 두 번째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평소 심장이 약한 할머니도 큰 아빠의 소식에 충격으로 아침을 챙기다 싱크대 앞에서 그대로 쓰러 지셨다.
그리고 큰 아빠 장례식
겉만 알던 큰 아빠의 자녀들 늘 아빠형제들만큼 사이가 좋던 나의 사촌들은 작은 아빠를 원수 취급하며 행패를 부리고 난장판을 만들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모든 건 남은 자의 몫일뿐...
침묵으로 가신 큰 아빠의 장례식은 끝이 났다.
모든 가족의 힘이 들어갔음에도 사업은 멈출지 모르고 끝을 향해 갔고 작은 아빠는 결국 미국행을 택했다.
작은 아빠는 지금까지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신다.
그 세월이 30년이 다 되어간다.
그 일로 막내 삼촌은 은행을 그만두어야 했고 대학 졸업 후 그 일만 해오던 삼촌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아서 다녀야 했다. 심지어는 다단계에까지 손을 뻗으면서 모든 가족이 서울로 가야 하는 상황까지 만들었다. 서울 아이들 사이에서 적응이 힘들었던 사촌 여동생은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다.
한편 삼촌이 서울로 간 이후 우리 가족은
아빠가 일궈놓은 땅을 가장 낮은 가격에 해마다 경매로 넘어가는걸 말 많은 작은 시골 동네서 고스란히 지켜봐야 했다.
엄마는 지금도 그때 자신이 멈추지 못한 걸 후회한다고 했다. 언젠가 가족들 등살에 떠밀려 서류에 도장을 찍은 내가 엄마를 원망하면서 물었다.
왜 그랬냐고
아빠를 잃고 또 자식을 잃을까 걱정이 되었던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남편을 잃고 혼자 시부모님을 모시고 산 엄마였지만 자기 자식이 죽겠다 하니 땅 보증을 거부하는 며느리에게 독설을 퍼부으시며
"네가 이 집안에 와서 한 게 뭐 있냐"하셨다 했다.
우리가 딸이기 때문에 자식 인생에 흠이 될까 집을 나가지 못하고 엄마는 남편의 재산을 고스란히 넘겨주었다. 그런데 그런 엄마를 딸들은 잘했다 얘기하지 않는다. 그냥 각자의 힘들었던 날을 떠올리며
'그랬구나'라 한다.
참 아니러니 하다. 인생은...
아빠가 남겨놓은 땅으로 농사를 짓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신 우리 집에 작은 아빠가 생활비를 보내줘 생활하던 우리 집은 진정한 가장은 이제 엄마의 몫이 되었다.
경매로 넘어간 땅은 내 밭이 남의 밭이 되었고., 내 땅에서 남의 땅으로 되면서 세를 내고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엄마는 살기 위해 공장으로 남의 식당으로 옮겨가며 시부모님을 모시고
딸 셋을 키우며 남은 생을 사셨다.
젊음이 아무리 좋아도 그 시절로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엄마의 말은 그때 그 시절을 모두 대변하는 듯하다.
그런데 그런 삼촌이 우리 집에 오셨다.
방을 구하기 전 모든 걸 번개처럼 진행되었고 나는 정신이 없었다
삼촌이 오시면서 우리 가족은 엉킨 실타래처럼 쌓인 오해가 풀리기보다는 더 엉켜서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되었다. 제부는 총괄 책임 자리를 뺏겼다 생각했다.
복층으로 되어있는 사무실 2층 분리된 공간에서 거의 하루종일 내려오지 않았다.
이어폰을 끼고 하루종일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있다가 퇴근했다.
시공이 있는 날이면 삼촌을 데리고 다니면서 일을 가리켰지만 집안의 어른을 모시고 일을 하는 심정은
늘 가시 방석이었을 것이다.
제부와 갈등도 모자라 삼촌의 거주지부터 모든 걸 책임져야 하는 나로서는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나의 흰머리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기 시작했고 생애 최초로 원형 탈모까지 생겼다.
사업을 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로 나에겐 최초의 증상이 많아졌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우리 집에 보낸 작은 엄마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것도 알고 보니 대책 없는 삼촌의 결정이었던 것이다. 해결하려 오는 어른이 아니고 짐을 얹어주고 온 객이었다. 한동안 모든 걸 내려놓은 듯 출근하던 제부는 퇴사를 했다.
제부가 그만두고 모든 일을 처리하시던 삼촌은 처음에는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었다
전기선을 끊어서 처리했고 여유 있는 시간에는 부족한 부분을 찾아보시라 했음에도 다단계 사업을 가지고 와서 터무니없는 얘기로 우리의 힘을 뺐다.
제부의 퇴사로 남편은 더 이상 사무실에 가지 않고 회사일에만 충실했다. 집안의 어른이라 어렵기도 했고
아우트라인만 잡아주면 일일이 손을 대고 잔소리하는 사업은 의미가 없다는 걸 느낀 거 같았다.
처음엔 생소한 LED리폼이 우리의 시작이었지만 하루가 다르게 중국에서 저가의 제품과 다양한 제품들이 들어오면서 시장동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온라인이 활성화되면서 LED조명은 대중화되었고 조명은 어느새 인테리어의 꽃으로 부상했다.
인테리어에서 빠질 수 없는 조명은 작은 전구부터 거실의 큰 조명까지 사람의 취향해 맞춰 날마다 예쁜 LED조명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에게 거래되는 곳만 해도 카탈로그가 10권은 넘었다.
60세가 다 되어가시는 나이에 이 모든 걸 날마다 보고 공부하시는 게 힘든 건 알지만 인테리어에서 빠질 수 없는 조명은 트렌드를 따라가지 않으면 변화에 발맞추기가 힘들다. 식당일을 하시던 삼촌이 이 일을 하시기로 결심하셨으면 난 좀 더 매진하길 바랐다.
가족의 흑역사를 같이 한 막둥이 삼촌이 우리의 사업을 발판으로 진정한 사업가가 되길 바랐다.
힘들게 나간 제부의 자리에 앉은 만큼 잘 해내셔서 늦은 나이시지만
세상 착하게만 사신 나의 막둥이 삼촌이 제대로 해내는 모습을 남편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마음이
가장 컸었다.
어느 날
아빠를 따라 놀러 온 사촌 동생에게 물었다.
"여기서 아빠 일하시는 거 보니 어때?"
사촌동생이 말했다.
"식당 하실 때는 배달하러 가면 엘리베이터에서 사람들이 음식 냄새난다고 싫어했고
그냥 식당 아저씨였어. 그래도 아빠는 죄송합니다~ 하고 허허 웃기만 하셨어."
그런데 이곳은 적어도 아빠한테 사장님이라 하니까 좋아 "
나는 대답했다.
"그렇구나"
난 속으로 생각했다.
'다행이다. 부모의 힘든 인생에 너희까지 들어와 있었서 언니는 늘 마음이 아팠단다. 다행이다.'
조명시공 현장 사진
그러나 가끔 사무실을 가보면 여 직원 혼자 있는 경우가 많아졌다.
삼촌에게 월급을 주고 생활공간의 비용까지 대 줘야 하는 조카인 나는 남편에게 눈치가 보이기도 해서 안타까운 마음에 삼촌에게 모진소리도 참 많이 했다. 어떤 날은 흰머리 가득 내려앉은 먼지로 어떤 게 먼지인지
흰머리인지 구분이 안될 만큼 힘들게 일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가족사를 한탄하며 속으로 참 많이 울었다.
'10남매 중 유일하게 대학까지 나온 귀한 막둥이가 어쩌다...'
낯선 도시에 적응을 위해서 인지 시간이 여유가 있으면 제부가 없는 사무실에 대한 고민보다는 다른 일을 찾으시고 교회로 가시면서 아시는 지인분들을 찾아서 가셨다.
삼촌의 가끔 있는 일탈에 남편의 핀잔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난 제부를 보내고 마음이 안 좋았던 터라 삼촌에 대해 모르면서 나한테 쏟아내는 말들이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그대로 꽂혔다.
'더 이상 참지 않으리라'
누구보다 아빠가 없는 나에게 집안의 사업 외에는 늘 애틋했던 막둥이 삼촌이기에 제부와는 또 다른 느낌의 잔소리로 들렸다. 남편이 삼촌에 대한 작은 잔소리도 달갑지 않았고 머리끝까지 오르는 화를 참고 있지만은 않았다. 상의 한마디 없이 또다시 결정권을 쥐고 흔든 남편을 향한 원망으로 돼 받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