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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Nov 23. 2015

예술은 몸과 시간 속에 탄생한다

단재 영화팀 - 로버트 카파전 & 정서영전 관람 후기

금요일에 영화팀은 예술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로버트 카파전Endre Friedman(1913~1957)에서는 사진을 통해 예술에 접근하고 정서영전은 조각을 통해 예술에 접근하는 거였다.                




예술藝術은 거창한 게 아냐그저 자신의 재주를 표현한 것 뿐     


예술이 ‘어떤 고상한 무언가’라는 이미지로 덧칠해져 있는 이상 일반인들에게 외면 받을 수밖에 없고, 예술이 ‘아이들의 정서를 풍부하게 하여 성적 향상에 도움이 된다’라고 수단화된 이상 학생들에게 친숙해질 수 없다. 

이 두 가지 모두 현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진 예술의 이미지이다. 그래서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은 ‘뭔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거나, ‘겉멋 든(잰체 하는) 사람’이거나 한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반응엔 예술을 현실과 격리시키고 사람들과 떼어놓고자 하는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예술을 보는 우리의 마음도 결코 가벼울 수 없다. 하나하나의 의미를 캐내기 위해 진득하게 봐야 한다는 강박증에 빠져 힘겹게 뜯어보고 있다거나, 그게 뭔 필요냐며 한 번 쭉 보고 지나치던가 한다. 물론 대부분의 아이들은 후자의 행동을 한다. 하지만 그걸 뭐라고 할 순 없다. 자신이 예술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기 전부터 세상이 그런 부담감, 함부로 접근할 수 없다는 괴리감, 전문가의 영역이라는 거리감을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에 대해 마음이 가벼워져야 하며, 예술에 대해 세상이 심어놓은 강박이나 부담이 아닌 일상의 친숙함으로 다가갈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그런 여유를 찾기 위해서는 ‘공부로서의 예술’이 아닌 ‘표현으로서의 예술’을 받아들여야 하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활동을 많이 해봐야 한다. 그럴 때 ‘자신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곧 예술’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으며, 예술의 견고한 철옹성을 허물고 일상에서 맘껏 누릴 수 있게 된다.               



▲우리에겐 너무도 요원한 예술품을 보러 왔노라 왔노라. 영화팀이 왔노라.




로버트 카파전 안락이 아닌 몸으로 만들어낸 예술     


로버트 카파전은 말로 듣던 그대로였다. 세종문화회관의 미술관을 사람들이 가득 메웠는데, 그들도 사진을 보면서 가슴 두근거리는 긴장을 느꼈을 것이다. 그의 사진은 전장이라는 상황을 설정하고 봐야만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총알이 빗발치는 곳에서 총과 같은 살상무기가 아닌, 사진기를 가지고 들어가기는 쉽지 않다. 아니, 그건 미치광이가 아니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사진기를 가지고 들어가, 전쟁의 참상을 세계 곳곳에 여과 없이 알렸다. 그가 셔터를 누르는 그 순간에도 총알은 빗발쳐서 바로 옆에 있던 병사가 죽기도 했으니, 그는 목숨을 기꺼이 내어놓고 셔터를 눌렀다고 할 수 있다. 



▲전장의 떨림이 전해져 더욱 값어치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미술관에 전시된 사진을 둘러보고, 벽면에 설치된 프로젝트에서 나오는 영상물을 보았다. 90분가량 되는 영상물엔 카파의 일생이 잘 담겨 있었다. 피난 생활을 하던 젊은 시절부터 사진작가로서 명성을 얻고 난 이후,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가 1954년 인도에서 대인지뢰를 밟아 죽기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영상을 보면서 깜짝 놀란 부분은 로버트 카파가 호화롭게 살 수도 있었는데, 그런 생활을 누린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카메라를 챙겨 전장으로 향했다는 사실이다. 과연 그를 죽음의 공포가 가득한 전장으로 몰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이와 같은 카파의 태도에 대해 나를 비롯한 한국 사람들은 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건 예전에 유일한 박사가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을 때, 대부분 사람들의 반응과도 같으니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세상이 말하는 가치나 관념을 넘어서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와 같은 행동으로 세상은 조금씩 살만한 곳으로 변해왔고 그들이 뿌린 씨앗이 자라나 현실을 바꿔왔던 것이다. 그의 사진전에서 봤던 건, 바로 그런 ‘평범함 속에 감춰진 비범함’이었던 것이다. 그에게 사진은 ‘치부의 수단’이 아니었기에, ‘명성을 얻기 위한 방법’이 아니었기에 더욱 값어치가 있었다.                



▲전시장의 풍경과 영상물.




정서영 전 예술은 시간과 함께 온다     


일민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정서영 전에 찾아갔다. 2층에 올라가서 구석구석에 설치된 예술작품을 보니, 한 번 돌아보는데 10분도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예술작품이 적었고 도무지 설명을 보지 않으면, ‘왜 이런 것들이 예술이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황당한 작품이 많았다. 

이런 황당함은 뒤샹Marcel Duchamp(1887~1968)의 ‘’을 봤을 때도 똑같이 느껴졌던 것이다. ‘공장에서 찍어 나오는 물건에 기호를 적었다고 예술품이 된다면, 나는 오늘부터 뒤샹을 능가하는 예술가가 된다’는 농담조의 이야기들이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럴 거면 내 핸드폰에 ‘건빵’이라는 글자를 써놓고 예술품이라 우겨도 되니 말이다. 



▲전시장에 설치된 작품들. 특히 아래의 탁자를 보고 모두 실소를 금치 못했다.



3층에서 4시부터 정서영 작가와의 대화시간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때 건호는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던졌다. 모두가 그 질문에 웃었지만, 내가 던졌어야 할 질문을 건호가 던진 것이기에 건호의 용기 있는 행동에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정서영 작가님 입장에선 이와 같은 질문이 황당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학생들과 등산을 매달마다 하는데, 어느 날 학부모가 “등산이 영화와 관련이 있나요? 그럼 등산도 공부라고 할 수 있나요?”라고 묻는 것과 같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묻는 것이기에, 당황하여 말문이 막혔을 것이다. 하지만 정서영씨는 차분하게 대답해줬고 그 대답은 명답이었다.      



이건호: 나무탁자를 제가 봤는데, 제가 알기로는 낙서하고 막 그런 건데, 

정서영: 나무 쫙쫙 긁어 놓은 거요?

이건호: 예! 줄 그어 놓은 거요. 어떻게 하면 예술이 되는 건지?(관중 웃음) 어떻게 그런 생각이 나왔는지 궁금해 가지고. 우연히 보면 어떤 얘가, 양아치가 낙서해 놓은 것 같잖아요. 그걸 예술이라고 하니까, 어떻게 왜 예술이 되는지?

정서영: 글쎄요. 분명히 예술이다, 아니다 갈리는 순간은 그렇게 분명하게 답을 갖고 있지는 않을 거 같아요. ‘지금 이게 왜 예술이지?’하는 질문은 ‘어떻게 이런 모양새가 예술이지?’라는 질문과 같잖아요. 내가 아는 예술의 모양새는 이런 건데, ‘적어도 이런 모양새는 갖춰야지 예술이지’하는 이런 거잖아요. 근데 사실은 그런 모양새 자체는 사실은 예술인 것 같지만, 예술이 아닌 것이 되게 많고요. 그래서 사실은 그런 모양새로 판단한다고 하기보다도, 이런 모양새가 무엇을 맞춰서 왔는지 가만히 살펴보면, 이것이 예술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장에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수는 있는 대요. 어떤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은그 작품이 만들어진 시간과 함께 오기 때문에그 부분을 살펴볼 수밖에 없어요이제는.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예술인지 아닌지, 예술일 수 있는지 그런 것들을 판단할 수 있겠죠.             



▲ 용감하게 질문을 던지는 건호. 그 덕에 예술에 대한 진지한 얘길 들을 수 있었다.



우리가 보는 예술품은 결과물로서의 예술품이다. 그래서 결과물만 보면, ‘도대체 이게 뭐가 특별한가?’하는 고민이 들 수밖에 없다. 루치나 폰타나는 종이에 칼자국을 내어 작품이라고 전시했고, 뒤샹은 공산품에 팬으로 이름을 써서 작품으로 전시했다. 그리고 정서영 작가는 나무토막과 각목, 파이프를 모아 놓은 작품을 만들거나 나무 탁자를 칼로 그어놓은 작품을 전시했다. 결과물만 보면, 웃음이 절로 날 수밖에 없고 ‘예술가란 별 거 없구만’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판단하는 데엔, 결과물만 보았을 뿐, 과정은 생략했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정서영 작가는 “어떤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은, 그 작품이 만들어진 시간과 함께 오기 때문에, 그 부분을 살펴볼 수밖에 없어요”라고 힘주어 말한 걸 거다. 전시 작품은 시간 속에서 탄생한다. 한 획을 어떻게 그을지, 그리고 물감을 어떤 방향으로 부을지 그 모든 게 예술의 시간이며 그런 예술의 시간을 거쳐서 예술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1899-1968)의 작품은 2차원으로만 표현되던 예술을 3차원으로 확장했다는 데서 예술로서의 가치를 지니며, 뒤샹의 작품은 ‘공산품은 예술이 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일거에 날렸다는 데서 예술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그처럼 정서영 작가의 작품도 그 작품이 만들어진 시간들을 역추적 해볼 때에 비로소 작품을 이해할 수 있고 그 과정들이 예술의 시간임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예술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닐까.               



▲ 이게 예술품인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예술계의 화두다. -뒤샹의 <샘>




시간을 염두에 두고 예술품을 바라봐야 한다    

 

작가의 말을 들으면서 생각났던 말이, 『하류지향』에서 우치다 타츠루가 한 말이었다. 우린 왜 예술작품을 보면서도 시간을 배제하고 드러난 결과만을 가지고 판단하는 게 자연스럽게 되었을까? 그건 두 말할 필요 없다. 바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소비주체’로 자신을 규정짓고 그 방식으로 타인과 사물을 대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을 빼고 그 작품 자체만을 논하며, 시간을 제하고 드러난 사람만을 주목한다. 

우치다 타츠루는 ‘소비주체’가 무의식 중에 받아들인 무시간적인 생각이 공부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등가교환이 되지 않으면 진득하게 공부하지 못하는 세태를 진단했지만, 그건 단지 공부라는 하나의 현상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사회 전반에도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다. 영화팀 학생 뿐 아니라, IMF를 거치며 신자유주의에 노출된 지금의 모든 세대에겐 이런 관념이 깊숙하게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니, 예술이 예술로 보이지 않고, 무언가 직접적인 혜택을 얻지 못하는 일이라면 하지 않으며, 결과가 바로 드러나는 일이 아니라면 하지 않게 된 것이다. 

바로 ‘소비주체’로 형성된 우리의 생각을 ‘노동주체’로 바꾸고, ‘무시간 모델’이란 환상을 걷어내고 ‘시간’의 현실을 받아들일 때, 예술을 볼 수 있고 우리 또한 예술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예술은 특별한 무엇이 결코 아니다. 바로 우리의 일상이며 우리의 현실이며, 내가 살아가는 방식 자체인 것이다. 그러려면 ‘노동주체’로 자신을 리뉴얼해야 하며, 자신의 삶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며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내 삶이 예술이 되며, 내가 표현하는 것들이 예술품이 될 것이다.    


  

▲ 예술품을 찾아 다니고 보고, 느끼고, 이야기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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