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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Nov 28. 2015

착각하는 인간, 그래서 다채로운 사회

다큐프라임, 인간의 두 얼굴2 후기

▲ EBS에서 꽤 유익한 다큐멘터리를 많이 제작한다. 주류 심리학의 관점이란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인간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큰 차와 작은 차, 사람들이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작은 차는 조금이라도 교차로에서 신호가 켜졌음에도 지체할라치면 뒷 차들이 금세 빵빵 거리지만, 큰 차인 경우 최대한 기다리며 심지어 차선을 바꿔서 가기도 한다. 

내 심금을 울린 장면은 그것 외에 따로 있었다. 서양인과 동남아인이 길을 물어본다. 서양인에겐 대부분의 사람이 호기심을 가지고 정성스레 알려주는 반면 동남아인에겐 냉대하거나 피하기에 바쁘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선입견이 있다 보니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나도 그랬다. 앞에서 흑인이 걸어오고 있으면 괜히 두려워하며 종종걸음을 했으니 말이다. ‘흑인=범죄자’라는 공식이 알게 모르게 내 의식에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선입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그와 같은 반응들도 당연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당연함 와중에도 균열이 있고 전복이 있었다. 자신의 일처럼 나서서 도와주던 사람들, 한 아주머니는 자신이 영어를 못하니까 지나가는 행인들을 붙잡고 알려주라고 부탁하시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을 보고 내레이터는 “긍정적인 착각을 지닌 사람을 통해 세상은 좀 더 밝아진다”는 이야기를 했다. 정말 그렇다.      



▲ 큰 차, 명품 핸드팩, 간판이 그냥 외형물이 아닌, 그 사람을 드러내는 것이라 착각하게 만든다.




당연한 것을 깨면 진실이 보일까? 

    

당연하게 받아들인 상황을 의심하고 새로운 행동을 할 수 있을 때, 삶은 더 나아질 수 있다. 그런데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생각을 한다는 것, 고민을 한다는 것도 어렵지만, 그것에 맞춰 산다는 건 더욱 어려운 일이다. 물질만능, 돈의 양으로 사람의 가치가 결정되는 세상, 흑인보다는 백인이, 육체노동자보단 정신노동자가 더 우월하다고 느껴지는 세상 등 당연하다고 느껴지는 것들은 셀 수없이 많다. 이걸 파괴한다는 건, 내 존재를 거부하는 것만큼이나 힘든 것이다. 알게 모르게 내 의식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이런 관념들을 깨부수기만 해서는 아무런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어떠한 가치도 인정하지 않는 허무주의자처럼 보일 수도 있다. 관념을 대체할만한 것이 필요하다. 과연 어떤 관념으로 대체할 것인가, 그 관념을 어떻게 확고하게 유지시켜 갈 것인지 고민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럴 때 마인드도 바뀌며 사회와 세상을 보는 시각 또한 변하게 된다.      



▲ 서양인의 백인우월주의에는 분개하지만, 실상 우리도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에게 그와 같이 행동한다. 관점 바꾸긴 행동 바꾸기까지 이어져야 한다.




누구나 자신의 관점으로 세상을 본다 

    

그와 관련된 의미 있는 실험이 펼쳐졌다. 부부를 초청해 자신이 생각하는 배우자의 사진을 고르게 한다. 사진은 총 5장으로 가운데 사진이 원본이고 오른쪽 두 장은 점차 젊어지고 멋져지게 편집했으며, 왼쪽 두 장은 점차 늙고 너부데데하게 편집했다. 이 실험을 통해 사람이 보는 외모라는 게 현재의 모습과는 다른 왜곡된 상(오히려 가운데 사진이 왜곡된 상일까?), 즉 괴리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자기 사진을 보고 못 나왔다고 생각하며 사진 찍는 것을 꺼리기도 한다. 그런 경우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크기 때문에 현실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상대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오른쪽 사진을 고르게 되고, 반대의 경우는 왼쪽 사진을 고르게 된다. 상대방에 대한 관념이 그 사람을 훨씬 멋있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장면을 보며 무릎을 치고야 말았다. 시각이야말로 오감 중에 가장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사람들도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믿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에 대한 관념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 세상이 이처럼 각양각색으로 보인다고 한다면, 과연 ‘진리’, ‘누구나 보아도 올바른 것’에 대해 상정하는 것은 어쩌면 현실을 기만한 행동이지 않을까.  



    

▲ 이 실험이 상징하는 것은,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것을 넘어 보고 싶은 대로 본다는 것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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