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어둠 속의 대화 후기
‘어둠 속의 대화dialogue in the dark’는 시각 중심의 세상에 의문을 던지며 지금껏 우리가 잊고 살아왔던 다른 감각들을 깨워준다.
시각을 잃으면 모든 감각이 열린다
전시장은 완벽한 암흑 세상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느끼고 마주했던 모든 것들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이 말만 듣고 보면, ‘뭔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거야’라고 생각할 테지만 실제로 그렇다.
우린 지금까지 무의식중에 ‘시각만이 가장 우수한 감각이다’라는 것을 끊임없이 주입받으며 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든 후각, 청각으로 느껴지더라도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지 않으려 한 것이다. 예를 들면 지금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난다고 할 때, 끊임없이 눈으로 확인하려고 한다. 아무리 냄새가 나도, 불을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냥 가설일 뿐이다. 그러다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더 이상 의심 한 점 없는 사실이 된다. 시각은 오감의 한 부분이 아닌, 오감 중 가장 으뜸이 되었다.
그렇지만 눈으로 보는 것이 꼭 진짜는 아니다. 시각이 주는 착각에 의해 우린 속고 살고 있는지도 모르니 말이다. 환상이나 환각을 통해 본 것을 과연 얼마나 믿을 수 있겠는가. 아래의 그림을 순차적으로 살펴보면, 우리의 시각이란 게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어둠 속의 대화’는 바로 이와 같은 ‘시각의 압도적인 주도권을 내려놓게 하는 것’에 핵심이 있다. 시각만을 믿던 우리에게 시각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순간을 선물함으로 지금껏 잊고 살아왔던 모든 감각을 활짝 열어젖히는 것이다.
로드마스터를 따라 떠나는 100분의 여행
8명이 한 팀이 되어 전시장에 들어선다. 전시장엔 로드마스터가 있으며 그가 우리를 길로 안내한다. 우리는 숲길, 시장, 집, 칵테일바 등을 가게 된다. 모든 건 시각이 배제된 청각이나 촉각, 미각, 후각을 통해서만 받아들여야 한다. 즉, 나의 상상이 그대로 현실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눈을 뜨고 보려고 애쓰지만, 그럴수록 더 피곤해질 뿐이다. 눈을 뜨고 살 땐 몰랐지만, 시각을 사용한다는 게 엄청난 에너지를 쓴다는 사실이다. 로드 마스터에 따르면 “눈을 뜨면 안구는 빛이 있는 곳을 찾으려 무던히 애쓰기 때문에 눈도 피로할 뿐만 아니라 현기증도 날 수 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눈을 떠서 어떻게든 보려고 애쓰기보다 아예 눈을 감고 상황을 상상하여 다니는 게 훨씬 도움이 된다.
100분이란 시간은 금세 흘렀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갔나 싶게 순식간에 시간이 흐른 느낌이다. 체감적으로 20분 정도 걸린 것 같다. 그만큼 온 감각이 열려 있는 느낌은 생각 외로 좋았다. 정말 제대로 느끼고 싶으면,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 기관으로 느껴야 한다는 것을 그제야 알겠더라.
미술이란 무엇일까
로드마스터는 보이는 길을 걷듯 자연스레 우리를 안내했으며, 우리의 행동 하나 하나를 설명할 정도였다. 그래서 우리는 야간투시경이나 적외선 망원경 같은 것을 끼고 있는 줄만 알았던 것이다. 그런 생각 자체가 어디까지나 시각 중심적인 생각이었던 것이다. 눈을 뜨고 있어야만 보이며,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시각 외의 모든 감각이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다. 공기의 미세한 흐름, 청각의 발달, 촉각의 민감함을 통해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그들은 더 많은 것을 그 순간 받아들이고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시각만을 특화시켜 시각중심의 세상에서 촉각, 미각, 후각, 청각을 퇴화시켜 가며 시각으로 편견(외모지상주의)을 쌓아갈 때, 그들은 촉각, 미각, 후각, 청각으로 세상을 느끼며 진정으로 세상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로드마스터가 “왜 학생들과 함께 이러한 전시를 찾아왔느냐?”고 묻자, 윤하쌤이 “시각 위주의 미술 작품밖에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다른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전시가 있다는 것을 듣고 함께 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역시 미술쌤으로서의 고민의 지점을 잘 이야기해주셨다. 그리고 미술의 영역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화두를 던졌다고 볼 수 있다. 백남준이 머리에 먹을 발라 한지에 일필휘지로 글(머리를 위한 선Zen for Head)을 썼듯, 뒤샹이 공산품인 변기에 ‘쌤’이란 이름을 썼듯, 루치오 폰타나가 스케치북을 칼로 잘라 작품을 만들었듯, 이번 ‘어둠 속의 대화’도 그와 같은 파격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해야 한다.
오감을 통해 세상을 느끼고 싶은 사람이라면 ‘어둠 속의 대화’를 꼭 체험해 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