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애니메이션 후기 - 09.3.21(토)
『알라딘』은 초등학생 때 봤었던 애니메이션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 영화를 보고자 했을까?
저번 토요일(2009년 3월 14일)에 이문세씨의 라디오 프로를 듣던 중 『알라딘』을 맛깔나게 해석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다시 이 애니메이션을 꺼내든 것이다. 과연 15년이나 지난 지금 보는 소감은 어떨까?
과연 명작은 명작이었다. 지금 봐도 전혀 유치하거나 닭살 돋진 않았다. 어렸을 때야 환상적인 그래픽, 흥겨운 음악, 맛깔스런 연출이 한 시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아 재밌게 봤지만, 그런 영화들을 어른이 되어서 다시 보면 실망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웬만하면 어렸을 때 봤던 영화는 그 당시의 추억으로 묻어두고 다시 보진 않는다. 물론 ‘지브리 애니’는 어른이 되어 다시 본다해도 건질 만한 메시지가 많은데 반해, ‘디즈니 애니’는 천편일률적인 권선징악에 관한 메시지만을 담고 있어서 다시 보진 않고 ‘넣어둬~ 넣어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애니는 ‘디즈니 애니’에 대한 편견을 한 방에 날려 버렸다. 어렸을 땐 보이지 않았던 메시지가 보였고, 여러 번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어떤 요행수를 바라는 인간의 모습(자파)이나, 사랑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극히 단순한 인간의 모습(알라딘) 외에도 더 깊은 내용이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과연 만족을 아는 존재일까? 이건 나의 오랜 생각거리다. ‘99개를 가진 사람은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1개를 가진 사람 것까지 차지하려 한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데, 과연 그게 인간의 본성이란 말인가? 그런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길은 없단 말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살겠지만, 대부분은 그러지 않을 것이라 믿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알라딘』에서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인물은 단연 알라딘과 자파다. 이 두 사람은 성격이 완벽하게 다른 것 같지만, 욕망을 추구한다는 부분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지금부턴 이 두 인물을 통해 인간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알라딘은 순수한 사람이다. 가난하긴 해도 희망을 지니고 있고 돈을 쌓아두는 것보다 그저 한 끼 때울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한 끼의 식사마저 포기하고 자신의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이쯤 되면 우린 알라딘의 욕망이 참 건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욕망의 노예로 살기보다 어느 정도가 되면 절제도 가능하다’는 기대를 하게 되는 것도 이 시점에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지니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지니에게 “나는 두 가지 소원만 말하고 나머지 하나는 너를 위해 쓰겠어”라고 말한다. 그 말은 곧 그에게 자유를 주겠다는 뜻이고 자신도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는 욕망에서 벗어나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정작 두 가지 소원을 말하고 난 후에 그는 어떻게 했을까? 두 말하면 잔소리다. 그는 자신의 순수한 마음에서 나왔던 스스로의 약속을 져 버렸다. 어느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욕망의 화신이 되어 욕망의 지배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자신이 바라던 모든 일이 이루어졌지만, 그게 언제 사라질지 불안하다보니 지니를 놓아줄 수가 없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욕망은 불안을 먹고 자란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알라딘의 모습에 우리들의 모습이 겹친다. “나 1억만 모으면 정말 행복할 거 같아. 그 때쯤 되면 아무 걱정 없이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아야지.”라고 말하며 악착 같이 돈을 모은다. 그 때까지만 해도 순수한 욕망 그대로다.
하지만 정작 그게 이루어지고 난 다음이 문제다. 혹여나 누가 이 돈을 가져가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돈을 가만히 놀리면 그 가치가 줄어들기 때문에 어떻게든 재투자하여 더 많은 수익을 얻으려 한다. 처음의 마음 따위는 온데간데없다. 어느 순간 자신은 돈을 위해 살아가는 하인이 되어 있을 뿐이다.
이처럼 욕망의 하인이 되는 순간, 자기의 삶은 없어진다. 결국 알라딘은 욕망의 화신이 되는 순간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그의 가장 절친인 아부마저 떠난 것은 아주 상징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욕망이 존재를 압도하면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닌, 그저 욕망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 또한 ‘욕망 덩어리’가 된다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옆에 있는 사람부터 그 변화를 알아채고 떠나갈 것이다.
두 번째로 얘기해야 할 사람은 ‘자파’다. 그는 애초부터 욕망의 화신이었다. 권력욕 하나로 이 영화에서 악역을 자처한다. 과연 그에게선 어떤 욕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는 램프를 손에 넣자마자 일초의 고민도 없이 “이 나라의 왕이 되고 싶다”고 소원을 빈다. 그 소원은 자파가 램프를 차지하려 한 이유이기도 하다. 당연히 그 소원 한 가지로 늘 꿈꿔왔던 소원을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만족하고 멈출 수도 있었다. 좀 더 사심을 담아 말하자면, 거기서 멈춰야 했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이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무언가가 이루어지는 순간, 그건 시시한 것이 되고 새로운 욕망이 싹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날 세상에서 제일 강한 마법사로 만들어라”라고 좀 더 강한 힘을 소유할 수 있도록 두 번째 소원을 빈다. 그 결과 세상의 모든 것을 자신의 맘대로 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세상을 맘대로 한다. 이 얼마나 매력적인 능력인가. 자파가 꿈꾸던 최상의 힘을 얻은 것이기에, 이쯤에선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서도 만족하지 못한다. 아무리 강력한 마법사가 되더라도 죽음을 피해갈 순 없고, 지니의 전지전능에 비하면 한 수 아래이니 말이다.
알라딘은 자파의 ‘끊임없는 욕망’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봐 자파! 너는 고작 지니의 힘을 빌어서 왕이 된 거야. 넌 가짜 왕이고 넌 지니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야. 넌 지니보다 약하잖아.”라고 말하며, 자파의 욕망을 부추긴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가 되었으면서도 만족하지 못한다는 설정은 인간의 욕망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 제어하기 힘들다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욕망을 극단으로 치닫게 만드는 기제는 ‘비교의식’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쯤 되면 처음에 얘기한 ‘99개를 가진 사람은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1개를 가진 사람 것까지 차지하려 한다’는 말의 속뜻도 알 수 있다. ‘99개를 가진 사람’이 고작 100개를 채우겠다고 ‘1개 가진 사람’의 것을 뺐는 게 아니라, 자기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비교 우위에 서기 위해 뺐는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자파는 ‘나보다 힘이 센 사람이 있으면 안 돼’라는 생각으로, 당황하지 않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날 전지전능한 지니로 만들어 다오”라고 외친다.
하지만 이런 욕망 자체가 이루어질 수는 없다. 어느 면에서건 나보다 뛰어난 사람은 꼭 있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 인간은 욕망의 하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욕망의 무한 팽창을 위해 자신의 삶을 버려가면서까지 충성 봉사한다.
존재와 욕망을 분리시켜 생각해볼 때, 당연히 존재가 앞서고 욕망은 뒤따라야 한다. 하지만 욕망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것만을 추구하며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욕망이 앞서고 존재는 하인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욕망의 무한 팽창을 위해 자신의 삶을 버려가면서까지 충성 봉사한다
이런 경우는 존재와 소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미 에리히 프롬Erich Fromm(1900~~1980)이 『소유와 존재』라는 책에서 밝혔다시피, 존재가 소유를 앞서야 하지만 우린 어느 순간에 소유에 압도당한다. 존재로만 사물을 대하던 시기엔 길에 핀 꽃 그 자체를 보고 만족해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소유로 사물을 대하던 시기가 도래하면 길에 핀 꽃을 꺾어 내 안방 화분에 잘 심어놓아야만 만족해한다. 어찌 보며 단순해 보이지만, 이 차이는 엄청난 것이어서 지금과 같이 인간을 한낱 부속품으로 여기며 사용해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시대가 오게 된 것이다.
지니가 된 자파는 결국 램프에 갇히는 꼴이 되고 만다. 가장 전지전능한 신이 되었으면서도 램프에 갇힌다는 설정은,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면 인간은 결국 ‘욕망이란 램프’에 갇힌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인간에겐 희망이란 없는 것인가? 욕망의 하인이 되어 그렇게 삶을 저주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 이렇게만 말한다면 인간의 인생은 비극일 뿐이라는 이야기이니 절로 기운이 빠진다.
그런데 이 영화의 미덕은 그런 욕망의 배치를 드러내면서도 그 해결책까지 제시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 해결책은 뭘까? 어렵다고.... 너무 머리 굴리지 말자. 욕망의 속성을 여실히 알 수 있다면, 거기서 놓여나는 법도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 말이다.
순수한 욕망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게 불행이 되는 까닭은 자신이 지닌 것들이 사라지지나 않을까 불안해 하며 남과의 알량한 비교의식을 통해 변질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배치를 바꾸면 된다. 순수한 욕망으로 남아 불안해 하지 않도록, 남과 비교하지 않도록 자신만의 장점과 자신만의 가치를 키우는 거다.
알라딘은 결국 다시 궁전으로 돌아와 자파를 램프에 가두고 모든 것을 원래 모습으로 돌려놓는다. 그리고 그는 지니에게 마지막 소원을 말한다. 이 때의 장면이 소름끼치도록 새롭게 와 닿았고 가슴이 뭉클했다.
과연 그는 어떤 소원을 빌었을까?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선 당연히 다시 왕자가 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어야 한다. 사회적 관념으론 왕자만이 공주와 결혼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욕망을 위해 소원을 빌지 않았다. 더 이상 그런 욕망이 필요치 않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왕자인척 하던 자신의 모습이 거짓임을, 거지지만 순수한 자신의 모습이 자신에게 더 맞고 행복하다는 것을 여러 일을 겪으며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자아존중감이 충만해졌기에 욕망을 위해 소원을 빌지 않고 ‘지니’를 위해 소원을 빌 수 있었다.
욕망의 하인이 된 순간 불행이 그를 휩싸고 있었고 그의 친구들은 모두 떠나갔지만, 그가 욕망을 제어하게 되자 그는 환희에 찬 미소를 지을 수 있었고 주위의 친구들도 모두 돌아왔다. 이 애니의 하이라이트이자, 가장 가슴 뭉클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지니는 자유의 몸이 되기에 앞서 소원을 빈다. 그가 말하는 소원이 욕망의 늪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 명대사이기에 여기에 인용하며 인간의 욕망에 대한 보고서인 『알라딘』 후기를 마치도록 하겠다.
자유롭게 된다면 맘대로 할 수 있지. 자유롭게만 된다면 ‘소원이 무엇입니까?’ 물어보지 않아도 되고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거, 그게 세상의 그 어떤 보물보다 더 값진 거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