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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Dec 31. 2015

자본이 쳐둔 그물망을 전태일 정신으로 넘기

자본이 휩쓴 공간을 찾아 4

용산참사에선 6명이 목숨을 잃었다. 쌍용차 사태로 22명의 희생자가 났다. 도합 28명의 목숨이 자본의 촘촘한 그물망에 걸려 사라지고 만 것이다.                




박근혜의 목숨〈 28명의 목숨 

    

2006년에 박근혜 대표가 ‘5세훈이’의 유세를 위해 단상에 오를 때, 칼날테러를 당했다. 상처가 깊지도 않았는데, 테러범(?)은 연일 언론에 신상을 털렸고 징역 10년형을 구형 받았다. 

한 사람이 단지 살짝 상처 입었다는 이유로 이와 같은 상황이 연출됐다면, 28명이 목숨을 잃은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더 극적인 상황이 연출됐어야 맞다. 하지만 실상 현실은 달랐다. 언론은 초기에 관심을 보이다가 순식간에 누그러졌고 법원은 오히려 ‘불법행위’를 했다며 피해자에게 법의 칼날을 대었으니 말이다. 



▲ '살인적 테러리즘이 발붙지 못하도록 엄정수사하라'며 여론이 들끓었다.



어떻게 이처럼 다를 수 있을까? 그건 아마도 사람 목숨이 지위나 영향력, 돈으로 환산되는 가치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기 때문이 아닐까.           



손님이 나에게 말했다. “어제 저녁에 한 불량한 사내가 큰 몽둥이로 놀던 개를 내리쳐 죽이는 것을 보니 그 광경이 너무 슬퍼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다시는 개나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리라 다짐했습니다.”

客有謂予曰 “昨晚見一不逞男子以大棒子椎遊犬而殺者, 勢甚可哀, 不能無痛心, 自是誓不食犬豕之肉矣”      

나는 그 말에 대꾸하며 말했다. “어제 어떤 사람이 난로를 끼고 이를 잡아 태워 죽이는 것을 보니 가슴이 너무나 아프더군요. 그래서 그 때부터 다시는 이를 잡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予應之曰 “昨見有人擁熾爐捫蝨而烘者, 予不能無痛心, 自誓不復捫蝨矣”      


손님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이는 아주 작은 생물입니다. 나는 큰 생물의 죽음을 보아 슬퍼할 만하였기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작은 미물로 대조하였으니 어찌 나를 놀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客憮然曰 “蝨微物也. 吾見庬然大物之死, 有可哀者故言之, 子以此爲對, 豈欺我耶”      


내가 말했다. “모든 혈기가 있는 생물은 사람으로부터 소, 말, 돼지, 양, 곤충, 개미에 이르기까지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마음이 다를 수 없습니다. 어찌 큰 생물이라 하여 죽기를 싫어하고 작은 생물이라 하여 그렇지 않단 말입니까. 그렇기에 개와 이의 죽음은 다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비유적으로 들어 대조를 한 것이지, 어찌 놀린 것이겠습니까. 

予曰 “凡有血氣者, 自黔首至于牛馬猪羊昆蟲螻蟻, 其貪生惡死之心, 未始不同, 豈大者獨惡死, 而小則不爾耶? 然則犬與蝨之死一也. 故擧以爲的對, 豈故相欺耶.      


당신이 그런 사실을 믿지 못한다면, 어찌하여 당신의 손가락들을 깨물어보지 않습니까. 유독 엄지손가락만 아프고, 나머지 손가락이라고 해서 아프지 않단 말입니까. 몸에 있는 것에는 크고 작음이 따로 없습니다. 고르게 피가 돌기 때문에 고통은 똑같은 것입니다. 하물며 각각 기운을 받은 것이라면 어찌하여 저것이라 하여 죽기를 싫어하며 이것이라 하여 죽기를 즐기겠습니까. 

子不信之, 盍齕爾之十指乎? 獨拇指痛, 而餘則否乎? 在一體之中, 無大小支節, 均有血肉. 故其痛則同. 況各受氣息者, 安有彼之惡死而此之樂乎?      


당신은 집에 돌아가 맑은 마음으로 고요한 중에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달팽이 더듬이 보기를 소뿔같이 하고 메추라기를 큰 붕새와 똑같이 볼 수 있게 된 후에 나는 비로소 당신과 함께 올바른 도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규보 「이와 개에 대한 이야기」

子退焉, 冥心靜慮, 視蝸角如牛角; 齊斥鷃爲大鵬. 然後吾方與之語道矣.” -李奎報 「虱犬說」          



위의 글에서처럼 28명의 목숨은 이와 같은 거였고, 1명의 목숨은 개와 같은 거였다. 한줌 재로 돌아가면 똑같은데도, 사람이 지닌 어떤 것에 따라 다르게 인식된다는 게 씁쓸하기까지 하다. 이러니 누구나 메추라기가 되기보다 붕새가 되려 아등바등 하는 걸 테고,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말하는 걸 거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결코 옳은 게 아니다. 사람의 목숨은 지위나 돈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규보도 존재의 가치를 다르게 판단하는 사람에게 당부하고 있다. 존재가 지닌 외적 가치에 상관없이 뭇 생명체는 모두 귀하다고 말이다. 그런 걸 모르겠으면, 고요한 가운데 명상하며 생명체의 본질을 깨달으라고 충고하고 있다. 

우리도 자본이란 논리로 사람을 분류하는 습성에 찌들어 있는 지도 모른다. 바로 그와 같은 습성을 벗어 생명의 본질을 볼 수 있을 때, 두 사태의 본질을 명확하게 볼 수 있다.                



▲ 무용총에 그려진 고구려 벽화에도 계급에 따라 사람의 크기가 다르게 그려져 있다. 그 시대엔 계급이, 이 시대엔 돈이 사람을 나눠놓다.




전태일 정신으로 용산참사’, ‘쌍용차 사태’ 넘어서기 

    

공장이 노동자를 왕따시키고 건물이 세입자를 왕따시키는 상황을 보았다면, 자본이 만들어낸 삶의 방식을 넘어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이쯤에서 우린 전태일 열사를 주목하게 된다. 

그는 배우지 못한 노동자 출신임에도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이유가 있다. 그건 자신을 되돌아 볼 줄 아는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보람 없이 하루를 보냈구나. 하루를 보내면서 아쉬움이 없다니, 내 정신이 이렇게 타락할 줄이야.            -1967. 2. 14 전태일 일기에서



▲ 전태일(1948~1970)


         

이 글을 읽고 찔리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보람 없이 하루’를 보내면서도 전혀 아쉬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우리들은 아쉬워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삶이란 그저 그런 거’라며 합리화하기까지 한다. 그런 현실이니 윗글이 뜬구름 같은 이야기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태일 열사는 보람 없이 보낸 하루를 아쉬워하지 않는 자신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란다. 단지 시간을 헛되이 보냈다는 사실에 놀라는 게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는 지금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자신의 정신 상태를 타락했다고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난하게 보낸 하루, 아무 생각 없이 보낸 하루에 대해 타락했다고 비판할 수 있는 경지는 어떤 경지란 말인가?

결국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생각하는 삶’의 단계를 넘어 ‘안주하려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으려는 치열함’의 단계까지 나가는 것이다. 그런 치열함으로 살 때, ‘자본’이 촘촘히 쳐놓은 그물망에 걸리지 않고 사람 향기 나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만들 수 있으리라 믿는다.



▲ 영화프로젝트 친구들과 '자본이 휩쓴 공간'을 돌고 왔다. 이 친구들에겐 어떤 의미일지?




목차     


프롤로그 평범한 삶을 꿈꾸며부속품이 되길 희망하다

평범한 삶이란 목표

궁하면 통한다

생각 없음이 죄다

세상을 열린 눈으로, 생각으로 보자

부속품이 되길 희망하는 자

돈이란 잣대로 획일화된 세상     


Part 1. 두 개의 문과 용산참사

용산개발 사업

어민을 거지로, 세입자를 때쟁이로

살기 위해 망루에 오르다

누굴 위한 국가기관인가?

신속한 출동 명령

‘테러 작전’을 수행하러 용산에 왔수다

『두 개의 문』에서 ‘두 개의 문’

용산사태를 묻기 위한 조처들

욕심이 화를 낳다

준비되지 않은 작전

화재를 막을 수도 있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Part 2. 쌍용차 사태용산을 거쳐 평택에 몰아친 자본의 습격

자본이 노동자를 ‘왕따’ 시키다

생각 없는 비판

문제의 원인

이유도 모른 채 일자리에서 잘리다

우리의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 점거농성에 돌입하다

‘테러진압’을 위해 용산을 거쳐, 평택에 왔수다

진압 우수 사례??

실패할 줄 알지만, 싸우다     


에필로그 자본이 쳐둔 그물망을 전태일 정신으로 넘기

박근혜의 목숨 〈 28명의 목숨

전태일 정신으로 ‘용산참사’, ‘쌍용차 사태’ 넘어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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