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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Jan 17. 2016

‘개똥’ 철학자 홍세화

한겨레 인터뷰 특강

홍세화씨는 어렸을 때 할아버지에게 ‘개똥 세 개’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걸 평생 가슴에 안고 살아왔다고 한다.  



 

79년에 망명하여 02년에 귀국했으니 23년만에 꿈에 그리던 한국땅을 밟을 수 있었다.



             

조금 먹기 위해  

   

‘개똥 세 개’라는 이야기는 이렇다.      



옛날에 서당선생이 삼 형제를 가르쳤겠다. 어느 날 서당선생이 삼 형제에게 차례대로 장래희망을 말해보라고 했겠다. 

맏형이 말하기를 “저는 커서 정승이 되고 싶습니다”고 하니 선생이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그럼 그렇지”하고 칭찬했겠다. 

둘째 형이 말하기를 “저는 커서 장군이 되고 싶습니다”고 했겠다. 이 말에 서당선생은 역시 흡족한 표정을 짓고 “그럼 그렇지, 사내대장부는 포부가 커야지” 했겠다.

막내에게 물으니 잠깐 생각하더니 “저는 장래희망은 그만두고 개똥 세 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했겠다.

표정이 언짢아진 서당선생이 “그건 왜?”하고 당연히 물을 수밖에.

막내가 말하기를 “저보다도 글 읽기를 싫어하는 맏형이 정승이 되겠다고 큰소리를 치니 개똥 한 개를 먹이고 싶고, 또 저보다도 겁쟁이인 둘째 형이 장군이 되겠다고 큰소리치니 또 개똥 한 개를 먹이고 싶고..........”

여기까지 말한 막내가 우물쭈물하니 서당선생이 일그러진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겠다. “그럼 마지막 한 개는?” 하고.     


여기까지 말씀하신 할아버님께선 이렇게 물으셨다.

“세화야, 막내가 뭐라고 말했겠니?” 하고.

나는 어린 나이에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거야 서당선생 먹으라고 했겠지요, 뭐.”

“왜 그러냐?”

“그거야 맏형과 둘째 형의 그 엉터리 같은 말을 듣고 좋아했으니까 그렇지요.”

“그래. 네 말이 옳다. 얘기는 거기서 끝나지. 그런데 만약 네가 그 막내였다면 그 말을 서당선생에게 할 수 있었겠느냐?”     


어렸던 나는 그때 말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자 할아버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화야, 네가 앞으로 그 말을 못 하게 되면 세 번째의 개똥은 네 차지라는 것을 잊지 마라.”     


나는 커가면서 세 번째의 개똥을 내가 먹어야 한다는 것을 자주 인정해야 했다.

내가 실존의 의미를, 그리고 리스먼의 자기지향을 생각할 때도 할아버님의 이 말씀이 항상 함께 있었다.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285~287p      



이 이야기를 들은 홍세화 어린이는 그 마지막 개똥을 ‘조금’ 먹기 위해 여태껏 긴장 속에서 삶을 살아왔다고 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안 먹기 위해’라고 할 것을, 홍세화씨는 ‘조금’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건 겸손하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 아니라, 진실하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게 아닐까. 누구든 삶을 살면서 실수할 때도 있고,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숨기거나 왜곡할 때도 있다. 그런데도 자신은 완벽한 사람인양 이야기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위선이지 않을까. ‘조금 먹기 위해’라고 표현하시는 걸 보고, 참 솔직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은 '선'을 위해 산다고 할 때, 홍세화는 '악'을 조금이라도 하지 않기 위해 산다고 말한다.




자유인과 자발적 복종인

     

자유인은 자신이 주체적인 선택을 하며 살 수 있는 인간인데 반해, 자발적 복종인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어디서 굴러 온지도 모르는 사고에 자신을 맞춰가며 사는 인간이다. 그런데 자발적 복종인이 더욱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러한 사고가 자신의 것인 줄만 알고 거기에 맞춰 산다는 점이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란 게 없이 태어난다. 하지만 어렸을 때 여러 상황 속에서 생각이 고착되고 커서는 그런 생각에 맞춰 자신을 틀 지우며 살아간다. 

“생각의 성질은 고집이다. 그렇기에 그 고집대로 산다”라는 말씀을 하신 건 바로 그 때문이리라.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재벌들이 만들어 놓은 욕망에 휩쓸려 최신 핸드폰을 욕망하거나 채널, 누이배똥 따위의 핸드백을 욕망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인양 착각하며 삶을 살다보니, 자신의 내면은 텅텅 비어가고 자신이 자기를 소외시키는 일까지 벌어진다.      






몸 자리

     

홍세화씨는 그래서 몸 자리가 중요하다고 이야기를 했다. 자리는 곧 궤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머문 자리를 궤적으로 표시하면 바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나의 궤적을 따라가 보자. 일터는 단재학교, 학교가 끝난 후엔 집에서 저녁을 먹고 합정동에 있는 출판인회의에 공부하러 간다. 이 궤적을 추적해보는 것만으로도 건빵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어떤 자리를 선택하여 그 곳에 몸 자리를 만드느냐에 따라 삶이 180° 달라지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주체와 상황 사이에 늘 긴장하며 살 수밖에 없다. 순간순간 나은 몸 자리를 선택하기 위해서 말이다.                



효창공원에 와서 나의 몸 자리에도 변동이 생겼다. 참 행복한 순간이다.




긴장은 순환이다 

    

긴장은 조임만을 말하지 않는다. 긴이 조임이라면 장은 풀어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치를 만들려 할 땐 맘껏 조일 수 있어야 하지만, 그렇게 할수록 자신은 세상에서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다. 진보주의자들이 흔히 듣는 비판인 ‘너는 현실을 몰라.’라는 말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세상과 만날 땐 풀어주고 세상의 가치에 몸을 맡길 수 있는 자세도 필요하다. 긴과 장은 늘 상보적인 관계에 있는 셈이다. 그렇기에 긴장은 조임만 있어서도, 풀음만 있어서도 안 된다.      




사느냐 죽느냐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 당연히 세상과 어느 정도 타협할 수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세상이 원하는 상에 모든 것을 맞춰서는 안 된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맞출 수 없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자아실현이란 자신 안에서 재정의된 사고에 기초하여 자신의 가능성을 맘껏 펼치는 것이다. 그럴 때 긴장하며 세상을 살 수 있고 상황에 구속되지 않는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런데도 세상이 만만치 않다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아실현을 하려 하지도 않으며 유보하기보다 아예 포기해 버린다. ‘그래도 살아야지’라는 핑계를 대며 현실에 순응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바로 그와 같은 핑계를 대는 우리에게 홍세화씨는 일침을 놓는다. 아무리 현실이란 핑계를 대고 싶을지라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나마 포기가 아닌 유보는 괜찮다. 그건 언제라도 돌아올 마음가짐이 있기 때문이며, 긴장의 끈을 아예 놓지 않겠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홍세화씨는 ‘시지프스의 바위’를 예로 들며, 아무리 바위가 다시 떨어질지라도 다시 끌어올리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건 실패할 줄 뻔히 알면서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용기다. 실패가 두려운가, 그렇다면 굴러 내려오는 돌에 깔아뭉개져도 괜찮다는 생각만 있으면 된다. 죽음이 두려운가, 그렇다면 긴장하고 돌을 받아낼 준비를 하자. 



내려올 테면 내려와라, 끝없이 받아줄 테니.



끝으로 인터뷰 특강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샹송이었다. 그 감격적인 순간을 동영상으로 맛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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