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인터뷰 특강 - 김진숙 2
한진중공업은 사상 최고의 영업 이익을 내고 있었다. 영업이익이 1700억이나 났지만 경영진은 174억원을 주식배당금으로 숨겼단다.
그리고 노동자와 함께 축하파티를 열긴 커녕 오히려 노동자를 구조조정 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회사가 어려워져 십시일반을 해야하는 상황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잘 나가는 회사가 노동자를 잘라야 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구조조정 발표가 나오던 날, 김진숙 위원장은 주위의 남자 노동자를 쭉 바라봤다고 한다. ‘설마 이 중에 한 명은 크레인에 올라가겠지’하는 기대어린 시선으로 말이다. 그런데 아무도 올라가지 않았고, 그래서 자신이 그곳에 올라가야만 했노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올라갈 때, 밧줄, 칼, 시너만을 챙겨서 올라갔다고 한다. 그 말을 웃는 얼굴로 하는데, 어떠한 말보다도 더 강인하게 들렸다.
그런 비장한 장면을 이야기 해놓고선, 곧바로 분노를 느끼는 청중에게 한 방 날리신다. “왜 내려오지 않고 309일을 버텼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것. 보통 사람이었으면 이런 저런 거대 담론을 끌어대며 자신의 초인적인(?) 행동을 한껏 띄울 것이다. 그런데 김진숙 위원장은 그러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한진중공업 앞에 신도브래뉴라는 아파트가 있는데, 그 곳 주민들은 부산경제가 망친다고 소리에 소리를 질러대고, ‘희망버스’가 오면 시민 중엔 희망은 무슨 절망버스가 오는 거라며 쌍욕을 해댔드랬습니다. 그래서 내려가면 맞아 죽을까봐 끝까지 버티게 된 거죠. 그런데 막상 내려갔더니, 지금까지 아무도 때리지 않더라구요.” 우리의 분노는 그 한 마디로 말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웃음과 즐거움, 그건 생각이 전환될 때 생기는 힘이지만 그런 힘이 없고서는 어떤 일이든 지속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적은 바로 내 주위에 있다. 내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나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이 날 비난하는 건 참을 수 있다. 하지만 날 아는 사람이, 같은 동지가 비난하거나 상처를 준다면, 그걸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김진숙 위원장에게 좌절을 안겨줬던 두 개의 페이스북 글은 노동 운동을 한 경험이 있던 사람에게서 왔다고 한다.
첫 째, “70년대엔 전태일 열사가 횃불이 됐고, 80년대엔 박종철 열사가 횃불이 됐습니다. 2011년엔 김진숙 열사가 횃불이 되어 세상을 바꿀 차례입니다.” 이 문자를 받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고 한다. 연대하여 힘을 북돋워주기보다 죽음으로 끝을 보라는 이야기이니 말이다. 그래서 고민 끝에 “너나 횃불이 되세요!”라고 보냈다고 한다.
둘 째, “크레인에서 500일을 채우면 국제 연대가 완성될 것입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시간을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국제연대라는 거대담론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버텨야 한다니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이야기다. 자신은 투쟁을 하고 싶지 않으면서, 이미 사지에 내몰린 사람에게 끝까지 가라고 보채는 것이다. 그런 억지에 김진숙 위원장은 욕을 하기보다 “그럼 저와 교대하시죠”라는 쿨한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크레인에 오를 때만해도 많은 조합원들의 지지가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합원들이 하나 둘 이탈했고 간부들도 도망을 갔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며 김진숙 위원장은 ‘노동자한테 약속은 목숨이다’라는 구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약속이란 파업에 동참하기로 했으면 배신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 한다는 약속이다. 그건 곧 ‘너와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라는 군가처럼 남이 대신해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투쟁한지 얼마 되지 않아 목숨과도 같은 약속은 물거품이 되고 간부마저 도망가고 말았다. 이 때 김진숙 위원장은 심하게 좌절했고 그만 둘까 하는 고민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절망의 시기에 색다른 희망의 불꽃이 타올랐다.
바로 ‘김여진과 날라리’가 온 것이다. 그들이 오기 전까지 파업 현장의 분위기는 숙연하고 늘 긴장감이 감돌았단다. 그러니 일반인들도 그 분위기에 맞춰 울고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김여진과 날라리는 울긴커녕 실컷 재밌게 놀다갔다는 것이다. 그네들은 김진숙 위원장이 파업에 힘겨울 때마다 찾아와서 신나게 놀다 갔고 그런 에너지가 전해져 버텨낼 수 있는 힘을 주었다고 한다. 그런 힘 때문인지 투쟁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김여진은 김진숙 위원장과 함께 했단다. 그들로 인해 한진중공업으로의 진입 장벽이 낮아지니 일반인들도 많이 찾아오게 되었고, 급기야 희망버스도 각지에서 올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08년도 당시의 촛불집회가 생각났다. 촛불집회도 처음엔 축제와 투쟁이 곁들여진 화합의 한마당이었다. 그런 긍정의 에너지 덕에 많은 사람들이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폭력시위로 성격이 변질되면서 일반인이 참여하기엔 부담스런 집회가 되고 말았다. 폭력시위는 짧은 시간에 즉각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는진 모르지만, 장시간 시위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은 없다.
309일 만에 김진숙 위원장은 끝내 땅을 밟았다.
첫 소감은 “어지러워요”라는 것. 크레인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24시간 바람에 흔들리니 익숙해지려면 2개월의 시간이 필요하단다. 막상 그런 흔들림에 익숙해진 상태에서 땅에 내려오니, 오히려 땅 멀미를 하게 된 것이다.
김진숙 위원장이 땅에 내려오는 순간, 우리들은 묘한 승리의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자본과 권력이 결탁된 골리앗을 짱돌 하나든 여러 다윗들이 함께 싸워 이긴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건 동학농민운동 때부터 시작되는 민초의 반란이 이제야 조금의 결실을 맺었음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힘을 모아 싸우면, 이길 수 있다. 그런 깨달음이 김진숙 위원장의 살아돌아옴을 통해 우리가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2011년의 그 날의 경험은 우리의 세포 안에 고스란히 새겨졌다.
Q
크레인 위에서 생활하면 대소변은 어떻게 처리하나요?
A
참 이런 질문은 대답하기가 난처해요. 뭐 깨끗한 이야기는 아니니깐. 우린 대소변을 봉지에 담아 놓습니다. 대소변 폭탄이야말로 우리들이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죠. 6월 27일부터 공권력이 투입됐고 그 이후부터는 용병들이 크레인을 에워쌌습니다. 용병들은 호시탐탐 어떻게 크레인을 점거할까 노리고 있었어요. 한 번씩 올라오려고 시도할 때마다 대소변 봉투를 들면, 용병들이 “아! 제발 그것만은……”이라며 오만상을 다 찌푸렸죠. 방패를 든 사람에게 대소변 폭탄을 던져봐요. 방패에 맞아 봉투가 찢어지는 순간, 앞 뒤 할 것이 한 번 팍 튀깁니다. 완벽한 대소변 처리 아니겠습니까^^
Q
이렇게 싸움일 길어질 것을 예상하고 올라갔나요?
A
우리나라 기자들은 참 창의성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습니다. 하나같이 모두 똑같은 질문만 하니깐요. 이 질문도 크레인에서 내려오자마자 주구장창 해오던 질문입니다. 내가 어떻게 앞날을 예상할 수 있었겠어요. 그저 올라가야 한다는 부채감 때문에 올라갔을 뿐이예요. 실제로 시간이 이렇게 길어질 걸 알고 올라갔다면,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Q
크레인 위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A
세상과의 단절감과 고립감이죠. 올라간 지 3일이 지나니 스마트폰 하나가 올라오대요. 처음엔 사용하는 법도 몰라 스마트폰을 올려준 친구에게 물어봐도 자신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여기저기 수소문 해보다가 3일 만에 트위터 사용법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기기였던 셈이죠. 그래서 참고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측에선 그런 것마저 용납할 수 없었나 봅니다. 크레인의 전원을 꺼서 배터리를 충전할 수 없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밥을 올릴 때 배터리를 올리지 못하도록 금속탐지기로 음식물마저 휘휘 저어놓곤 했드랬습니다. 그런 음식물을 받아먹어야 하니, 자존심이 얼마나 뭉개졌겠습니까. 그래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꼭 꼭 씹어 먹었죠.
용병들이 크래인을 포위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들어오려고 하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그 때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여기까지 오십니까?’하는 생각이 들며, 꼭 살아서 내려가 그 분들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목차
만나고 싶었다
고정관념 너머에 그 사람이 있다
고통스런 혁명은 혁명이 아니다
동지에 대한 마음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해고는 살인이다
죽음을 각오한 투쟁, 웃음을 간직한 투쟁
적은 내부에 있다
웃으며 끝까지 함께
승리의 체험, 그것이야말로 민중된 기쁨
몇 가지 질문과 대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