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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Jan 03. 2016

촘스키가 가르쳐준 현 교육의 거짓말과 극복하기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을 읽고 2

교육에 대해 고민하기로 했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고민해야 하는지, 또는 어디서부터 고민해야 하는지 막막할 수밖에 없다. 지금껏 받아왔던 교육을 전면 부정한다고 새로운 대안이 떠오를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현실 부정은 비관주의로 흐를 뿐이어서, 오히려 비극만 더 커지게 된다. 그렇기에 이럴 때일수록 선배들이 남긴 발자취를 잘 따라갈 필요가 있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선배들의 발자취를 따라갈 때 새로운 상상도 하게 될 것이다.           




교사가 가르쳐준 거짓말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우리나라=민주주의 사회’라는 공식을 교육받으며 자라왔고 능력에 따라 자본의 양이 다르며 사는 모습도 제각각인 귀족주의(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을 보며 자라왔다. 그와 같은 공식을 암기하고 현실을 대하며 민주주의와 귀족주의는 같은 것, 또는 같이 병행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여태껏 살아왔는데, 촘스키Noam Chomsky(1928~)는 그와 같은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고 꼬집어 준다. 그런 생각 자체가 학교 교육을 통해 가지게 된 잘못된 지식이라는 얘기다. 즉, 민주주의와 귀족주의는 같은 것도 아니며 병행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인데 그렇게 얘기를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 활발하게 활동 중이신 노암 촘스키 선생님.




귀족주의와 민주주의의 진실

     

제퍼슨Thomas Jefferson(1743~1826)은 “귀족주의자는 ‘국민을 두려워하고 불신하는 사람들로, 모든 힘을 국민에게서 빼앗아 더 높은 계급에게 몰아주려는 사람들’이다”라고 했으며 “민주주의자는 ‘국민과 모든 것을 함께 하면서 국민을 신뢰하고, 공존의 이익을 정직하고 안전하게 떠맡아줄 존재로서 국민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이라 얘기했다. 이 인용문만 놓고 보더라도 귀족주의와 민주주의가 어떤 점에서 다른지 알 수 있다. 

귀족주의에서의 국민은 기득권자들의 지위나 이익을 위해서만 필요한 존재이기에 그 시간 외엔 방관자傍觀者로 머물러야 한다. 국민들의 주체성으로 인한 간섭과 충돌은 그들의 안락한 지위 유지와, 쉽사리 얻게 되는 이익 증대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하여 민주주의에서는 국민을 함께 공존해야할 주체로 여기기에 자기들의 지위 유지보다는 함께 서는 것에, 자기들의 이익보다는 공동의 이익에 초점을 맞추어 일을 한다. 이런 차이점 때문에 민주주의와 귀족주의는 같이 공존할 수 없다는 얘기다.     



▲ 왼쪽에서 두 번째가 토머스 제퍼슨이다. 제3대 대통령으로 인권을 존중한 대통령이라고 한다.




티끌만한 작은 차이가 천리의 차이를 낳는다(毫釐之差 千里之繆) 

    

그런데 사실 위에서 얘기했던 민주주의, 귀족주의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느낄 수도 없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보니, 나와는 너무도 요원遙遠한 철학정도로 느껴졌다. 하지만 귀족주의자들로 인해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사회 양극화)이 더욱 고착화되고 대기업 상권이 골목까지 침투하며,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어 하루하루 힘들게 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기에 이 얘기를 흘려보낼 수만은 없었다. 이런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촘스키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며 결단을 요구하고 나선다.      



이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토머스 제퍼슨이 정의한 민주주의자가 될 수도 있고, 귀족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 후자의 길이 훨씬 쉬운 길이다. 제도권이 그에 대한 보상을 약속한 길이기 때문이다. 부와 특권과 권력이 보장된 길이기 때문에, 풍요한 보상을 당신에게 안겨 줄 수 있다. 당신이 이 길을 택한다고 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전자의 길, 제퍼슨이 정의한 민주주의자의 길은 투쟁, 혹은 패배의 길이다. 하지만 자신을 제외하고 모두를 잊어야 한다는 새로운 시대정신에 영합한 사람은 상상조차 못할 보상이 있는 길이다. 150년 전, 즉 로웰의 팩토리 걸과 로렌스의 직공들, 노동자들의 머릿속에 ‘새로운 시대정신’을 심어주려는 시도가 있었던 때와 지금의 상황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오늘날의 세계는 토마스 제퍼슨의 시대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세상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선택 가능성은 근본에서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촘스키가 던진 질문은 무척이나 예리하다. 나와 상관있네, 없네를 논하고 있을 때 촘스키는 그 선택이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고까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작은 선택이 현재의 나를 바꾸고 미래의 사회를 바꾼다. 그렇다면 나는 편한 길로 갈 것인가, 어렵고 힘든 길로 갈 것인가?      




선생이라는 존재를 의심하라

     

그런데 나에게 더욱 큰 충격을 안겨준 발언은 바로 뭣뭣주의의 선택 따위가 아니었다. 바로 우리의 의식 가운데 귀족주의를 당연시하게 만들고, 귀족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도록 입김을 불어넣어준 사람들이 흔히 스승이라 얘기하며 존경해 마지않았던 ‘교사’란 사실이다. 

서두에서도 잠깐 언급했다시피, 과목 하나하나에 귀족주의적인 사상을 숨겨놓고서 그걸 아이들에게 조금씩 주입한다. 그런 교육을 받는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떠한 선택의 여지도 없이 조금씩 귀족주의자들로 길러지고 있다. 

며칠 전에 언뜻 TV를 보니, 일제강점기에 여학교 교사였던 한 할머니께서 그 당시 제자들에게 정신대에 가도록 종용했다며 땅을 치고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이 나왔다. 이와 비슷한 예로 군사 독재시대에는 군부에 대한 저항이나 반항보다는 무조건적으로 충성하도록, 현시대에는 부당한 해고로 인한 파업을 노동자들의 불법적인 단체 행동으로 치부하도록, 불평등한 부의 편중이 사회시스템의 문제가 아닌 자신의 노력 부족으로 인정하도록 그렇게 교육해온 것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장면이 봉준호 감독의 영화인,『설국열차』에 잘 묘사되어 있다. 꼬리칸에서 앞칸으로 전진하며 기차라는 불평등한 사회를 전복하고자 하던 커티스 일행은 학교에 도착하게 된다. 그곳에서 행해지는 교육은 열차에서의 생활을 유지하게 하는 것들로 짜여 있다. 교사는 그런 신념을 교육과정으로 편성하여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교사가 가르치는 내용을 들어보면, 종교적인 세뇌처럼 느껴질 정도다.           



우리가 기차 밖으로 나가면 어떻게 되죠? 우리 모두 얼어 죽어요. 엔진이 만약 멈춘다면요? 우리 모두 죽어요. 그리고 누가 성스러운 엔진을 지키나요? 윌포드씨요!    


      

위와 같이 말하는 교사에겐 일말의 고민이나, 이게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인가 하는 생각 따윈 없다. 아마도 교사는 그게 진리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국가 권력자의 하수인 역할을 교사가 해온 것이다(이런 문제제기에서 대안학교 교사라 해서 자유롭진 못하다. 방심하는 순간에 귀족주의자들이 쳐놓은 그물망에 걸려들기 때문이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은 교사가 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그러한 교사 밑에 귀족주의적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그대로 사회에 배출되었기에 이 사회는 더욱 맹렬히 귀족주의적 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      



▲ 설국열차에 묘사된 교사야 말로 우리가 지금껏 만나온 교사들이다. 그게 옳다고 생각하기에 그대로 가르치면서도 고민도 없다.




흐릿함을 바라는 사회에 분명함으로

     

책을 읽으며 교육에 대한 맹신이나 순종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비판적 시각으로 교육이란 것을 보게 되니, 교육을 통해 강제되고 억압되었던 많은 예들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나 또한 교사가 되려고 맘먹지 않았다면, 이러한 교육의 폐해를 깨닫지 못했을 것이고, 누군가에게 여전히 귀족주의적 가치관을 주입시키고 있었을 것이다. 교육은 다른 사람에게 지식을 준다는 순기능만 있지 않고 권력이 사유화되도록 부추기거나, 이익이 한 곳에 쏠리는 것을 묵인(당연히 그러려니 하는 생각)하는 역기능도 있다. 지금이나마 이런 교육의 부조리에 눈을 뜨게 되어 다행이다. 

이젠 좀 더 나의 정치적 색깔(엘리트 중심주의 사회는 ‘정치는 소수만이 하는 것’이란 환상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다수의 사람들을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정치를 혐오하게 만들었다. ‘정치’라는 단어만 들어가도 거북한 반응을 보이거나 불순분자로 오인하게 만든 데엔, 몇몇이 쥐락펴락 할 수 있도록 정치에 대중이 관여하지 말고 현실에 안주하게 만드는 어떤 저의가 숨어있다)을 분명히 하고, 그에 따라 교육관을 새로이 정립하여 귀족주의자가 아닌 민주주의자가 되어 민주주의를 제대로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참 멀고도 험한 길이 보인다. 그래도 그게 맞는 길이라면 달려가야 한다.



▲ 구불구불해도 길은 길이다. 끝까지 가봐야만 알 수 있다. <함양군 오도재길>





목차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이 던져준 충격

당연하지 않은 당연함

가르침에 묶인 자

학교, 교사의 숨겨진 존재이유?

가르침에서 놓인 자, 그 사람이 교사다!     


촘스키가 가르쳐준 현 교육의 거짓말과 극복하기

교사가 가르쳐준 거짓말

귀족주의와 민주주의의 진실

티끌만한 작은 차이가 천리의 차이를 낳는다(毫釐之差 千里之繆)

선생이라는 존재를 의심하라

흐릿함을 바라는 사회에 분명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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