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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Jul 22. 2016

참을 수 없는 울분으로

'죽은 시인의 사회'를 읽다

‘죽은 시인의 사회’란 책은 정말 우연하게 보게 된 책이다. 『알라딘』이란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다. 거기에 ‘지니’가 나오는데 그 익살맞은 목소리가 얼마나 매력적이던지.                



▲ [알라딘]의 지니는 천연덕스럽고, 장난기 많은 캐릭터인데, 그걸 아주 잘 연기했다.





우연처럼 죽은 시인의 사회를 다시 접하다

     

그래서 누가 그 목소리를 내는지 찾아봤다. 그랬더니 로빈 윌리엄스Robin Williams(1951~2014)라지 않은가~ 그래서 그가 나온 영화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굿 윌 헌팅』이란 영화가 전면에 떴다. 이름을 한 번 정도는 들어본 영화다. 그 중 『죽은 시인의 사회』란 영화는 이미 예전에 친구가 DVD를 빌려줘서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끝까지 다 보진 못했다. 그 때 다른 할 일이 있던 탓에 거기에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로부터 한참이 지난 지금 다시 이렇게 제목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다시 보기로 맘먹은 거다. 하지만 막 찾아보니, 원작은 소설이라지 않은가? 그래서 영화를 먼저 보기보단 소설을 먼저 읽기로 했다.      



▲ 원작이 있다고 해서 원작을 꼭 보는 건 아니지만, 이번 같은 경우는 정말 우연한 경우였다.




일제고사를 거부한 키팅 같은 선생님들

     

보는 내내 머릿속을 스쳐가는 광경이 있었다. 일제고사에 대해 학생들의 권리를 존중해줬다고 해서 해직된 교사들의 모습이 스친 것이다. 

자신의 교육적 신념을 펼치기라도 하면, 그게 지배층의 생각과 다를 때엔 여지없이 잘릴 수도 있다. 이 땅에서 키팅 선생님의 모습은 더욱 요원하게 느껴진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자신의 기득권만 챙기면 되고 아이들에겐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일깨워줄 필요가 없이 국가의 하수인, 지배층의 하수인이 되도록 하기만 하면 된다. 

어쩌면 그게 학교란 제도가 생긴 태생적인 문제점인지 모르겠다. 학교는 국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우매한 국민을 만들기 위한 기관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누구도 알 수 있다. 그래서 학교는 정신병원, 교도소와 같은 기관으로 분류되곤 한다. 1950년대 미국과 2009년의 한국, 그 사이엔 59년이란 시간의 흐름이 있지만, 그 흐름이 무색할 정도로 둘의 모습은 똑같았다.      



▲ 일제고사에 대해 학생에게 선택권을 줬다는 이유로, 해직을 당했다.




부모의 욕망을 위해 자식을 옥죄다

     

학생은 학교의 명예를 위해, 부모의 희망을 위해 복종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일류대학교에 가서 사 짜 돌림의 직책을 갖게 되면 떵떵거리며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다’라는 세상이 유포한 거짓말을 누구나 믿고 있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으니 거짓말은 아닌 셈이다. 

하지만 그 안에 자신은 없다. 오로지 명예욕과 권력욕의 화신이 된 자신이란 껍질만 있을 뿐이다. 1%의 영광을 위해 99%는 암울한 현실을 묵인하며 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런 현실을 대하며 부모들은 “다 너를 위해 그러는 거야. 그래서 나도 이렇게 희생하고 있으니까. 아빠말 거역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갈 생각만 해!”라고 아이들을 채찍질한다. 아이의 꿈과 주체성을 짓밟으면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다 너를 위한 것’이란다. 



▲ 뻔히 안다. 하지만 그만 둘 수가 없다. 죄수의 딜레마처럼 '나만 안 해봐야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묻고 싶다. 정말 그런 밀어붙임 속엔 아버지의 욕망 같은 건 들어있지 않은 건가요???? 이쯤에서 페리(닐의 아버지)의 말을 한 번 들어보자.           



일단 의대를 졸업해라. 그러고 나서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늦지 않는다. 그 땐 네가 무슨 일을 하든 아무 상관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내가 하라는 대로 해! 

pp38


           

이 말이 나중에 그가 의사가 된 후에 지켜질진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에 반대하는 얘기를 했다간 작게는 한 대 맞을 각오를 해야 하고, 크게는 부모 자식간의 관계가 끊어질 각오를 해야 한다. 아주 깔끔하게(?) 명령조로 이야기 하고 있지 않은가! 아버지의 강압적인 지배 욕망이 펄펄 살아 꿈틀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 학부모가 어느 순간 학습매니저가 되었다. 그 이유는 모두 '다 너 잘 되라'는 것이다.




카르페디엠의 교육관이란 무엇인가?

     

키팅은 그렇게 희망 없이 살아가던 아이들에게 ‘Carpe Diem’라는 말을 하며 다가온다. 바로 오늘을 즐기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장미꽃 봉오리를 따려면 바로 지금이니/ 언제나 시간은 쉼 없이 흐르고 /오늘 이렇게 활짝 핀 꽃송이도/ 내일이면 시들어지고 말지어다.’라는 시를 들려준다. 

사람에겐 지금 이 순간만 있다는 얘기다. 내가 정작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걸 지금 당장 해야 한다는 소리다. 미루는 순간, 그건 더 이상 할 수 없는 게 되며 영원한 자기기만으로만 남는다. 

그래서 카르페디엠의 정신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이 순간을 긍정하며, 내가 정작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은지 알려는 투철한 자기애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키팅의 교육관은 ‘교육이란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184p)’이다. 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이 정말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지도해줬다. 남과 자신을 비교할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독특한 개성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도록 한 부분은 탁월했다. 그 깨우침 덕분에 닐은 자신이 연극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고 그걸 향해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매진할 수 있었다.      



▲ 작년 단재학교 학습발표회에서 연극이 끝나고 인사를 하는 아이들. 얼굴 가득 해냈다는 뿌듯함이 있다. 닐도 이랬을 거다.




카르페디엠의 수업은학생들의 억압된 열망을 끓어오르게 한다 

    

키팅의 이런 지도법은 학생들을 변화시켰다. 이런 변화가 좀 급작스런 감이 없지 않다. 누군가가 내 생각에 같이 공감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아는 까닭이다. 더욱이 자신의 모든 기반을 바꾸는 그런 일에 있어선 더욱 힘들다. 

그럼에도 이렇게 빨리 그들이 변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렇다, 그들도 이미 자신의 삶이 심하게 꼬여 있음을 눈치 채고 있었고 그것을 어떻게든 조금씩 변화시키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불씨는 있었던 셈이니, 거기에 바람을 더해주거나 기름을 껴 얹어만 준다면, 불은 어느새 활활 타오를 수 있는 거였다. 바로 키팅 선생님의 말이 기름 역할을 했음을 볼 수 있다. 



▲ 재작년에 도보여행을 갔었다. 아이들이 계획을 열심히 짜고 있다. 이렇게 나름의 여유로 바라볼 수 있었던 데엔 키팅의 가르침이 있다.



키팅의 지도 방법은 일정 부분 나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런 영감은 단재학교에서 교사로 생활하는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줘서 점차 아이들과 소통할 수 있게 했다. 왠지 키팅이 아이들에게 수업하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베토벤 바이러스』란 드라마에서 연주의 즐거움을 ‘화창한 야외에서 기쁨에 취해 연주하는 기쁨’으로 표현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수업이란 그 장면처럼 함께 빠져들어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대를 가지는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상적이고 감정적인 요소들이 비록 소설이기에, 또는 드라마이기에 가능했다 하더라도 그런 수업시간이 되길 꿈꾸며 늘 노력하는 교사라면 나쁘진 않을 것이다.      



▲ '넬라 판타지아'를 연주하며 단원들로 연주의 맛을 알게 되는 장면이다.




배후를 찾는 사회에선 진정성이란 없어진다

     

닐은 연극을 잘 마쳤지만,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로 자신의 꿈이 무너지게 되자 자살한다. 그 후에 어떻게 됐을까? 상식적으로는 그렇게 만든 아버지의 교육관을 탓해야하며 그렇게 아이들을 획일화의 늪에 빠뜨린 학교의 교육관이 욕을 먹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키팅 선생님이 쫓겨나게 된 것이다. 아이들의 말속에 그 사건의 내막이 잘 드러난다.           



“학교에서는 희생양이 필요할 거야.”  

“희생양?”  

“그래, 이런 사건이 생겼는데 학교 평판이 좋을 리 있겠니? 누군가 책임질 사람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을 거라고!”   

‘(토드의 독백) 닐의 죽음은 본인의 적성이나 꿈은 무시하고 억지로 갈 길을 강요했던 그의 아버지와 학교 공통의 책임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반성은커녕 책임을 떠넘길 사람을 물색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이다. 그건 닐 혼자만의 문제로 덮어둘 수는 없는, 어쩌면 그들 모두의 문제이기도 했기에 더욱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pp 258


     

사건이 발생하면 우린 너무도 익숙하게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을 찾기에 바쁘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 땐 선장과 선원만을, 학교 폭력이 발생했을 땐 가해자만을 처벌하려 한다. 

그건 지난 6월 29일 서울시민청에서 열린 ‘청소년 대안교육, 새로운 전환의 모색’이란 주제의 포럼에서 이현숙쌤이 “우리 사회는 분노해야 할 대상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주동자가 누구인가?’, ‘배후가 누구인가?’를 먼저 묻고 그 사람에게만 철퇴를 가하려 하지,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원인은 무엇인지 아무도 물으려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던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어느 사회, 어느 시대할 것 없이 이런 식의 문제 해결은 당연시 되어 왔던 것이다.                



▲ 진짜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지리하고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기 때문이다.




힘내라이 시대의 키팅이여

     

그렇기 때문에 키팅은 마땅한 명분이 없음에도 잘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교실에서 나가는 순간에 카메론을 뺀 나머지 ‘죽은 시인의 사회’ 멤버들은 목 놓아 울면서 그를 “선장님! 오 나의 선장님!”이라고 부른다. 그 장면을 읽는 순간, 온 몸에 닭살이 돋으며 절로 감동이 될 정도였다. 

일제고사를 치루며 학생들에게 ‘일제고사를 볼 수 있는 선택권’을 줬다는 이유로 8명의 선생님들이 해직되는 비운의 사건이 있었다. 교육당국의 대응은 웰튼 아카데미의 대응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왜 이런 사건이 발생했는지 면밀히 살펴보지 않았고 단순히 희생양만을 찾아, 사건의 본질을 흐려버렸다. 

그런데 그 선생님이 떠나가자 아이들은 덩달아 눈물을 흘렸고, 그 선생님이 주는 졸업장을 받기 위해 늦게까지 남기도 했다. 과연 어떤 교사가 진정 이 시대의 사표師表인 교사인지 교육당국에 물을 수밖에 없고, 교육의 의미란 무엇인지 물을 수밖에 없다. 



▲ 교육을 추구하면 내쳐지고, 현실을 따르면 살아남는다. 그게 과연 옳기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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