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건빵 Jul 28. 2016

영화 속 학교, 현실 속 학교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다 1

『죽은 시인의 사회』는 영화보다 책으로 먼저 접했고 독후감을 먼저 썼었다. 그러니 이젠 본격적으로 영화를 본 이야기를 나눌 차례다. 꼭 이렇게 말하고 나니 ‘일에도 순서가 있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전혀 그런 말은 아니다. 단지 나의 경우엔 책을 먼저 읽고 그 감흥으로 영화를 보게 되었기에, 책의 내용이 어떻게 영상으로 구현되었는지 확인하고 싶었고, 그게 어떤 울림을 나았는지 보고 싶었다.                



▲ 영화와 소설, 당연히 소설이 감정 표현이나 상황 묘사가 자세하다. 하지만 영화도 충분히 매력적이기에 같이 보면 금상첨화다.




영화가 소설보다 못하다?

     

소설의 내용을 영화한 경우, 우린 실망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활자로는 세밀한 감정의 표현이나 정황의 묘사가 가능하다. 문자라는 한계는 있지만, 영상으로 표현하는 것보다 더욱 세밀한 것까지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활자에 비해 한계가 많다. 더욱이 2시간 분량 안에 그 내용을 우겨넣다보면 줄거리가 토막 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의미 전달도 제대로 안 될 뿐 아니라, 원작의 내용도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 이준익 감독을 좋아하기에, 기대했던 영화였다. 하지만 원작을 잘 담지 못해 실망도 컸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건 원작이란 틀에 맞춰서 생각할 때에만 가능한 비판이다. 영화 자체만 놓고 본다면, 원작과는 다른 감독만의 독특한 해석도 담길 수 있고 다른 작품성도 충분히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여기서는 영화와 소설의 차이를 탐구하기보다 이 영화만이 가진 메시지를 나만의 방식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영화는 소설의 내용들을 잘 포착하여 영상으로 만들었다. 세밀한 감정 묘사 부분은 대부분 빠졌지만, 그럼에도 소설 한 편이 2시간 분량의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 원작에서 느낀 감흥을 그대로 느끼게 했다. 감독의 소설의 내용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그걸 영화화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평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에겐 소설을 보고 나서 영화를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이미 소설 속에 묘사된 세세한 감정 표현들이 영화 속의 장면과 어우러져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화를 보다 보면 영상 안의 인물이 나에게 지금 자신의 감정이 어떻다고 속삭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소설을 먼저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이라 할 수 있다.                



▲ 영화도 훌륭했다. 이제 본격적인 영화의 이야기 속으로.




전통이 올가미가 되다 

    

영화의 첫 장면은 입학식으로 시작한다. 이 학교의 4가지 교훈은 ‘전통, 명예, 규율, 최고’란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구호다. 이 영화의 배경은 1950년대 미국의 웰튼 아카데미라는 학교다. 작은 규모의 학교지만 그 중 75%가 아이비리그(우리나라로 치면 일류대에 해당)에 합격하였단다.

이런 사실만 보더라도 이 학교가 어떤 학교인지 뻔히 알 만하다. 획일적인 목표만을 당연시하고 학부모, 교사가 혼연일체 되어 그런 가치만을 설파하며 그걸 위해 맹목적으로 질주하게 하는 학교라는 것을 말이다.  



▲ 입학식이 종교의 예식을 뺨칠 정도로 엄숙하다.



이 학교의 첫째 교훈은 공교롭게도(?) ‘전통’이다. 전통을 중시하는 게 왜 문제가 되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좋은 의미로 ‘전통을 계승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의 전공인 한문교육과의 교육과정 내용체계에도 ‘전통문화를 바르게 이해하고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키려는 태도를 지닌다’라고 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악용될 때 문제가 된다. 과거의 유산이라 하여 모두 다 옳은 건 아니다. 그런데 그 모든 걸 전통사상이라 포장하며 맹목적으로 지키려 한다면 그건 얼마나 큰 잘못일까. 조선시대엔 유학 해설서 중에 주희의 학설이 정설로 굳어졌고 교조화되었다. 그래서 주희의 해석 외에 왕양명의 해석을 받아들인 사람이거나, 전혀 다른 해석을 하는 사람을 ‘사문난적斯文亂賊’이란 주홍글씨를 새기고 혹독하게 처벌했다. 그 결과 조선은 조금씩 침몰해갈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와 같이 이 학교의 전통이란 것도, ‘학교의 가르침에 고분고분하고 획일적인 목표에 무조건 따르는 것’에 다름 아니었던 거다. 거기에 반기라도 드는 학생이 있으면 그는 가차 없이 ‘퇴학’을 당하게 된다. 학생을 내쫓아내기 위한 명분으로 사용되는 ‘전통!’, 그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 전통이 있는 학교답게, 첫째 교훈도 전통이다. 전통이 나쁜 건 결코 아니다. 그걸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문제다




학교라는 이름의 감옥, 학교라는 이름의 획일화 기구

     

이제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된다. 그런데 첫 수업부터 우리가 어디서 많이 보던 광경이 나온다. 무작정 시험에 나오는 것을 추려서 반복 연습을 시키는가 하면, 많은 분량의 숙제를 내주고 그걸 하지 않으면 1점을 감점하겠다고 윽박지른다.





이와 같은 단순한 수업, 겁주기 수업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다. 바로 이 학교에선 대입 위주의 교육을 한다는 것과 그것만 잘 따라오면 일류대학 입학은 떼어 놓은 당상이기 때문이다. 고로, ‘내가 행하는 어떠한 불합리한 것이라도 믿고 따르라, 그리하면 너에게 대학 합격의 명예가 뒤따르리라’라는 성경적 패러디가 가능하다.

카메라의 초점이 교사에게서 학생으로 바뀐다. 학생들은 꿀 먹은 벙어리인양, 원래부터 조용한 사람인양 정자세로 걸상에 앉아 있다. 교사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칠 새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적기에만 바쁘다. 교사의 가르침이 선포되는 순간, 그건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할 것이 아니라, 절대 진리이기에 무작정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 금방 전까지 재잘거리며 떠들던 아이들이 교사가 교실에 들어오는 발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조용해졌다.



이 모습 또한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이지 않은가? 경직되어 있고 긴장하고 있는 그 모습. 우리는 이들이 가장 활기차며 솟구치는 에너지에 몸 둘 바를 모르는 청소년시기임을 잊어선 안 된다. 그런 그들의 눈에 활기는 보이지 않는다. 잔뜩 주눅 들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그저 교사의 처분을 바라고 있다. 우린 이렇게 거대 권력에 순응하는 인간으로 길들여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장면은 결코 과거의 장면이거나 다른 나라의 장면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른 게 있다면 교실에 여학생이 있다는 것 정도 되겠다. 50년이란 시간의 격차가 있고 태평양의 거리만큼이나 멀찍이 떨어져 있지만, 영화의 장면은 그런 세월과 거리를 무색하게 만든다. 그만큼 50년 전의 미국 학교와 지금의 한국 학교는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이걸 과연 학교의 특성이라 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서양식 교육모델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 할 것인가?               



▲ 구글지도의 태평양. 이다지도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린 왜 이렇게 닮은 것일까?




학교라는 감옥에서 탈출하는 법 

    

학교의 태생 자체가 근대의 출현과 맞물려 있다. 산업혁명 이후에 수많은 일꾼이 필요해짐에 따라 효율적으로 한 공간에 아이들을 몰아넣고 짧은 시간 내에 지식을 습득하도록, 정해진 시간에 생체리듬을 맞추도록 학교는 만들어졌다. 그러니 한 명의 교사가 50명 이상의 학생을 통제하고 가르치는 게 가능했다. 교사는 기계에 프로그램을 입력하듯 학생들에게 국가가 인정한 지식만을 내뱉고 학생들은 그 지식을 무작정 암기하기만 하면 됐으며, 40~50분 단위로 날카롭게 분절된 학과 시간에 맞춰 움직이기만 하면 됐다.



▲ 학교는 아이들을 순응적인 존재로 만드는 곳이었다.



이럴 때 교사의 역할이란 시간을 엄수하도록, 가르쳐진 지식은 비판하지 않고 무작정 받아들이도록 채찍질을 하는 것이다. 말이 좋아서 교사이지, 그저 말이 달리도록 채찍질을 해대는 마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니 영화에서 등장하는 교사들에게서도 바로 이런 교사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고, 그건 우리에게도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처럼 보통의 교사들이 스스로의 권위를 앞세워 학생들을 억누르고 자신의 말을 무작정 따르는 수동적인 인간으로 만들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그 때,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교사상을 지닌 사람이 바람처럼 등장한다. 그가 처음에 학생들을 만나는 과정이야말로 그가 지닌 개성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위압적인 표정과 근엄한 자세로 앞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서는 교사들과는 달리, 그는 휘파람을 가늘게 불며 앞문으로 들어와 교실을 가로지르며 뒷문으로 나가버렸다. 그 순간 학생들은 생뚱맞은 교사의 태도에 당황해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뒷문으로 살짝 얼굴을 내밀고 학생들을 바라보며, “Come On!”이라 외쳤다. 한껏 짓눌린 학생들에게 교사의 휘파람, 그리고 “어서 와”라는 말은 억눌리고 감춰진 생기를 불러일으키게 했다. 사람은 깊은 호기심을 느낄 때 눈이 반짝 거린다고 하는데, 이 순간 학생들은 그 교사에게 깊은 호기심을 느끼게 됐던 것이다.



▲ 휘파람을 불며 학생들을 지나가는 키팅 선생님. 그 뒤로 학생들의 당황한 표정이 보인다.



그가 바로 이 학교의 졸업생이자 새롭게 부임하게 된 존 키팅 선생님이다. 그의 남다른 교육 철학은 ‘배움이 사리진 학교에서 배움의 열정을 일으키는 것’이라 할 만 한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후기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기로 하겠다.



▲ 학생들은 키팅 선생님의 행동에 당황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엔 미소가 살아난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진은 모방품인가? 예술품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