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박동섭의 ‘트위스트 교육학’ - 신발 떨어뜨리는 사람, 세 번째
숨 가쁘게 2강의 세 번째 후기까지 달려왔다. 이번 후기에선 2강의 제목인 ‘신발 떨어뜨리는 사람과 줍는 사람’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되며, 이 얘기를 통해 어떨 때 사람은 배우게 되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배우기 위해서는 당연히 무언가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르쳐 줄까? 그건 바로 ‘아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러니 교사가 되기 위해서 4년간 사범대, 교대에서 자신의 전공을 열심히 공부하여, 임용시험을 통해 ‘교사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국가로부터 승인받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아이들과 만나 가르칠 수 있고 아이들은 배우게 된다.
이 때엔 당연히 ‘아는 것만 가르칠 수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그건 반대로 말해 ‘알지 못하면 가르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이미 그와 같이 정해져 있으니 이런 상황에서 ‘아는 자=교사’, ‘모르는 자=학생’의 관계가 성립되어, 가르침과 배움은 일방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나 또한 이런 환경 속에서 자라며 배워 왔기 때문에, 한 번도 이런 구조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고, 배움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없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배워야 할 것들은 당연히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의무적으로 배워야만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동섭쌤은 ‘트위스트 교육학’ 강의를 통해 당연하게 굳어버린, 그래서 생각이 전혀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며, 사정없이 흔든다. 지금껏 ‘모르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 배우는 게 배움의 기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런 관념을 사정없이 뒤집어엎어 ‘오해야말로 배움의 기본’이라 외치기 때문이다. 얼핏 들어서는 ‘어디서 약을 팔아?’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황당한 말이지만, 그럼에도 귀가 기울여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량의 일화를 알아야 한다.
장량은 중국 한韓나라 재상의 아들로 그 당시로 보면 지금의 재벌에 비견될 만한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진秦나라가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통일하므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자, 장량은 진시황을 죽일 계획을 세운다. 진시황이 행차를 할 때 철퇴를 던져 진시황의 수레를 파괴하고 암살하려 했지만, 그가 던진 철퇴는 진시황의 수레가 아닌 다른 수레에 맞아 암살은 실패하고 만다. 그는 미친 듯이 도망가 신분을 숨기고 구석으로 숨어든다.
장량은 그곳에서 수련을 하고 있었는데, 이 때 황석공이라는 노인이 그 모습을 기특하게 여겨 ‘태공망비전’이란 병법을 알려주겠다고 제안한다. 이에 장량은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노인은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시간은 흘러가는데도 노인은 그 어떤 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 초조해질 때, 노인은 멀리서부터 말을 타고 오더니 장량 앞에서 오른쪽 발의 신발을 떨어뜨린다. 그러면서 “신겨~”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화는 치밀어 오르지만, 장량은 화를 내지 않고 신발을 신겼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고 노인은 저번처럼 말을 타고 오더니, 장량 앞에서 양쪽발의 신발을 모두 떨어뜨리며 “신겨!”라고 명령한다. 황당하고 어이없지만 장량은 허리를 숙여 신발을 주워 정성껏 신겼다.
그런데 바로 이 때 의외의 상황이 펼쳐진다. 그 순간 무언가 깊게 깨우쳤고, 그로 인해 황석공이 가르쳐주는 태공망비전을 온전히 전수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앞에서부터 ‘오해야말로 배움의 기본’이라는 말을 했으니, 뭔가 그럴 듯한, 그래서 읽는 순간 감동의 물결이 넘실되는 그런 이야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위의 이야기는 뭔가 확실해지며 듣는 순간 ‘아하!’하며 깨우치게 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끝까지 들었지만 ‘나는 누구? 그리고 여긴 어디?’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황당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러니 ‘내가 고작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를 들으려고 아까운 시간 낭비했나?’라는 헛헛함이 느껴지는 것이다.
만약 그런 불쾌감과 헛헛함이 느껴졌다면, 이 이야기는 이미 반절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오해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말을 듣는 순간 ‘바로 이해되는 얘기네’라고 생각되거나, ‘뻔한 얘기잖아’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건 이해될 정도로 쉽게 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아니어도 누구나 할 법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듣는 순간 ‘이건 뭐지?’라는 의구심이 피어오르며, 급기야 모든 얘기가 끝났음에도 ‘왜 이해가 전혀 안 되냐?’라고 한다면, 그건 지금 나의 도량형으로는 ‘아직은’ 해석할 수 없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동섭쌤은 “자신이 가진 도량형이 10㎝의 자일 경우, 10㎝가 넘는 물건의 크기를 젤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20㎝가 되는 물건이 다가올 경우 허걱하고 놀라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 강의를 들으며 자신의 지적도량형을 키우게 된다면, 더 이상 ‘비고츠키를 배우면 어디에 도움이 됩니까?’나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자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와 같은 질문은 하지 않게 됩니다.”라고 말을 한 것이다.
동섭쌤은 여러 곳에서 강의를 하는데, 그 때마다 사람들에게 오해와 억측, 그리고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었나 보다. 그러다 보니 강의가 끝나고 질문시간에 단골로 나오는 얘기가 바로 “비고츠키를 배우면 어디에 도움이 됩니까?”와 “그래서 현실에선 어떻게 적용해야 하나요?”라는 것이다. 그 때 동섭쌤은 당황하지 않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위와 같은 대답을 한다고 한다. 강의를 통해 한 번에 이해가 되지 않아 혼란스러워졌다면, 그 내용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도량형이 커지고, 새로운 어휘꾸러미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이런 질문은 하지 않게 되고, 말하는 본새도 바뀐다고 한다.
그처럼 장량의 일화를 들었을 때 황당했다면, 그건 지금 나의 도량형으로는 도무지 젤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황당하게 느껴지고 불쾌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여기서 실망하며 여기서 돌아선다면, 나의 도량형은 그대로 유지될 것이고, 여전히 다른 얘기들은 헛소리로만 들릴 것이다. 그러니 불쾌하더라도 참아가며 다음 얘기에 신경을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도대체 장량이 갑자기 왜 깨우쳤다는 건지, 깨우친 내용은 뭔지, 그리고 어떻게 그런 상황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이런 것들을 알기 위해서는 장량의 상황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한다. 장량은 재상의 아들로 태어나 자란 인물이다. 비록 한나라가 망하며 집안이 무너져 내렸을지라도, 자신의 프라이드는 여전히 높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볼품도 없고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황석공이라는 노인이 제안을 하자 선뜻 받아들인 것이다.
이런 상황이 상식으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이런 경우 대부분은 “어이 노친네. 어디서 굴러먹다 온 뼈다귀인지는 모르지만, 그냥 갈 길 가슈~”라고 불쾌한 듯 말할 것이다. 아무리 지금 자신의 집안이 폭삭 주저앉았을지라도, 아무에게나 동정을 사고 싶진 않다고 생각할 테니 말이다. 더욱이 그 노인에 대해 아는 건 하나도 없고 겉으로 보기엔 그리 대단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날 얼마나 하찮은 놈팽이 취급하면 저런 볼품없는 노인이 이런 말을 다 하냐’라고 화가 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장량은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일반적인 흐름을 깨버렸다. 섞은 동아줄이라도 잡는다는 말처럼 자신의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그런 볼품없는 사람에게라도 의존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삶의 극단에 내몰린 사람이 마지막 발악을 하듯 그냥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노인의 겉으론 보이지 않는 아우라를 감지했기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것은 배우겠다는 각오를 자신이 했으며, 자신이 그 길로 나섰다는 사실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의 배움의 과정을 생각해보면 완전히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아이들이 태어나 처음으로 배우게 되는 계기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익혀야 할 것들을 먼저 배워야 한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한글을 조금이라도 일찍 배워야 하고, 셈하는 법을 남들보다 일찍 깨우쳐야 하고, 혀가 굳기 전에 영어를 원어민 정도로 발음 연습을 해야 한다. 아이들은 한 번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배움의 장에 내몰리고 학습하는 기계처럼 주어진 과제들을 반복적으로 익혀나가게 되어 있다. 누군가의 의지에 밀려 배움의 장에 들어서는 게, 한국사회에선 일반적인 배움의 첫 단계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장량은 배우고 싶다는 자신의 의지로 배움의 장에 들어섰으니 완벽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은 차이가 이후로 벌어지는 상황을 대하는 태도에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배움의 첫 째 조건은 자발성이라 할 수 있고, 때로는 ‘왜 배우려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럼에도 배우고 싶다?’라 생각이 들 정도로 역동적인 배움의 장에 휘말려드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배우겠다고 달려들었지만, 노인은 도무지 장량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질 않는다. 가타부타 어떤 말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말 한 마디 없이 거의 장량을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처럼 ‘투자-산출’을 그대로 교육에 적용하여 ‘학습-성적’으로 이어지는 단순한 과정을 원하는 사회에선 절대로 볼 수 없는 광경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배움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런 과정들이야말로 배움의 역동성을 가장 적절히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짧은 몇 마디 말로 끝낼 수 있는 게 아니기에, 다음 후기에 이어서 하기로 하겠다. 다음 후기에선 장량은 그렇게 방치된 상황에서 어떤 배움의 과정을 거치고 있었는지, 그리고 신발을 주워서 신기며 왜 깨우치게 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제 2강 후기도 어느덧 칠부능선을 넘어가고 있다. 그러니 지치더라도, 힘들더라도 꾹 참고 오르고 또 오르며 동섭레스트이 제2캠프에 도달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