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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May 03. 2016

배움이란 무엇인가? 2

9. 박동섭의 ‘트위스트 교육학’ - 신발 떨어뜨리는 사람, 네 번째

동섭쌤의 강의를 통해 우린 여태껏 너무도 잘 안다고 생각했던 ‘배움’에 대해 낯설게 보기를 하고 있다. 낯설다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는 얘기고, 그만큼 어색하게 느껴진다는 얘기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 ‘어색하다’는 느낌에만 집중할 경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어색함을 맛들이고, 이질적인 느낌을 받아들이며 나아가다 보면, 비로소 배움의 본질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 동섭쌤은 배움의 본질을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잣대나 도량형에 기초한 목표가 얼마나 빈약하고 협소하고 얄팍하고 그리고 깊이가 없는 것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이라 정의하며, 배워간다는 건 ‘내가 배우는 시점에 갖고 있었던 배움의 목표의 삭제, 해체, 새로운 목표의 구축’이라 말했다. 이처럼 단순히 헛소리라고 치부하지 말고 지금으로선 상상도 하지 못한 새로운 목표를 구축할 수 있도록 힘을 내며 가보는 수밖에 없다.                



▲ 배움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지금 우린 그 여정을 힘차게 가고 있다.




고민이 사치가 된 시대엔 장량이 나올 수 없다

     

이전 후기에서 우린 장량의 일화를 살펴보고 있었다. 장량은 황석공이 ‘태공망비전 병법’을 알려준다는 말에 동의하여 배움의 여정을 떠났다. 하지만 황석공은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다. 하루, 이틀, 한 주, 한 달. 아마도 시간이 지나가는 만큼 장량의 속은 타들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이쯤 되면 ‘이거 괜히 시간 낭비하는 거 아냐?’, ‘내가 허무맹랑한 말에 속았나?’하는 온갖 잡념이 밀려들게 마련이다. 이 때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죽느냐 사느냐’에 비견될 만한, ‘기다려 보느냐, 떠나느냐’라 할 수 있다. 



▲ 장량의 일화는 배움에 대한 생각을 근본부터 바꿔야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여러분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나의 경우는 당연히 ‘나름 기다릴 만큼 기다렸고,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하여, 미련 없이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장량은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 거야’라는 기대가 있었는지, 떠나지 않고 무작정 기다렸다.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지만, 이건 어찌 보면 장량이 황석공에게 배우겠다고 하던 시점부터 우리의 상식을 위배하고 있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장량은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는 황석공 곁에 남아 있으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고민의 시간은 ‘제자로서의 장량’을 한껏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밑에서 제대로 살펴보기로 하고, 지금은 이런 고민의 시간 자체가 사라진 세태에 대해 짚어보도록 하자. 우린 더 이상 고민하는 시간을 봐주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세상은 급변하고 있기 때문에 고민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주워진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그래서 아이가 국영수 공부 외에 다른 것을 할라치면 부모님은 “그런 씨잘데기 없는 생각 고만혀고, 하던 공부나 마저 혀!”라고 강하게 말하게 되었고, 아이들도 그런 부모의 말에 토를 달기보다 따르게 된 것이다. 고민이 깊으면 깊을수록 삶은 더욱 풍요로워지고, 행동은 더욱 강단 있어짐에도, 고민할 시간 자체를 시간 낭비라 생각하게 되었다. 



▲  영화 [취권]을 보더라도, 막상 제자로 삼겠다고 데려가지만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는 스승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시대에 장량처럼 고민하고 ‘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하고 싶다’는 것을 추구하는 건, 더 이상 볼 수 없는 풍경이 되고 말았다. 결과를 알기 때문에 할 수 있고, 결과를 알 수 없는 건 할 맘조차 생기지 않은 사회가 된 것이다. 이런 모습은 요즘 아이들에게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학교에서 목공수업, 아카펠라 수업, 기타 수업 등을 하지만, 아이들은 그때마다 “이런 걸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며, 시간 낭비라고만 생각한다. 수능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공부 외엔 모두 다 쓸데없는 것이라 치부하기 때문이다.                



▲ 목공 수업 중인 아이들. 우린 더 이상 가치를 모르면서 배우는 경우는 없게 되었다.




배우는 자는 욕망하는 자다

     

그렇다면 장량은 도대체 왜 떠나지 않았던 것일까? 그건 장량이 ‘배우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비나스Emmanuel Levinas(1906~1995)는 욕망을 ‘외부로부터 도래하는 것에 대해서 개방상태가 되는 것’이라 정의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욕망이란 개념과 너무도 다르기에, 레비나스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레비나스는 욕구와 욕망을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욕구는 본래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상태로, 원상회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욕구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욕망은 자신이 소유한 것으로는 절대로 채워지지 않을 것을 아는 감정이라고 한다. 그래서 ‘무언가 알 수 없는 결핍감’을 강하게 느끼며, 채울 수는 없지만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다. 욕구와 욕망을 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욕구란 만족을 추구하기 위해 채우는 것이지만, 욕망이란 애초에 채워질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채우려 한다는 점이 다르다. 욕구는 완벽함(만족의 원상태)을 추구하고, 욕망은 불완전함(불충족의 확신)을 추구하며 나간다. 

장량이 노인을 떠나지 않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이유는 황석공을 통해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강한 욕망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게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것일지라도, 그 미묘한 끌림과 흐릿한 확신이 그를 붙잡아뒀던 것이다. 카페 헤세이티의 주인장인 황경민 시인은 이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설렌다. 너를 알아서가 아니라 너를 모르기 때문에, 삶을 알아서가 아니라 삶의 향방을 모르기 때문에. 모름이 앎의 근원, 모름이 너를 만나는 이유다. 모름이 깊어야만 앎의 좁은 문이 열린다”고 표현했다. 이처럼 강렬한 욕망에 대한 찬사가 또 있을까 싶게 멋진 아포리즘을 구사했다. 이처럼 장량은 그 모름이란 욕망에 투신하며 그 순간을 버티어내고 있었다.                



▲ 황경민 시인의 강렬한 아포리즘.




오해가 나를 자유케 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 날 황석공은 말을 타고 달려오더니, 장량 앞에 이르자마자 신발을 떨어뜨리며 신기라고 시킨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닌, 두 번이나 그와 같은 상황을 만들어 시켜 먹은 것이다. 이쯤 되면 ‘역시 내가 헛 기대를 했구나’하는 마음으로 한 바가지 욕을 퍼부어주고 떠날 만도 하다. 하지만 그는 울컥 올라오는 화를 쓸어 담으며 신발을 줍고 그 신발을 노인의 발에 신겨주었다. 그런데 두 번의 반복된 행위를 통해 장량은 깊은 깨달음에 이르게 됐다는 것이다. 과연 그는 무엇을 깨닫게 되었을까?



▲ 떨어진 신발을 주워서 신기는 행위. 거기엔 배움의 의미가 숨어 있다. 그건 스승을 믿고 오해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처음부터 장량은 황석공을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스승이 무엇을 가르쳐주지 않을 때에도 그의 행동에는 ‘어떤 가르침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젠 신발을 떨어뜨리고 신기게 하는 반복된 행위를 하고 있지 않은가. 이 때 장량은 ‘스승의 그런 행동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가르침이 있다’고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스승이 말하지 않는 이상 그게 뭔지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그것 또한 자신이 행동을 하는 중에 깨달아야 할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 에듀니티 강의실엔 배움의 파토스가 넘실댄다. 어렵지만, 그래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게 많지만, 그럼에도 그럼에도 마냥 좋다.



그런 생각 끝에 두 번째로 신발을 신기던 순간에, 드디어 배움에 대한 비의秘義를 깨우치게 된다. 그건 다름 아닌 ‘스승에 대한 오해’였던 것이다. ‘스승이 이런 행동을 반복적으로 나에게 했다면, 그것엔 의미가 있다’는 오해에서 고민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장량은 그 의미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두 번째 신발을 신기며 지금까지 자신이 스승의 행동을 어떻게든 해석하려 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을 것이다. 즉, 자신이 그 과정 속에서 혼자 묻고 혼자 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우치며, 그것이야말로 배움의 자세라는 점을 간파했다는 것이다. 

앞에서부터 우린 ‘오해야말로 배움의 기본’이라 했는데, 이젠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오해할 때 우린 생각을 확장할 수 있게 되며, 지금껏 내가 가진 도량형으로는 미처 알 수 없던 상황에 투신하게 된다. 그 상황에 빠져 들어 스승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하게 되면서, 배움의 본질을 깨우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동섭쌤은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교육 시킬 수밖에 없다”라는 말을 한 것이다. 그건 누군가 전지전능한 교육자가 있어서 망나니를 범생이로 탈바꿈 시키고, 의욕이 없는 사람을 의욕이 넘치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안에 들어 있는 앎에 대한 선천적인 욕망을 따라 갈 수 있도록 지켜봐 주는 것일 뿐이니 말이다.                



▲ 춥지 않은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강의가 끝나고 가는 길은 벅찬 감흥 같은 게 느껴진다.




박동섭과 박지원과 김영민의 다르지만 같은 말 

    

배움이 세상에 횡행하고 있고, 누구 할 것 없이 교육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세상일수록 오히려 편견과 강박에 갇혀 오히려 진정한 배움에 대해선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동섭쌤은 이번 강의를 통해 그런 것들을 다시 돌아볼 수 있도록 한 것이리라. 

이런 동섭쌤의 이야기는 일견 연암이 얘기하는 ‘사이의 이야기’와 닮아 보인다. 연암은 열하로 가기 위해 강을 건널 때 철학적인 사유를 거듭하며, 진정한 이야기란 하나의 단어로 규정된 것, 명사로 굳어져 누구도 감히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과 당연하지 않는 것 사이에 유유히 흐르는 흐름이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강은 바로 저들과 우리 사이에 경계를 만드는 곳일세.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이란 말이지. 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 또한 저 물과 언덕과 같다네. 길이란 다른 데서 찾을 게 아니라 바로 이 사이에 있는 것이지. 

此江乃彼我交界處也. 非岸則水. 凡天下民彛物則, 如水之際岸. 道不他求, 卽在其際. 『熱河日記』 「渡江錄」


           

연암의 ‘사이의 이야기’는 동섭쌤이 말한 ‘오해야말로 배움의 근본’이란 말과, 김영민쌤의 ‘명사적 사고에서 동사적 사고로’와 같은 말과 통한다. 그건 너무 딱딱하게 굳어져 죽어버린 모든 개념이나 생각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어진 삶을 축복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 사이에 머물 수 있는 용기. 사이야말로 모든 가능성이 샘솟는 곳이자, 모든 가능성이 닫힌 곳이기도 하다. 과연 우린 사이에서 배울 수 있을까?



이로써 우린 동섭레스트의 제2캠프에 도착했다. 갈수록 지적 산소는 희박해져서 ‘이렇게 다른 생각을 한들 세상은 늘 똑같은데 무슨 소용이야?’라는 비관론이 나를 덮쳐올 것이고, 내 한 몸 추스르기 힘들 정도가 되어 ‘아무런 고민 없이 살던 때로 돌아갈까?’하는 회의론이 엄습해올 테지만, 지금과 같이 ‘힘들긴 해도, 고민이 되긴 해도 왠지 모르게 배우고 싶고 왠지 모르게 계속 오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오르면 된다. 그 뿐이다. 



▲ 드디어 제2캠프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모두 수고 정말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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