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박동섭의 ‘트위스트 교육학’ -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 첫 번째
이제 ‘트위스트 교육학’ 강의도 반환점에 들어서고 있다. 오늘은 어찌 보면 딱 반환점을 찍는 날이라 할 수 있다.
반환점이란 말은 단순히 일직선으로 달려 어느 한 지점을 찍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는 말이 아니다. 처음에 시작할 때만해도 반환점을 찍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반환점을 찍고 돌아서는 순간 나의 생각, 삶의 양식이 모두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시 처음 지점으로 돌아간다 해도 그 전의 나와는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반환점에 대한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센이 저주에 걸린 하쿠를 구하기 위해 제니바의 집으로 가는 장면을 떠올리면 쉽다.
센에겐 제니바의 집에 갈 수만 있고 돌아올 수는 없는 ‘One Way Ticket’이 있었다. 이 티켓은 가마할아범이 센의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고 안쓰러운 마음에 준 것이다. 당연히 갈 수는 있지만, 돌아올 수는 없기에 엄청난 결단을 요구한다. 그건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영화 첫 장면에서 나오던 치히로였다면, 절대 그런 무모한 짓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목욕탕에서 온갖 경험을 하며, 여러 돌파구를 마련하여 여기까지 달려온 그였기에 예전처럼 무기력하게 앉아 있진 않았다. 그래서 고민을 하지도 않고 하쿠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원 웨이 티켓을 받아들고 제니바의 집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잡아먹으려 했던 가오나시顔無し가 따라오자, 그까지 데리고 제니바의 집으로 향한다.
제니바의 집은 센에겐 하나의 반환점이라 할 수 있다. 그 반환점을 돌고 나면 다시 목욕탕으로 돌아갈 것이다(그곳엔 아빠와 엄마가 있기 때문에 구하러 가야 한다). 겉으로 보기엔 센이라는 한 아이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더 이상 센은 예전의 겁 많고, 소심하며, 뽀루퉁한 표정을 짓는 아이가 아니라, 대범하며, 주위의 친구들을 어우르며, 얼굴엔 생기 가득한 표정을 짓는 아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반환점이란 이처럼 존재의 심연이 어떤 식으로 바뀌었는지 보여주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조셉 캠벨Joseph Campbell(1904~1987)은 그의 책에서 아래와 같이 서술해 놨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 조셉 캠벨, 이윤기 역, 『세계의 영웅신화』, 1996, 대원사, 29쪽.
한 지점을 통과했지만, 그곳에서 우린 지금껏 느끼던 것과는 완벽하게 다른 것들을 느끼며 돌아오게 되어 있다. 외로움이 사무친 곳에서 세계를 만나고, 밖으로 나갔지만 나의 심연을 만나는 놀라운 경험의 장 말이다. 바로 그곳이 반환점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도 동섭쌤의 강의를 들으며, 반환점을 돌고 나면 처음의 자기와는 사뭇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때 우린 그런 자신의 모습에 박수를 치며 환영할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
이 날도 첫 강의를 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비가 오는 날이었다. 그 땐 강의 시간에 잠시 비가 내리는 정도였지만, 이 날은 그 때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다음 날까지 이어진다고 하니 기분은 더욱 멜랑꼴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날엔 방에 틀어박혀 소주 한 잔 기울이며 날씨가 전해주는 음울함과 애잔함에 흠뻑 빠져들고 싶기도 하다. 그래서 잠시나마 ‘오늘은 날씨 핑계로 쉴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럴 때 분신술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그러질 못하니 결단을 해야만 했다.
그래도 반환점을 돌아가는 날이라는 생각과 함께, 겨우 다섯 번의 강의로 계획되어 있음에도 하루를 빠진다는 건 좀 그랬기 때문에, 마음을 가다듬고 나갔다.
막상 에듀니티로 가고 있으니, 언제 갈등했나 싶게 기분은 절로 좋아진다. 반팔 흰색 티에 분홍색 긴팔 남방까지 걸치고 가니, 엄청 덥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젠 반팔 반바지가 어울리는 그런 계절이 오고야 말았다. 봄날은 간다.
세 번째 강의의 제목은 ‘지금 왜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가 필요한가?’이다. 이 제목에 대해서는 올해 초 경인교대 강의 때, 에피소드를 들으며 인상이 남았기에 잘 기억하고 있다.
어느 학교에서 동섭쌤에게 강의 요청이 왔단다. 그래서 이 때 발작적으로 떠오른 제목인 ‘지금 왜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가 필요한가?’라는 제목을 알려줬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일상적인 이야기이니, 감동도 재미도 없다. 하지만 이후에 벌어진 일은, ‘밥이 벌처럼 날아가고, 튼튼한 갓끈도 썩은 새끼처럼 끊어질 정도(噴飯如飛蜂, 絶纓如拉朽.-연암의 표현)’로 한바탕 웃어젖힐 수 있는 웃픈 이야기다.
강의를 요청하며 제목까지 받아 적었던 선생님이 동섭쌤에게 다시 확인 차 전화를 하면서부터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때 이런 얘기들이 오간다.
요청쌤: “박동섭 교수님 잘 지내고 계시죠. 몇 월, 몇 일, 몇 시에 강의가 있는 거 잊진 않으셨나 확인 차 전화드렸습니다.”
동섭쌤: “당연하죠. 준비 잘 하고 있습니다.”
요청쌤: “근데 강의 제목이 ‘지금 왜 칭송받는 교사가 필요한가?’인 게 맞는 거죠?”
동섭쌤: (순간 귀를 의심하며 침묵이 흐른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후에) “강의 제목은 그게 아니라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박동섭, 그는 누구인가? 그로 말할 것 같으면 대학생 때는 연극에 심취하여 4년 내내 8편의 연극에 참여한 식지 않는 정열의 소유자이며, 지금은 두 아이의 아빠이자 이동연구소 소장으로 매일 250배를 하루도 거르지 않는 끈기의 화신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연극을 하며 익힌 복식호흡형 발성법으로 이미 좌중을 압도하는 파워 있는 강의를 할 수 있으며, 300배로 다져진 체력으로 그 전날까지 곱창을 먹으며 뒤풀이를 새벽까지 할지라도 그 다음 날부터 3일간 18시간 진행되는 연수를 뚝딱 진행할 수 있다.
이런 그가 그 선생님과 통화하면서 발음이 꼬였거나,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를 ‘칭송받는 교사’로 잘못 말했을 확률은 ‘지하철 2호선과 8호선이 충돌할 확률(준규쌤 표현)’보다 훨씬 낮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왜 그 선생님은 그와 같이 들은 것일까?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사람은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보고 싶은 대로 본다’를 제대로 나타내주는 예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당연히 칭송받는 교사가 필요하고, 능력 있는 교사가 필요하며, 혁신학교가 좋은 학교이며, 학생중심수업을 할 수 있는 교사가 좋은 교사라는 것에 이견을 달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건 개인적으로든, 시스템적으로든 노력하고 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무도 당연하게 그 선생님은 그런 상황에 맞춰 동섭쌤의 말을 들으려 했던 것이다.
그 때 동섭쌤은 “지금 왜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가 필요한가?”라고 분명히 말했고 그 선생님은 그 제목을 토씨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분명하게 들었을 것이다. 왜냐 하면 강의 제목을 분명히 들어야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고, 안내문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선생님에겐 미처 상상도 할 수 없는 어휘꾸러미가 귀를 통해 들려왔던 것이다. 그건 두 말할 나위 없이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라는 어휘꾸러미이고, 설령 그 어휘꾸러미가 있었다 해도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가 필요하다’는 말을 이해하기엔 힘에 부쳤을 것이다. 그러니 그걸 듣는 순간 감당할 수 없었기에 ‘내가 잘못 들었을 거야’라고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아 가련하구나, 내가 안다는 것들이여! 내가 듣고 싶은 것들이여!
그런데 이 때가 중요하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것까지야 인간의 아주 자연적인 방어기제이니 말이다. 살아온 대로 생각하고 그러다 보면 그 생각이 나의 오랜 생각인 양 착각하여, 또 그대로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바로 그 때가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순간이자, 새로운 어휘꾸러미를 받아들일 수 있는 순간이다. 존심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다시 한 번 묻는다고 해서 무식이 탄로 나는 것도 아니니, 이를 꽉 물고 “교수님 제목을 잘 못 들었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해주세요”라고 요청하면 된다. 그러면 상황은 완전히 뒤 바뀌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가장 쉬운 말이 가장 하기 어려운 말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미안합니다’, ‘가르쳐 주세요’, ‘보고 싶어’ 따위의 말들은 쉬운 말임에도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그래서 그 선생님은 차마 그런 말을 하지 못하고,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어휘꾸러미로 대충 짜 맞추었던 것이다. 그게 바로 ‘지금 왜 칭송받는 교사가 필요한가’라는 말이다. 그건 어느 누가 들어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고, 되려 너무나 판에 박혀 ‘인두로 상상력이 샘솟는 구멍을 지저 놓은 것(준규쌤 표현)’ 같은 그런 제목이다. 이런 상황과 너무도 비슷한 영상을 어제 동섭쌤이 강의 도중에 보여줬다. 그러면 우선 이 영상을 감상하기로 하자.
이 영상은 통신사 직원과 할머니의 대화를 보여준다. 통신사 직원은 고객 대응 매뉴얼에 따라 이야기를 기계적으로 진행하고 있고, 할머니는 그런 이야기와 상관없이 자신이 듣고 싶은 대로만 들으려 하고 있다. 통신사 직원은 ‘불이 났다’는 표현을 쓴 적이 한 번도 없음에도 할머니는 ‘불이 났다’는 말로 들으려 하고, 직원이 ‘유플러스 인터넷 업체’라는 말을 여러 번 했음에도 할머니는 그런 어휘꾸러미가 없어 흘려듣고 있다. 그 때 말은 말로서 의미를 갖는다기보다 그저 개가 짓는 소리이거나, 바람소리와 하등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동섭쌤은 “할머니는 불을 엄청 싫어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라는 웃긴 평을 하기도 했는데, 여러모로 이 영상은 여러 현상(매뉴얼의 폐해,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인간)을 보여주는 자료라는 생각이 들었다.
3강의 문을 열면서, 제목에 대한 에피소드로 한참 썰을 풀었다. 작은 소동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이 짧은 일화에도 수많은 것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건 비유하자면, ‘밥알에도 우주가 있다’는 그런 황당한 이야기라고나 할까.
어찌 되었든 이렇게 작은 일화들을 풀어내며 그 안의 의미를 탐구해 나가는 과정을 ‘기술’해 봤다. 그리고 그렇게 기술해 나가다 보니 아주 일상적인 상황이 얼마나 황당한지도 알게 됐고, 자연스럽게 낯설게 볼 수 있게 됐다. 그래서 3강의 이야기는 ‘기술이 곧 처방이다’라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지금 당장은 어휘꾸러미가 없어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절망감이 들더라도, 포기하거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휘꾸러미로 대충 얼버무리려 하지 말고 버텨 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기술이 곧 처방이다’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되며, 그 말을 통해 ‘왜 지금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가 필요’한지 알게 되니 말이다.
그런 각오가 되었다면, 이제 동섭레스트의 제3캠프를 향해 발걸음을 떼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