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건빵 Apr 20. 2016

강의와 여행의 공통점

2. 박동섭의 ‘트위스트 교육학’ - 하품 수련의 역설, 첫 번째

여행을 떠나보면 걱정이 많은 사람일수록, 스스로에게 불만족하는 사람일수록 짐이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학교에서 2박 3일의 여행을 갈 때, 여학생들은 캐리어에 짐을 하나 가득 싣고도 가방까지 챙겨온다. 아마 그런 이유 때문에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 말이 있는 걸 거다. 

그런데 한 달간 지리산 종주를 떠나보니, 짐은 어찌 되었든 나를 억누르는 불안의 증표라는 것을 알겠더라. 걱정이 앞서 이것저것 우겨넣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내 어깨를 누르는 무게감은 여행을 더욱 힘들게만 만든다. 그러니 여행을 떠난다는 건 ‘불안과 대면하는 일’임과 동시에, ‘걱정을 인정하고 짐을 최소화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 여행은 나의 마음의 불안을 알게 하고, 강의는 내가 어떤 틀에 갇혀 사는지 알게 한다.




여행을 떠나기 전강의를 듣기 전의 공통점

     

그렇다면 몸으로 떠나는 여행 말고, 생각으로 떠나는 여행(강의를 듣는 것)은 어떨까? 강의를 듣기 위해서 준비해야 할 게 많고, 신경 써야 할 게 많을까?

일반적으론 강의를 듣기 위해서도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3시간의 짧은 강의엔 강사가 살아온 내력, 고민의 흔적, 연구의 고갱이가 담겨져 있다. 그러니 그걸 알아듣기 위해서는 그가 쓴 책을 읽고, 강사의 이력을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그런 단서들을 통해 그 사람이 던지는 말의 본질에 가닿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 강사의 책을 읽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아야 과연 강의 내용이 제대로 들리는 걸까?



하지만 처음에 여행에 대해서 얘기했던 것처럼, 생각으로 떠나는 여행도 마찬가지다. 강의를 듣기 전에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은 ‘주위 사람들에게 없어 보이면 어쩌나?’하는 걱정과 ‘강사의 얘길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어쩌나?’하는 불안이 섞여 있다. 그러니 그런 불안과 걱정을 없애고자 조금이라도 이해의 단서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오히려 강의를 듣기 전에 관념이 꽉 차서 강의 내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철저히 준비할 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 없어 보여도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지금 수준에서 이해되는 것만 이해하겠다’고 맘먹어야 한다.                 



▲ 모르는 게 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소풍 가듯 강의를 들으러 가야 하는 이유

     

이에 대해 동섭쌤은 “어른은 자신이 모르는 게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고, 아이는 자신이 아는 게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다”라는 신선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공자孔子(BC551~479)도 “유야! 너에게 안다는 게 무언지 가르쳐주마. 아는 걸 안다고 하고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由!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爲政」17).”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동섭쌤의 정의와 통한다. 즉, 모르는 것을 인정할 수 있기에 배울 수 있으며, 그럴 때 강의 시간에 울려 퍼지는 말들에 귀를 쫑긋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강의를 들으러 오기 전에 무언가 부산히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소풍을 떠나듯 편안한 마음으로 와서 강의 시간에 열심히 들으면 되는 것이다. 이걸 우치다쌤은 배우는 사람의 자세에 대해 “저는 모르는 것,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가르쳐 주세요”, “잘 부탁하겠습니다”라는 세 마디 말로 표현했다. 

모든 것은 ‘나는 모르는 게 있다’는 인식에서부터 시작되며, 그렇기 때문에 스승을 붙잡고 ‘가르쳐달라’고 진심으로 말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오늘 강의를 들으러 가기 전에 ‘레드 선!’이라 외쳐 온갖 망상을 떨쳐내고, 무언가 앎을 채워야 한다는 허영을 벗어버리고, 그저 신나게 강의의 흐름에 몸을 맡기면 된다.  



▲ 강의를 듣는다는 건, 여행을 떠난다는 것.


              

강의는 타자다

     

강의 계획이 알려지고 한 달 보름 만에 드디어 첫 강의가 있는 날이 되었다. 아침부터 왠지 모르게 설렌다. 동섭쌤의 강의를 듣는 것도 기대가 되고, 그곳에서 어떤 분들을 보게 될지도 기대가 된다. 

나에게 강의는 타자를 만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타자의 도래는 당연히 저주임과 동시에 축복이라 할 수 있다. 타자를 만나면 내가 어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지 알게 되어, 사람들 앞에 맨몸으로 서있는 것 같은 불편함과 불쾌감을 느껴야 하기에 저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알게 되었다는 건 어떤 의미에선 거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기에 축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저주로만 남느냐, 축복으로까지 갈 수 있느냐는 이 강의에 얼마나 내 마음을 잘 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 강의는 타자와의 만남이다. 이 강의에서 난 과연 만날 수 있고 어우러질 수 있을까? 동섭쌤과 강의 포스터가 한 방에.



장자莊子를 우린 흔히 자연주의 철학자로 알고 있지만, 그는 기실 소통을 중시한 인간주의 철학자였다. 그의 책에선 타자는 어떻게 도래하며, 그 때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를 심도 깊게 다루고 있다. 장자가 생각하는 타자는 전혀 다른 생물종이며, 그렇기에 애초에 서로가 서로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완벽하게 다른 존재가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하는 점이 장자의 최대 관심사였던 것이다.           



옛적에 바닷새가 노나라 대궐에 날아들었어. 노나라 제후가 궐 안에 데려와 술자리를 베풀고 구소의 음악(한국의 정악 or 현대의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며, 가축을 잡아 음식을 제공하며 정성껏 보살폈지. 그러나 새는 곧 어지러워하며 근심과 비탄에 잠겨 감히 고기 한 점 먹지 않았고 물 한 모금 마시지 않다가 삼일 만에 죽고 말았던 거야. 

이것은 인간을 대접하는 방법으로 새를 대접했던 것이지, 새를 대접하는 방법으로 새를 대접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장자』 「지락」3

昔者海鳥止於魯郊, 魯侯御而觴之于廟, 奏九韶以爲樂, 具太牢以爲膳. 鳥乃眩視憂悲, 不敢食一臠, 不敢飮一杯, 三日而死. 此以己養養鳥也, 非以鳥養養鳥也. 『莊子』 「至樂」3    


      

노나라 제후에게 바닷새는 완벽한 타자였다. 하지만 신성한 새였기에 그는 인간에게 베푸는 최고의 예법으로 대우했고 산해진미로 대접했다. 하지만 바닷새는 그런 극진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결국 비실비실 앓다가 죽고 말았다. 『여우와 두루미』라는 옛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다. 이에 대해 장자는 ‘인간을 대접하는 방법으로 새를 대접했던 것이지, 새를 대접하는 방법으로 새를 대접하지 않았다’고 단호하게 결론을 내린다. 



▲ 타자란 완전히 다른 존재다. 그래서 나의 방식대로 관계를 맺으려 하면 한 존재를 파괴할 수밖에 없다.



타자란 그저 나와 생각이 다른 존재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나의 방식대로 고집하며 관계를 지속할 경우 서로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 건 기본이고, 심한 경우는 죽게 만들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노나라 제후는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경우 대부분 잘못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노나라 제후가 죽은 새를 보면서 ‘내가 좀 더 신경써줬더라면’이라 후회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그는 타자라 생각하지 못했으니, 여전히 자신의 정성이 부족하여 그리 됐다고 결론짓는 것이다. 그러니 다음에 또 다른 타자를 만나도 여전히 자신의 방법으로 타자를 대접할 것이고, 이런 상황은 다시 반복될 것이다. 

우린 그런 악순환에 말려들어선 안 된다. 그러니 강의라는 타자를 통해 나의 방식대로 해석하고 이해하려 할 게 아니라, 내가 어떤 규정들에 갇혀 살았고 그걸 남에게 어떻게 강요하며 죽음으로 내몰았는지 돌아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나는 모르는 게 있다’는 자각이고, ‘그러니 배우겠습니다’라는 선언인 셈이다.  



▲ 모든 배움의 기동은 타자를 만나서 모르는 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같은 강의를 들으러 가다   

  

학교 체육이 끝나고 부랴부랴 서둘러 집으로 갔다. 7시부터 강의가 시작되기 때문에 마음은 벌써부터 바쁘다. 하늘은 당장이라도 비가 내릴 것처럼 흐리지만,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는 동안에는 내리지 않았다. 다행히도 집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하더라. 타이밍 맞춰 내리는 비가 고마웠고, 강의 첫 날 하늘이 내려주는 선물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 잔뜩 흐르고 바람도 거세게 불지만, 오히려 기분은 상쾌하고 좋기만 하다.



전철을 타고 광화문역에서 내려 에듀니티로 간다. 비는 잦아들었지만 바람은 거세게 불고 날도 잔뜩 찌푸려 있다. 원래 비 오는 날을 좋아하기에 한껏 기분이 업 되었고, 거기에 첫 강의를 듣는다는 기쁨에 절로 행복이 밀려왔다. 사람들은 서둘러 집으로 가기 위해 전철역으로 발걸음을 옮기지만 나는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경쾌한 스텝을 밟으며 걷는다.                 



▲ 드디어 에듀니티에 도착했다.




에듀니티에서 강의를 듣다 

    

에듀니티엔 두 번 와봤다. 한 번은 2013년 유지 모로 교수 특강 때였고, 한 번은 올해 초 동섭쌤 강연 때 뒤풀이에 참석하려 왔을 때였다. 자주 온 곳은 아니지만, 두 번 온 기억만으로도 에듀니티는 마음이 절로 편해지는 곳이다. 내부야 전형적인 사무실 같은 구조지만, 밝고 화사한 분위기, 그리고 따스한 실내 온도, 그리고 따뜻한 사람들의 인상이 긴장된 마음을 한껏 풀어주니 말이다. 



▲ 출입문에 강의 포스터가 설치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이번 강의를 기획한 조지연 차장님과 김태선 기획자님이 맞아 주신다. 따스한 환대를 받으며 들어가는 길에 보니, 간식까지 차려져 있다. 이것이야말로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 꼴’이라 할 수 있다. 동섭쌤은 몇 날 며칠 고민하며 강의를 준비했을 것이고, 스텝들은 기획부터 강의 준비까지 모든 것을 세팅했을 것이다. 그에 반해 나는 그저 이 곳에 와서 맘껏 먹고 마시고, 강의를 듣고 가기만 하면 되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감사한 마음에 인사를 건네고 간식을 챙겨서 들어왔다. 



▲ 풍성한 먹을거리들. 이렇게 황송할 수가. 강의 들으러 오는 맛도 쏠쏠하지만, 간식 먹으러 오는 맛도 최고일 듯.



7시가 되니 김태선 기획자님이 앞에 나와 강의를 기획하게 된 이유를 말해주며 간략하게 자신을 소개하더라. 그런 후엔 돌아가며 한 사람 한 사람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곳에서 나를 소개하게 될 거란 걸 전혀 생각하지 못해서 바짝 긴장했지만, 곧 긴장을 풀고 소개를 했다. 

이번 후기는 강의를 들으러 가기 전까지의 마음가짐과 강의 시작 전의 풍경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다음 후기에선 자기소개를 하며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 갔는지, 그리고 첫 강의 제목인 ‘하품 수련의 역설’이 어떤 내용인지 하나하나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 열심히 분위기를 띄우고 소개할 수 있도록 진행을 하고 있는 김태선 기획자님.
매거진의 이전글 트위스트 교육학으로 트위스트를 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