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건빵 Jan 14. 2016

거침없이 박동섭을 관통하라

박동섭의 ‘침대에서 읽는 비고츠키’ 3

글이란 쓰면 쓸수록 처음의 생각과 달라지는 부분이 있다. 글로 표현되기 전엔 머릿속에 사념으로 남아 있다. 그게 실재한 것인지 망상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걸 자로 전환하는 과정 속에 간섭효과가 생기며 달라지게 된다. 그래서 처음엔 무겁지 않게 쓰려 노력했고 그게 첫 번째 글에선 나름 성공했다. 하지만 두 번째 후기는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무겁고 지리한 글이 되었다. 맘처럼 안 되는 게 인생만 있는 건 아니다. 글 또한 내 맘과는 자꾸 다르게 써진다.

두 편의 후기를 통해 조금이나마 이 강의가 지향하는 바, 또는 동섭쌤의 특징을 어느 정도는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턴 본격적으로 강의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다른 얘길 해줬다. "일이 먼저 있고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타자에 의해 일이 성립됩니다."




학교를 혁신하자라는 말이 지닌 폭력성  

   

우리나라에 서양 이론이 들어오거나, 영향력 있는 나라의 사상이 들어오면 도그마가 되는 경향이 있다. ‘열린교육’이란 단어가 수입되어 학교 담장을 모두 허무는 형태로 실현되었고, ‘협동학습’이란 단어가 수입되어 대부분의 수업에 모둠학습이 적용되었으며, ‘과정을 평가해야 한다’며 수행평가가 일괄적으로 적용되었다. 색다른 수업 모델을 수업에 반영하고자 하는 노력은 좋지만, 수입된 이후엔 ‘그것만이 좋은 것’이라 강요하며 환경과 상황에 상관없이 모두 그걸 적용해야만 했다.

2014년 교육감 선거로 대거 ‘진보교육감’이 뽑히면서 학교에는 혁신의 물결이 파도를 쳤다. 그 당시 대안교육계에선 우스갯소리로 “이러다 대안학교(준규쌤식 표현 야매학교-왠지 이 단어가 더 끌린다)가 다 망하는 거 아녜요?”라고 했었다. 그 말마따나 각 교육청별로 ‘혁신학교’라는 것을 운영하며 좀 더 학생친화적이며, 각자의 꿈을 살리는 교육의 장이 마련되었다.



▲ 14년에 교육감 선거를 통해 교육계엔 새바람이 불었고, 기대 또한 높아졌다.



하지만 선사고에 다닌 한 학생은 “아이들은 대학에 진학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는데, 선생님들은 그 하나의 목표에 따라 준비해주려 하더라구요. 혁신학교라는데 일반학교와 똑같아요”라고 말했다. 물론 이 한 학교의 사례만으로 모든 혁신학교를 똑같다고 일반화하는 건 아니다. 단지 ‘혁신’이란 단어를 외치는 순간 ‘혁신’은 사라지고, ‘학교를 혁신하자’고 외치는 순간 그건 다른 무수한 논의를 죽이는 폭력적인 말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이에 동섭쌤은 “일본의 아키타秋田엔 혁신적인 교육을 하는 학교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선 ‘혁신’이란 말을 쓰지 않아요. 그곳 교사들은 모두 그런 식의 교육을 한다고 생각하기에 다르게 정의할 말이 필요 없었던 거죠. 더욱이 그곳에선 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 마을 할머니들이 집 앞까지 나와서 ‘잘 갔다 와’라고 인사해주는 게 일상입니다”라고 말한다.

단어를 통해 하나로 규정지어버리면, 다른 무수한 논의는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다. 오로지 그것만이 절대 선인 양 모양새를 취하고 권좌의 자리에 앉기에, 그 외의 것들은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 재능은 그 일을 단박에 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일을 잘 할 수 있을 떄까지 계속하는 데 있다. 그 일을 잘하기 위해서 다른 일을 하지 않을 줄 아는 데 있다-헤세이티




옳은 것조차도 절대권력이 되면 절대 부패한다 

    

동섭쌤은 아키타의 얘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간다. 이게 꽤나 충격적인 예화였는데, 그 당시엔 왠지 웃겼다. 그건 지금 한국 사회에서 ‘혁신’이란 말이 얼마나 비일비재하게 쓰이며(닳고 닳은 혁신), 얼마나 권력화되었는지 보여주는 예화라고 할 수 있다.

동섭쌤이 전주 신흥고(모교 이름을 여기서 듣게 되니 은근 반갑다)에서 특강을 하게 되었을 때, 담당자가 주제를 물어봤다고 한다. 그래서 그 때 발작적으로 제목이 떠올라 “지금 왜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들이 필요한가?”라고 또박또박 제목을 알려줬단다. 그리고 일주일이 흘러 다시 전화가 와서 강의 제목을 확인하는데, 그 때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과연 어떤 대화가 오고 간 것일까? 담당자는 강의 제목을 “지금 왜 칭송받는 교사들이 필요한가?”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칭송받는 교사가 학교에 필요하다는 말은 너무도 당연하고, 학교를 혁신하자는 말은 너무도 당연하며, 교권이 붕괴되어선 안 된다는 말은 너무도 당연하다. 당연하기에 더 이상 어떤 상상도, 의문도, 비판도 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전혀 반대되는 제목을 말했음에도, 그 당연함에 기인하여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만 것이다. 동섭쌤은 “언어꾸러미가 없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죠”라고 말하며, “하나의 논리만이 ‘옳다’며 모든 것을 집어 삼켜서는 안 되며, 다양한 가치와 생각이 공존하여 길항작용을 할 수 있어야 하기에,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들도 교육현장에 필요하다고 말한 거예요.”라고 정리했다.                



▲ 혁신학교에 전면에 떠오르며, '혁신'은 닳고 닳아버렸다.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할 것인가?




맑시스트와 맑시안의 차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우치다쌤이 글에서 밝힌 ‘맑시스트Marxist’와 ‘맑시안marxian’을 구분한 글을 인용했다.           



맑시스트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자신의 사상적 입장으로 해서 그 개념, 술어를 분석의 기본적인 도구로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반면에 맑시안은 마르크스의 지견을 이해하고 그 뜻에 경의를 품지만 그 술어와 개념을 분석을 위한 주요한 도구로서 사용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맑시스트와 맑시안은 어떻게 다른가?」, 우치다 타츠루, 박동섭 역   


       

‘맑시스트’란 맑스의 사상을 자신의 입장에서 이해하여 그걸 그대로 추구하려는 사람을 말하며, ‘맑시안’은 맑스의 사상과 정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였지만, 거기에 매몰되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 사상이든 신념이든, 철학이든 진정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그 정신은 높게 사되, 그것만이 ‘진리’라고 생각하여 거기에 매몰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임제록臨濟錄』에도 이와 비슷한 경구가 있다.           



도반들이여! 법의 견해를 터득하려면, 남에게 미혹 당하지 말고 안에서나 밖에서나 마주치는 대로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

그래야 비로소 해탈하여 사물에 구애받지 않고 해탈하여 자유자재하게 된다.

道流 儞欲得如法見解 但莫受人惑 向裏向外 逢著便殺 逢佛殺佛 逢祖殺祖 逢羅漢殺羅漢 逢父母殺父母 逢親眷殺親眷 始得解脫 不與物拘 透脫自在   


        

예전 선사들도 어떤 ‘옳음’ 또는 ‘진리’에 대한 고민이 많았나 보다. 지금도 진리라고 박박 우기며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나 이론들이 있으니, 예전이라고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 위의 경구에서 느껴지는 건 어떤 결연한 의지이자, 약동하는 생명력이다.




맑시안들의 유쾌한 반란

     

그런데 아주 파격적이며 충격적인 이야기를 서슴없이 한다. 지금 들어도 섬뜩하지만 ‘무쏘의 뿔처럼 홀로 갈’ 줄 아는 의연함이 보이는 문장이라 할 수 있다. 길에서 마주치는 온갖 영향력 있는 단어들, 영향력 있는 사람들, 영향력 있는 철학들을 모두 가차 없이 죽이라고 하니 말이다. 물론 여기서 죽인다는 표현은 실제로 칼부림을 하라는 표현은 아니고, 정신적으로 칼부림 이상의 죽일 정도의 결단력이 필요하다는 표현이다. 부처든, 조사든, 맑스든, 레비나스든 어떤 순간엔 나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양분을 줘서 의식을 고양시킬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 머물러 그런 것들을 ‘하나의 완벽한 상’으로 굳힐 경우, 그건 또 하나의 우상이 되어 다른 것들을 옥죄기 시작한다. 그러니 만나서 감화를 받았으면 거기에 머물려 하기보다 어느 순간엔 죽여야만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외부의 사물에 구속받지 않고 자유자재로이 나갈 수 있다.

연암 박지원도 ‘정신을 본뜨는 것心似’과 ‘모양을 본뜨는 것形似’의 비유를 통해 똑같은 말을 했었으니, 멀게는 당나라의 임제의현과 조선의 연암, 가깝게는 일본의 우치다, 한국의 박동섭이 각자의 언어로 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혁신’이란 말이 더 이상 쓰이지 않아도 학교가 ‘행복한 배움의 공동체’가 되는 것, ‘무능한 교사라 딱지를 붙이며 배척하지 않아도 교사들이 배움의 열정이 가득한 곳’이 되는 것, ‘폭력학생을 솎아내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를 챙겨주는 따스한 곳’이 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진정 바라는 게 아닐까. 그러려면 해야 될 일은 ‘단어’를 통해 하나로 규정하려는 움직임이 아니라, 당연히 자신이 발 딛고 선 자리에서부터 그러한 작지만 의미 있는 활동을 하는 것이다.               



▲ 따뜻한 교육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함께 모이신 선생님들. 그대들이 희망입니다.




동섭안이 되어 박동섭을 관통하라 

    

더불어 이번 후기의 제목을 ‘거침없이 박동섭을 관통하라’로 정했다. 이 말 또한 위에서 했던 얘기의 연장선에 있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박동섭을 만나면 박동섭을 죽여라’인 것이다.

관통한다는 것은 동섭쌤이 지닌 학문의 깊이, 또는 학문의 열정, 비고츠키에 대한 마음, 인간에 대한 애정을 속속들이 배운다는 것을 뜻한다. 이미 동섭쌤이 “나 또한 90%는 많은 사람들에게 증여받았고 거기에 10%만 나의 관점을 얹어 전달하고 있는 거예요”라고 했던 말처럼, 우리 또한 그에게 많은 것을 증여받아 다른 사람에게 증여해주면 된다. 그런 다음엔 가차 없이 박동섭을 죽여야 한다. 이 말을 좀 더 순화하여 표현한 말이 ‘거침없이 박동섭을 관통하라’인 것이다.

그럴 때에야 내가 지닌 지적 도량형이 커져 예전엔 미처 들리지도, 인식되지도 않았던 것들이 들리고 인식되기 시작한다. 즉, 언어꾸러미가 생겼기 때문에 ‘지금 왜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들이 필요한가?’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고, ‘배우고 싶은 것 이외의 것을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  끝나고 뒷풀이에 참석하기 위해 에듀니티에 왔다. 대표님이 선물을 주시네~ 완전 횡재했네. 횡재했어~




움직이는 연구소, 동섭쌤을 축하하며

     

올해 3월부턴 ‘신라대 교수 박동섭’이 아닌 ‘독립연구자 박동섭’으로 새롭게 발돋움한다. 이 날 뒷풀이 장소로 옮길 때 “그러면 연구소를 여시는 거예요?”라고 물으니, “전 움직이는 연구소예요. 오늘도 KTX를 타고 오면서 일본 연수 계획 짜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니깐요”라고 하셨다. ‘움직이는 연구소’라는 말은 동섭쌤과 매우 잘 어울린다. 작년 겨울엔 살인적인 스케쥴을 성공리에 마쳤고, 지금도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벌써 몇 년째 250배를 하다 보니, 감기도 걸리지 않고 살인적인 스케쥴을 소화하는 데도 전혀 문제가 없어요”라고 너스레를 떠신다.



▲ 독립연구자로 선 동섭쌤을 중심으로 함께 만날 수 있었다. 그 덕에 에듀니티 대표님도 이사님도, 윤진쌤도 함께 알게 되었다.



강의의 꽃은 뒷풀이(기승전‘뒷풀이’다)인데, 그 때 만난 에듀니티 김병주 대표도, 윤진쌤도 똑같은 말을 했다. 김병주 대표는 “오히려 잘 됐습니다!”라고 말문을 열며, “더 넓은 곳에서 더 자유롭게 연구활동과 강의를 하셔야죠”라고 덧붙였으며 윤진쌤은 준비한 선물에 “독립연구자로 다시 태어나심을 축하드립니다. 교수님의 열정과 배움이 더 반짝이게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늘 곁에서 함께 하고 있음을 잊지 마시고, 걸음걸음 나아가시길 바랄께요. 응원합니다!! 파이팅”이라 썼다.

나도 그런 말들에 백퍼센트 동감했다.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이 그대로 동섭쌤에겐 선순환이 되어 돌아올 거라 믿기 때문이다. 더욱이 신라대에 제출하려 썼던 소명서에 “박동섭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가면 불원천리하고 찾아온 수많은 교사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교육 경력이 높아지는 만큼, 교육에 대한 고민도 깊어지기에 찾아와 강의를 듣는 것입니다. 그 때 저와 비슷한 긍정적인 평가들을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그건 곧 박동섭 교수의 수업이 의미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라 할 수 있습니다.”라고 썼는데, 신라대가 제 복을 발로 걷어찬 것이니 그 덕에 우리들은 불원천리하지않고도 양질의 강의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올해 더 넓은 세상에서 맘껏 활보하길 기대하며 응원한다.               



▲ 마음과 마음이 부딪혀, 힘이 되고 기쁨이 된다. 동섭 형님의 독립연구자로의 발돋움. 그 첫 해를 축하하며~




후기를 끝낸 소감

     

막상 곁다리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았기 때문인지, 실제로 세 편의 후기엔 강의 내용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 글 전편에 흐르는 파토스pathos가 바로 동섭쌤에게 배웠던 것들이고 이번 강의에서 들었던 것이기에,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전달되었으리라 믿는다.

제주도 강의에서 우치다쌤은 자아를 목조건물에 비유하며 설명했는데, 이에 동섭쌤은 “강연하시면서 레비나스의 ‘레’자도 꺼내지 않으시고 레비나스의 철학을 풀어내는 스승의 모습에 또 감탄.”이라 평했고, 이걸 그대로 패러디하여 이 날 강연을 시작할 때 “비고츠키안이 되어, 비고츠키의 ‘비’자도 꺼내지 않고 그의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나도 그 말을 그대로 본 따서 “「침대에서 읽는 비고츠키」의 강의 내용을 거의 쓰지 않으면서, 그 내용을 전했습니다”라는 말인지, 막걸리인지 모를 소리를 하며 이만 강의 후기를 마치도록 하겠다. 끝까지 함께 와주셔서 아즘찮이 아즘찮이 또 아즘찮이입니다.



▲ 긴 글 읽어주셔서, 아즘찮이 아즘찮이 또 아즘찮이입니다.




목차     


1. 비고츠키 강의를 듣기 전, ‘레드 썬!’

‘헉’에서 ‘그까이꺼’로

신나게 달리는 후기를 바라며

동섭쌤과의 인연, 그리고 그 후

‘박동섭MKⅡ’와 ‘좀 더 건빵다워진 건빵’의 재회!

‘모르는 게 약’이 되는 동섭쌤의 강의     


2. 박동섭, 그를 조심

익숙한 낯섦, 그 속으로

발작적으로 떠오른 ‘박동섭, 그를 조심’이란 제목

박동섭, 그를 조심 1 - 메르스보다 무서운 바이러스는?

박동섭, 그를 조심 2 - 정답을 원하세요?

박동섭, 그를 조심 3 - 유쾌! 상쾌! 통쾌!

결론은 박동섭, 그를 조심!     


3. 거침없이 박동섭을 관통하라

‘학교를 혁신하자’라는 말이 지닌 폭력성

옳은 것조차도 절대권력이 되면 절대 부패한다

맑시스트와 맑시안의 차이

맑시안들의 유쾌한 반란

동섭안이 되어 박동섭을 관통하라

움직이는 연구소, 동섭쌤을 축하하며

후기를 끝낸 소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