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이야기 연구의 대가 김환희 선생님을 만나다 2
춘천교대로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은 가볍고도 무거웠다. 이런 식으로 저자를 찾아간다는 것이 김환희 선생님에게든 우리에게든 신나면서도 그 반면에 어색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춘천교대 홍익관 305호의 문을 노크하자마자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김환희 선생님의 첫 인상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옆집 아주머니 같은 편안한 인상이었다.
수많은 뿌리는 하나의 줄기로 자란다
선생님은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림을 자주 그리곤 했지만 그 그림이 그렇게 맘에 들진 않았단다. 그런 사정 때문에 미술은 관두고 문학 작품을 정신없이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학교에 가서는 불어를 전공하였고 대학원에선 ‘비교문학’으로 전공을 바꾸셨다. ‘옛이야기평론가인데 왜 하필 불어과에 입학하셨을까?’ 왠지 모르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고미숙씨도 대학교에선 독문학을 전공했다가 대학원에 가서 국문학으로 전공을 바꿨다고 하는데, 두 분의 그런 삶의 방향이 왠지 모르게 닮아 보였다.
이쯤 되면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처음부터 찾아 그대로 하면 되지, 괜히 삥 돌아 왔다고 푸념을 할만도 하다. 하지만 인생의 묘미는 항상 지나봐야만 아는 것이지 않을까. 대학교 전공이 그렇게 쓸데없는 게 되나 했는데, 지금에 이르러 다양한 나라의 옛이야기를 비교분석하려다 보니 아프리카 민담을 분석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민담은 불어로 써져 있어 남들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었노라고 미묘한 삶의 흐름을 이야기해주셨다. 어느 경험이든 쓸데없는 경험이란 없다.
예술인은 경계인이다
선생님은 자신을 경계인이라고 표현했다. 막상 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하고 박사 학위까지 땄지만, 그걸 활용하여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현실은 없었으니 말이다. 실용되지 않는 학문의 비애를 선생님은 ‘경계인’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한문’을 전공으로 선택한 내 입장에선 십분 이해되는 표현이었다.
경계인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자신의 전공을 포기하고 교양과목을 가르칠 강사가 되거나 아예 모든 배웠다는 의식을 내려놓고 전혀 다른 길을 택하거나 하는 거였다. 선생님도 어느 순간엔 자신의 그런 현실이 괴로워서 돌파구를 마련하느라 ‘교양영어’를 가르치기도 하셨다고 한다. 자신이 애정을 지녔던 과목이 아닌, 전혀 상관없는 과목을 가르칠 때의 그 비애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옛이야기에 대한 관심을 버리진 않으셨단다. 미술도 좋아하고 문학작품도 좋아하던 소녀는 그 둘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옛이야기분석’을 자신의 연구영역으로 택한 것이다.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사람에 의한, 평범한 사람을 위한 민담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전에는 영어를 가르치면서 들던 자괴감이 옛이야기를 분석하면서부터는 말끔히 사라졌다고 했다. 왜 그랬을까?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니, ‘즐기는 사람(好之者, 不如樂之者. 『논어』 「옹야」)’의 경지에라도 이르렀다는 말인가?
전혀 그런 말이 아니었다. 옛이야기로 만들어진 민담의 구연자들은 대단한 학식이나 사회가 원하는 스펙을 지니지 않은 평범한 갑남을녀甲男乙女였을 뿐이다. 그런 사람들이 읊은 우리네의 소중한 이야기들이 지금은 대단한 자료인양 여러 박사들이 파고들어 연구하고 있는 셈이다. 박사가 연구하는 대상이 갑남을녀가 노래한 민담이라는 그 사실에서 선생님은 자괴감이란 감정이 과한 감정이라 느낀 것이다. 배웠다는 자의식, 그리고 자신은 남들과 다르다는 분별의식이 그 모든 자괴감의 원인이었는데 연구하는 자료들의 저자들은 자의식도 분별의식도 없는 순수한 우리네 이웃이었으니 말이다. 그 때부터 선생님은 마음이 편안해졌고 ‘경계인’이라는 것도 당연한 사실처럼 인정하며 열심히 연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예술인은 당연히 ‘왕따’가 될 수밖에 없노라고 했다. 책에 빠져 사는 문학인, 책을 들여다보며 분석하는 평론가, 장구의 신명에 몸을 흔들며 무아지경에 빠진 연주인, 춤사위에 몸을 맡겨 세상과의 경계를 잊은 댄서(무당)에게 누가 가까이 갈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예술에 빠진다는 것은, 존재를 건 모험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나를 버릴 각오가 있지 않으면 애초에 예술을 흉내만 내는 흉내쟁이에 그치고 만다. 그렇기에 그 묘한 매력에 빠져 나를 버릴 각오로 달려들어 그 묘한 매력에 빠져 사는 것이다. 누군가가 기타는 ‘악마의 악기’라고 했다던데, 그와 같이 말한다면 예술은 ‘악마의 노림수’가 분명하다.
그런데 도대체 예술엔 어떤 매력(마력)이 있기에, ‘경계인’이 되어가면서까지 몰입하고 빠져드는 것일까? 선뜻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돈과 명예는 외부적인 요소니까 포기할 수 있다 치자, 그런데 내부에서 일어나는 ‘외로움’에는 어떻게 맞설까? 꼭 그런 희생까지 각오하며 무언가에 푹 빠져들어야만 하는 걸까?
결핍을 채워주는 예술의 가치
선생님은 “예술은 우리 삶에서 결핍된 부분을 채워준다.”라는 말로 그런 물음에 대답해주셨다. 결핍, 그건 어느 순간이고 내면의 깊은 곳에서 고개를 내밀려 하는 원초적인 두려움이다. 내면 깊은 곳에 감춰져 있을 때는 모든 사람이 크게 문제될 것 없이 살지만, 조금이라도 머리를 내밀라치면 누구든 괴로워하며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결핍은 박노해 시인이 말했듯 ‘건너뛴 삶’의 한 단면이어서 ‘건너뛴 시간만큼 장성하여 돌아와 어느 날 내 앞에 무서운 얼굴로 서서 성공한 자에겐 성공의 복수로, 패배한 자에겐 붉은 빛 회한을 남겨주는 것’일 수도 있고, 심리학자들이 말하듯 ‘유아기의 트라우마’일 수도 있다. 그런 결핍을 잘 해소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분명 달라질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결핍을 채울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라고 외치는 대목에선 전율이 일었다. 감동적인 음악을 들을 때 눈물이 나고, 광기어린 춤사위를 볼 때 온몸에 전기가 흐르며, 풍물의 격정적인 가락에 몸이 따라 반응하고 좋은 문학 작품을 읽으면 온몸에 감각이 곤두서서 밤새도록 그 흥분을 떨치지 못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예술을 자신이 직접 경험하며 결핍을 치유하는데, 경계인이 된들 그게 얼마나 대수랴’라고 선생님은 말하고 있는 듯했다.
예술이 지닌 가치를 보여준 명작, 『수호의 하얀말』
이 부분에서 선생님은 『수호의 하얀말』이라는 책을 극찬하셨다. 오스카 유우조라는 일본작가가 6~7년을 몽골에서 살며 이색적인 문화의 기운을 몸소 느꼈고 광활한 대지를 표현하기 위해 엄청나게 애를 썼다고 한다. 한 편의 옛이야기를 쓰기 위해 6~7년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작가 정신은 도대체 어떤 것이란 말인가? 지금의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옛이야기는 몽골의 전통악기인 마두금馬頭琴(말 머리 모양의 악기)의 탄생 배경을 담고 있다. 주인공은 하얀 말을 타고 몽골의 초원을 누빈다. 그 때 관리가 말타기 대회를 열어 이긴 사람에겐 자신의 딸과 결혼할 수 있는 특권을 준다고 하여 주인공은 대회에 참석한다. 하지만 일등을 했음에도 관리는 상을 주기보다 그 말을 빼앗았다. 그런데 말은 원래의 주인을 찾아 도망쳤고 관리와 그의 부하들은 그 말에게 엄청나게 활을 쏘아 맞춘다. 주인 앞에 도착한 말은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만다. 그 날 저녁 꿈에 말이 나타나 자신의 힘줄과 뼈로 악기를 만들어 달라고 말한다. 주인은 그 말대로 악기를 만들었고 그 악기를 연주할 때마다 자신과 초원을 누볐던 하얀 말을 떠올리며 위안을 얻었고 그럴수록 악기 소리는 더욱 아름답게 울려서 듣는 이의 마음을 울렸다고 한다.
말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악기, 거기엔 동물과 인간 사이의 감정의 교류가 스며있고 그 감정은 구슬픈 소리로 연주된다. 그걸 들은 사람들의 마음에도 감동이 일어났다고 하니, 이것이야말로 예술이 인간의 결핍을 어떻게 메워주는지 제대로 알려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역시 옛이야기평론가다운 한 수 높은 전문가의 평론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평론을 들을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넓이는 깊이를 포괄한다
저녁을 먹으며 나눈 대화의 핵심은 건호가 늘 고민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과연 음악가(뮤지션)가 되기 위해서는 음악이란 것에만 몰입하는 게 맞는지, 여러 다양한 경험을 한 후 음악을 공부하는 게 맞는지 하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선뜻 대답을 하시지 않았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거니 하는 정도의 대답만 했을 뿐이다. 하지만 선생님의 이력만 봐도 그 대답은 뻔했다. 다양한 경험을 한다는 건, 갑작스런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쓸 수 있는 해결방안이 많다는 이야기다. 모든 경험이 하나로 수렴될 때 파급력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다양한 경험을 하지 않는다면, 갑작스런 상황에 내몰릴 때 손가락이나 빨고 있을 수밖에 없다. 내 길이 확실하다하여, 하나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거기에 덧붙여 ‘문학-미술-음악’은 통한다는 얘길 해주셨다. 위에서 이야기 했다시피, 예술이란 장르로 묶어지는 문학-미술-음악은 사람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임과 동시에, 결핍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렇기에 음악을 하려는 사람은 당연히 문학이나 미술을 함께 공부하고 익혀야 한다. 마지막으로 건호에게 “꼭 피아노를 배우세요.”라는 말을 덧붙이셨다.
세계 문학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옛이야기
현대문학을 보다보면, 예술적인 의미에서 우리나라 작가 중에 카프카Franz Kafka(1883~1924)를 능가할만한 사람은 없다고 단언하셨다. 이청춘이 비견할만하지만 그 외엔 별 볼일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옛이야기를 이야기하면 완전히 양상이 달라진다고 하셨다. 우리나라의 옛이야기는 짜임새도 짜임새지만 의미도 훨씬 깊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선 선생님의 자신감이 느껴졌다. 일례로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경우, 우리나라에선 어느 민담에서나 오누이가 함께 등장하는데 반해 일본에선 남자아이만 등장하며, 이야기 마지막에 누이가 밤이 무섭다며 자신이 해가 되겠다고 하자 오라비가 기득권(?)을 내려놓고 바꿔준 것과 달리 다른 나라에선 ‘해=남자’라는 공식을 깬 경우는 드물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우리나라 민담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들이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문학을 소개하려 할 때, 현대문학보다 옛이야기를 소개해주는 게 훨씬 자부심도 느껴지며 의미가 있다고 하신 것이다.
어느덧 시간은 3시간이 훌쩍 흐르고 말았다. 첫 만남의 어색함은 잠시, 오래도록 알고 지낸 사이처럼 격 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 대화를 계속 진행한다면, 2시간 정도 더 이야기가 진행될 거 같았다. 하지만 기차표를 이미 예매해뒀기에, 아쉽지만 이야기를 마쳐야 했다. 선생님과 함께 연구실을 나와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서울에선 볼 수 없던 무수한 별들이 보였다.
목차
Part 1. 프롤로그- 당신이 지금껏 본 옛이야기는 엉터리다
같은 뿌리, 다른 이야기
원전을 알아야 옛이야기가 보인다
Part 2. 옛이야기의 가치
수많은 뿌리는 하나의 줄기로 자란다
예술인은 경계인이다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사람에 의한, 평범한 사람을 위한 민담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결핍을 채워주는 예술의 가치
예술이 지닌 가치를 보여준 명작, 『수호의 하얀말』
넓이는 깊이를 포괄한다
세계 문학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옛이야기
세계에 두루 퍼져 있는 동일한 이야기의 비밀
이야기는 흐름이다
『선녀와 나무꾼』으로 본 흐름의 중요성
『흥부놀부』를 통해본 도깨비의 원래 모습
『흥부 놀부』를 통해 본 문화순결주의의 폐해
Part 4. 에필로그- 이야기의 원형을 찾다가 나를 만나다
안 해도 될 이유는 지천에 널렸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않는다(不狂不及)
옛이야기엔 우리가 놓치고 살아온 단면이 숨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