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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Nov 25. 2015

교육은 내부의 가능성을 끄집어 내는 활동

단재학교 2012년도 교사연수 후기

1. 교사 연수를 기대하며  

   

연수가 기대됐던 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저 KTX를 탄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기대가 되었다. KTX를 타면 어떤 기분일까?

10시 기차였기에 9시 30분에 모이기로 했다. 시간을 맞춰서 서울역에 도착했는데 사람이 어찌나 많던지 일행을 만나기까지 한참 헤매야 했다. 승태쌤과 송쌤을 만났다. 승태쌤은 어제 스마트폰(베가레이서)으로 바꾸셨다며 스마트폰의 신세계에 빠져 연신 카카오톡만 하고 계시더라.                




KTX를 타며, 가짜 경험에 대해 깨닫다  

   

10시 정도가 되어 기차에 올라탔다. 겉에서 본 KTX는 잘 빠진 라인이 예술이었고, 예전에 SM5를 보며 감탄했을 때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막상 올라타자 보이는 실내의 모습은 여느 기차 안의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아 실망스러웠다. 단지 개인 책상 같은 게 있어서 짐을 놓기 편했다는 것만 빼고 말이다.

시속 290km로 달린다. 바깥 풍경이 쑹쑹 지나간다. 처음에 서울을 벗어날 때만 해도 그렇게 빠르진 않아 실망했는데(서울권에선 선로의 문제로 빨리 달릴 수가 없음), 막상 서울을 벗어나자 기다렸다는 듯 속력을 높이더라. 시속 261km였고, 빠를 땐 300km까지 오르락내리락 했다. 그쯤 달리니 며칠 전 롯데월드에서 탔던 ‘아틀란티스의 악몽’이 떠오르더라. 아틀란티스보다 세 배정도 빠른 KTX에서 오히려 속도감이 더 안 느껴졌던 이유는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틀란티스처럼 바람과 공기 저항을 온몸으로 맞으며 간다면, 훨씬 빠르게 느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 진짜 경험과 가짜 경험의 차이도 알 수 있었다. 윤색되고 꾸며져 돌발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경험, 즉 자신의 계획 하에서 한치의 오차도 없는 경험이야말로 가짜 경험이라 할 수 있다. 관료들이나 정치인들이 하는 민생탐방이 민폐가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현실이란 게 빠진 경험은 아무 것도 안 한 것보다 더 나쁘다.



▲ 처음으로 KTX를 타본다. 신난다.

 


              

약속시간까지 시간이 남다

     

5시에 이왕주 교수님과의 미팅이 있었기 때문에 우린 시간을 떼울 장소를 찾아다녔다. 놀부부대찌개로 점심을 먹고 부산대 근처의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셨다. 수많은 이야기가 했고 그 때 난 주로 듣는 편이었다.



▲ 쌤들과의 미팅.






2. 이왕주 교수님과의 대화      


2012년 1월 10~11일까지 부산에서 판타스틱한 교사연수가 있었다. 밤늦도록 진행된 이왕주 선생님과의 대화는 이번 연수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지금부터 그 때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 갔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부산대 윤리교육과 이왕주 선생님의 연구실로 찾아간 시간은 5시다. 준규쌤, 승태쌤, 송쌤, 초이쌤, 제비꽃, 박동섭 교수님 그리고 건빵, 이렇게 7명이 찾아갔다.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채 몇 마디 오고가지 않았는데, 어느덧 우리 사이엔 친근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래서 부산대 부근의 횟집에서 이야기 한마당이 펼쳐졌고, 그것으로도 어찌나 아쉽던지 해운대(대학교 이름이 아닙니다^^;;)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되었다. 아래에 쓰게 될 내용은 그 때 오고 간 내용의 1/10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얘기를 나눴다.      



▲ 학교 엄청 좋다. 하지만 산 중턱에 세워진 학교라 경사가 꽤 심했다.




현재를 살아야 합니다    

 

그건 미래의 어느 지점을 위해 지금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는 사람에겐 할 수 없는 주문이다. 현재를 살려면 당연히 지금 이 순간에 오감을 활짝 열고 세상과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건 제비꽃님의 이야기처럼 ‘감수성’일 수밖에 없다. 나무 한 그루가 울먹이는 소리, 새만금 갯벌이 흐느끼는 소리, 바람이 스쳐지나가는 감각 등이 모두 열려 있어야 가능하다. 온 몸의 감각이 활짝 열려 세상과 마주할 때, 우린 비로소 현재를 살 수 있다.      




실패의 경험이 사람을 한 단계 비약 시킵니다  

   

『드래곤볼』이란 만화를 보신 적이 있나? 거기선 죽을 고비까지 다다른 사람이 ‘선두(콩처럼 생겼는데 한 알만 먹어도 상처가 치유되고 최고의 컨디션이 되게 하는 음식)’를 먹으면 살아날 뿐만 아니라 그 전보다 훨씬 세진다. 왕왕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은 그 전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말을 듣곤 했다. 어릴 땐 그저 그러려니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삶의 비약은 이성적인 공부로는 다다를 수 없다. 삶이 나를 배반하는 그 지점에서, 의식은 자라기 때문이다. 승태쌤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도 하지 못하고 속앓이만 했다던 이야기에 이왕주 선생님은 “그런 경험이야말로 숭고한 경험입니다”라고 평할 수 있었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실패의 경험, 그건 실패로만 남지 않는다. 실패를 통해 끊임없이 질문하며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럴 때 실패는 성공 이상으로 자신을 성장시킨다. 그와는 반대로 승승장구만 한 사람들은, 성공의 회한을 뒤늦게 맛봐야만 한다. 아래의 시는 이와 같은 삶의 오묘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늘 해결하지 못한 고민들은

시간과 함께 스스로 물러간다

쓸쓸한 미소이건

회한의 눈물이건     


하지만 인생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건너뛴

본질적인 것들은 결코 사리지지 않는다     


담요에 싸서 버리고 떠난 핏덩이처럼

건너뛴 시간만큼 장성하여 돌아와

어느 날 내 앞에 무서운 얼굴로 선다     


성공한 자에겐 성공의 복수로

패배한 자에겐 붉은빛 회한으로     


나는 내 인생의 무엇을 해결하지 못하고

본질적인 것을 건너뛰고 달려왔던가

그 힘없이 울부짖는 핏덩이를 던져두고

나는 무엇을 이루었던가     


성공했기에 행복하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마라     


아무도 모른다

성공을 위해 삶을 건너뛴 자에게는

쓰디쓴 삶의 껍질밖에 남겨진 게 없으니

「건너뛴 삶」 박노해     




테크네 τ.εχνη (techne)는 단순한 대면이 아니라 본질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캬~ 아름답도다. 이건 깊이 새겨듣고 싶던 말이었다. 흔히 ‘테크닉’이라고 번역되는 언어는 어떤 완전무결한 지식을 가지고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수영 테크닉’을 익히면 물의 흐름에 상관없이 완벽하게 수영을 할 수 있으며, ‘언어 테크닉’을 익히면 완벽하게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그런데 그건 나만의 틀을 가지고 세상에 다가가려는 완고함이나 폭력이 아닐까.

그렇지만 실상 technic의 유래인 희랍어의 ‘techne’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techne란 완고한 나의 지식으로 상대를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탐구하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왕주의 선생님은 맥주컵을 보며 “테크네란 바로 맥주컵이란 지식으로 맥주컵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눈에 보이는 사물 그 이면에 집중하고 몰입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바로 이와 같은 행위가 가능하려면, 나의 선지식‧고정관념을 지우고 사물과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감식안을 키워야만 한다. 무지개를 있는 그대로 볼 것이지, ‘빨주노초파남보’라는 관념으로 보아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그건 곧 오감을 활짝 열고 세상을 마주하라는 첫 번째 말과 다르지 않은 말이라 할 수 있다.               



▲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샘공산품인가? 예술작품인가? 테크네란 편견, 지식, 관념 너머로 들어가려는 적극적인 행위이다.




소통이란 단순히 서로가 말했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소통을 한다는 것은 서로의 자리가 옮겨 간다는 것을 의미하죠     


techne(본질을 들여다본다)는 당연히 소통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사람과의 만남이야말로 ‘테크네의 장’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관념으로 상대를 틀지어서는 소통을 할 수가 없다. 애초부터 나의 맘을 비우고 서로가 다른 생각이나 위치에 있음을 느끼며 이야기를 통해 조금씩 접점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왕주 선생님은 “상대로부터 이야기를 들으면 나의 위치가 조금 옮겨집니다. 그건 어떤 식으로든 나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죠. 그 상태에서 나 또한 상대방에게 이야기를 던집니다. 그러면 상대방 또한 어떤 감각적인 위치가 옮겨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위치가 옮겨지고 옮겨지다 서로 가까운 거리에 멈추든 먼 거리에 멈추든 멈추게 됩니다. 그게 바로 소통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위치가 조금도 움직여지지 않는다면, 그건 소통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죠.”라고 소통과 비소통을 설명했다.

다이알로그Dialog라는 말로 알려진 ‘dialogos’는 ‘dia(둘)+logos(진리)’라는 라틴어의 합성어다. 각자가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나의 생각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무시할 수 없다. 각자는 각자의 진리를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의 진리체계에 변화가 올 수밖에 없고, 그런 변화가 상대방에게 전달되어 상대방의 생각도 변할 수밖에 없다.

소통이란 극단적으로 말해 서로 같은 문법체계를 지니고 있거나, 사고가 비슷해서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 『장자』 「소요유」편의 “송나라 사람이 장보라는 모자를 팔기 위해 월나라로 갔습니다.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자르고 문신을 하고 있어 모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宋人資章甫而適諸越, 越人斷髮文身, 无所用之.).”라는 이야기에서처럼 서로의 사고가 다르다고 인정한 순간, 소통은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송나라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라면 그와 같은 상황에서 월나라에 남아 소통을 하려 할 것인가, 아니면 아무 근심 없이 대화가 가능한(실제론 소통이 아닌 독백) 송나라로 돌아갈 것인가? 그렇기에 소통은 어찌 보면 존재를 건 도전인지도 모른다.      




Education(교육)이란 안에 있는 것을 끄집어낸다는 뜻입니다. 밖에 있는 완벽한 진리를 채워 넣는 게 아니라, 사람이 지니고 태어난 완벽한 것을 끄집어낸다는 뜻이죠

     

이왕주 선생님은 “사람은 완벽하게 태어납니다. 그렇기에 그 완벽함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면 됩니다.”라고 말해주셨다.

이건 성리학에서 ‘사람의 본성은 자연의 완벽함을 타고 났다. 하지만 기질의 편벽됨에 가려져 왜곡되어 있을 뿐이다. 그건 혹 태양은 늘 있지만, 구름에 가려져 있는 것과 같다. 그러하기에 기질을 갈고 닦아 타고난 완벽함을 회복하도록 해야 한다.’는 논리와 비슷하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현재의 교육을 본다면,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다.      




선생이 하는 일은 고민하게 하는 데까지입니다 

    

교육이 나 자신이 타고난 완벽함을 끄집어내는 것이라 한다면, 선생이 하는 일은 학생에게 ‘너 자신의 완벽함이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선생이 학생을 변화시켰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선생과 학생이 함께 소통함으로 함께 성장해 갔다’는 말로 수정되어야 한다. 핵심은 ‘어떻게 고민하게 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건 강압적인 행동이나 억압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사 또한 끊임없이 고민하고 탐구하는 치열함을 보일 때, 학생도 자연스럽게 자신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준규쌤이 이야기한 줄탁동시啐啄同時(알을 깨고 새끼가 나오려 할 때, 부모도 알을 쪼아 돕는 것)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싶다. 결정적인 순간에 서로에게 어떤 도움을 제공하느냐 그게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안회는 자신의 기쁨을 위해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치열한 삶을 살았으며, 공자는 그런 제자가 죽자 대성통곡했습니다

     

『논어』 「옹야」라는 편에 “안회는 어질구나! 한 바가지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곳에 사네. 보통 사람이라면 근심거리가 그치질 않을 텐데, 안회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으니, 안회는 어질구나! (子曰:“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 回也!)” 공자는 누구보다도 안회라는 제자를 좋아했다. 배움에 대한 욕구도 남달랐으며 어떤 것을 알게 되면 알게 된 것으로 그치지 않고 삶과 일치시키려 노력했다.

그런 제자가 일찍 죽고 말았다. 논어엔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안연이 죽자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라고 말했다(顔淵死. 子曰:“噫! 天喪予! 天喪予!”).

안연이 죽자 공자가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애통해 하였다. 제자들이 “선생님이 너무 극렬하게 반응하고 계십니다”라고 말하자, 공자는 “이런 사람을 위해 애통해하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애통해할 것인가!”라고 말했다(顔淵死, 子哭之慟. 從者曰:“子慟矣.” 曰:“有慟乎? 非夫人之爲慟而誰爲!”).   

이런 장면에서 우린 진한 ‘인간애’를 느낄 수 있다. 환경 탓 하지 않고 자신의 진정한 즐거움을 만끽하는 삶을 산 안회라는 제자와 그 제자를 인정하며 맘껏 감정을 표현할 줄 알았던 공자라는 선생의 만남이 빚어낸 애절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길게 살아도 100년 밖에 살지 못하는 삶인데, 맘껏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며 현재 하고자 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안회와 공자의 모습은 체면치레 하느라 숨죽이며 살아야 하는 우리들에게 귀감이 된다.      



▲ 저자의 책에 받은 싸인. 좋은 인연이어서 다행이다.






 3. 교사 연수 후기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람이었오~♩’ 서로의 바람과 바람이 만나 얼굴 가득 미소가 지어졌다. 웃을 수 있기에 만남이 즐겁고, 그렇기에 더욱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만남은 ‘맛남’일 수밖에 없다. 삶을 맛깔나게 하는 만남은 우릴 살찌우기 때문이다.                




말을 해야 한다는 부담   

  

하지만 이 대화에서 나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듣고 있었다. 교수님의 이야기에 공감했으며 교수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궁금한 것도 딱히 없어서였다.

과연 난 말이 없는 사람인가? 이 순간 떠오른 장면이 하나 있다. 언젠가 완산도서관 뒷길을 아랑 누나, 고은누나, 진규, 나 이렇게 넷이서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 때 난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내 모습에 대해 나 스스로 실망하고 화까지 났다. 뭔가 말은 하고 싶지만, 뭔가가 자꾸 막아서서 입을 뗄 수 없게 되는 그 심리적인 한계에 대해 말이다.

그게 지금에 이르러서도 되풀이 되고 있다는 말인가? 요즘 말을 제법 많이 한다곤 하지만 그건 어느 편한 자리에 한해서 그렇다는 얘기다. 그렇기에 오늘처럼 무언가 내가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자리는 은근히 부담이 되는 게 사실이다. 난 어느 정도 정리하고서 말하고 싶은데, 아니 말하고 싶을 때 말했으면 하는데 현실에선 그러질 못하니 힘들기만 한 것이다.                




달라질 2012년 교육과정, 그리고 나의 자리매김

     

숙소에 와선 본격적으로 교육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여세를 몰아 2012년에는 더 큰 변화를 기대합니다.

저는 담임제를 없애는 것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반 편성을 하고 담임교사가 있는 경우인데, 반을 해체하고 팀으로 가는 걸 말합니다.

반과 팀이 다른 것은 반은 담임을 중심으로 하는 조직이지만, 팀은 직능을 중심으로 하는 조직입니다.

팀은 담임이 아니고 팀장이 존재하며, 마치 요즘 기업이 지향하는 조직 형태입니다. 기업에서 부서가 해체되고 팀제로 가는데, 핵심에 계급 파괴가 있습니다. 근무경력과 연봉이 다를 수는 있지만 상명하달의 시스템을 깨고 합의제로 일하는 조직이 팀입니다.

우리 학교에서 팀으로 가자는 것은 담임교사를 없애자는 제안입니다. 팀장을 학생이 맡는 것이죠.

교사 없는 학교를 꿈꾸었던 제 바람도 있고, 현재 시스템은 더 많은 교사가 필요하지만 형편상 충원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팀제로 가는 것은 팀이 수행해야할 과업이 분명해야합니다. 그런데 그 과업이 시험공부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시험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해도 될 듯합니다. 검정고시 차원이 아니라 수능까지 바라보는 시험공부입니다.

5+1제를 2012년에 시작하면 어떨까 싶어요. 현실적으로 5+1이 5년 활동 후 1년 수능공부를 말하지만, 낮에는 "5"에 해당하는 팀별 과업수행을 하고 밤에 "1"에 해당하는 시험공부를 하는 것이죠.

구체적으로(예를 들자면),

9:00~15:00 에 확장된 <다르다> 제작을 팀별로 수행합니다. 인터뷰취재팀, 기획기사팀, 편집 및 인쇄팀으로 나누고 팀장을 중심으로 잡지 제작을 꾸준히 하는 것입니다. 팀은 1년씩 돌아가며 바꾸기로 하구요.

15:00~16:00  휴식 및 간식 시간. 이때 학습(시험공부)에 참여하지 않는 친구들은 자유롭게 하교하고,

16:00~19:00  완전 자유의사에 의해 시험공부를 선택한 아이들은 3시간 동안 학원식 수업(에듀플렉스와 같은 자기주도학습학원+학습 메니지먼트 학원 성격 혼합)

19:00~21:00  자유의사에 따라 방과후 자습(학교 내 독서실)

-박준규, 「2012년 교육과정 고민(의제를 던지는 수준)」, 2012.01.02          



예전엔 준규쌤이 글로 쓴 대로 팀제로 운영하며 오후엔 학원식 수업을 하겠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된다는 것은 없었지만, 저번에 학습발표회 후에 준규쌤이 집으로 가시며 나에게 “기대가 크다”고 하셨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감이 왔다. 그건 다른 어떤 말도 아니고 팀제로 운영될 때 그 중심축의 역할을 제대로 해달라는 주문이었던 것이다. 2012학년도에 대한 이야기는 새벽 1시 30분이 넘도록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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