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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Dec 25. 2015

옛이야기는 흐름 속에서 봐야 한다

옛이야기 연구의 대가 김환희 선생님을 만나다 3

단재학교에서 카자흐스탄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준규쌤은 “‘쥐의 혼인 설화’는 카자흐스탄에도 똑같이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비슷한 민담이 있다는 것은 어떤 공통의 정서가 있음을 뜻하는 것이고, 그건 좀 더 비약을 하면 민족의 뿌리가 같다는 말까지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환희 선생님에게 ‘쥐의 혼인’이란 민담이 카자흐스탄에도 있는 걸 알고 계시는지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카자흐스탄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유럽 쪽에도 그와 유사한 민담이 있다고 대답해주시더라.                




세계에 두루 퍼져 있는 동일한 이야기의 비밀  

   

‘쥐의 혼인 설화’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 테니, 그 이야기를 잠시 읽어보도록 하자.           

두더지가 새끼를 위해 좋은 혼처를 구하려고 했다. 처음에는 오직 하늘이라 가장 높다고 여겨서 하늘에 청혼을 하였다. 그러나 하늘은 말했다. “내 비록 만물을 총괄하고 있기는 하지만, 해와 달이 아니면 나의 德을 드러낼 방법이 없네.” 


두더지가 새끼를 위해 좋은 혼처를 구하려고 했다. 처음에는 오직 하늘이라 가장 높다고 여겨서 하늘에 청혼을 하였다. 그러나 하늘은 말했다. “내 비록 만물을 총괄하고 있기는 하지만, 해와 달이 아니면 나의 德을 드러낼 방법이 없네.” 

鼴鼠, 欲爲雛, 擇高婚. 初謂惟天最尊, 遂求之於天. 天曰 “我雖兼包萬有, 非日月則無以顯吾德.”     


그래서 두더지는 해와 달을 찾아서 혼인을 구했다. 그러나 해와 달은 말했다. “내 비록 널리 비추기는 하지만 구름이 가리우니 그것이 나보다 더 높네.”

 鼴, 求之於日月. 日月曰 “我雖普照, 惟雲, 蔽之, 彼居吾上乎.”     


두더지는 다시 구름을 찾아 청혼을 하였다. 구름은 대답하였다. “내 비록 해와 달의 빛을 가려 비치지 못하게 하지만, 바람이 한번 불면 모두 흩어지고 만다네. 그러니 바람이 나보다 더 높네.” 

鼴, 求之於雲. 雲曰 “我雖使日月, 失明, 惟風吹散, 彼居吾上乎.”     


두더지는 또 바람을 찾아 혼인을 구하자, 바람은 말했다. “내 비록 구름을 흩어지게 할 수 있지만, 저 밭 가운데에 서있는 돌부처만은 자빠뜨릴 수가 없으니 그것이 내 위에 있네.”

鼴, 求之於風. 風曰 “我雖能撥雲, 惟田間石佛, 吹之不倒, 彼居吾上乎.”      


또 두더지는 돌부처에게 가서 청혼하니, 돌부처는 말했다. “내 비록 바람은 두려워하지 않지만 오직 두더지가 내 발 밑을 뚫고 들어오면 자빠지는 것을 면할 수 없으니, 저 놈이 나보다 더 높다네.” 

鼴, 求之於石佛. 石佛曰 “我雖不怕風, 惟鼴, 穿我足底則不無傾覆, 彼居吾上乎.”     


두더지는 이 말을 듣자 거만스럽게 자랑하면서 말했다. “천하에 높은 것이 나만한 게 없구먼. 짧은 꼬리와 날카로운 부리가 실로 나의 자태로다”하고는 마침내 두더지와 혼인하였단다(세상에서, 처음에는 분에 넘치는 혼처를 구하다가 결국에는 자기 처지와 같은 이로 낙찰될 때 ‘두더지 결혼’이라 불렀다).

鼴, 於是, 傲然自詑曰 “天下之尊, 莫我若也. 短尾銛觜, 實惟我儀.” 遂婚於鼴. 世以始求高婚而終歸儕流者爲此 -『旬五志』 下, 「鼠婚」           



▲ 익히 알던 이야기도 그 속의 의미를 알다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로 들린다.



이렇게 이야기 전문을 읽어보니, 언젠가 한번쯤은 들어본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이런 이야기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유럽에도 있다고 하니 신기할 따름이다. 이처럼 동일 유형의 민담이 전 세계에 퍼져있는 것을 ‘광포설화廣布說話(널리 퍼진 설화)’라고 한단다. 어떻게 지역이 다른데도 동일 유형의 이야기가 있을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천주교 하나만을 보더라도, 한국에 전해진 것은 불과 100여년 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분적으로 우리나라에도 ‘홍수설화’, ‘천지창조설화’는 있지만, 성경식의 그런 내용은 없었으니 말이다. 선교사들이 이동하며 성경이 전파된 것처럼 광포설화도 그렇게 생긴 것일까?

선생님은 거기에 관해 두 가지 학설을 제시했다. 첫째는 다원발생설多元發生說(다양한 곳에서 동시적으로 발생함)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해가 뜨고 지는 자연현상이 동일하고 희노애락에 기초한 사람의 감정이 같으며, 그에 따라 원초적인 욕구가 같기 때문에 여러 곳에서 같은 유형의 이야기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단일기원설單一基源說이다. 성경의 전파처럼 서양과 동양의 중심에 있는 인도에서 설화가 발생하여 퍼졌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다원발생설보다 단일기원설이 더 믿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더 현실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선생님에게 “어느 쪽 입장에 더 동의하시나요?”라고 물어보니, 선생님은 설화마다 판단 기준이 다르다고 대답해주셨다. 『콩쥐팥쥐』나 『신데렐라』 같이 세계 공통적으로 계모가 있으며,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담고 있는 내용의 설화는 다원발생설에 속하지만, 『구렁덩덩신선비』와 같은 내용은 인도의 판차탄트라Pancatantra(산스크리트어 설화집)에 있는 『마법에 걸린 브라만의 아들』이 그 원형이라 볼 수 있기에 단일기원설에 속한다고 했다.               



▲  세계이야기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인도의 설화집, 판차탄트라!



이야기는 흐름이다   

  

옛이야기의 흐름은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아무리 현대적인 의미로 보아 좋은 장면이 있다고 할지라도 함부로 삽입할 수 없으며 반대의 경우라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건 이상적인 눈, 코, 입, 얼굴 골격을 합친다 해서 최고의 미남, 미녀가 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사람의 인상이란 조화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지, 부분적인 요소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옛이야기를 쓰는 작가들은 이야기의 유기적인 속성을 먼저 파악한 후에 흐름을 깨지 않는 선상에서 고쳐야 하는 것이다. 또한 옛이야기를 보는 사람들도 그 유기적인 흐름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그럴 때에야 옛이야기의 깊은 맛이 살아난다.                




선녀와 나무꾼으로 본 흐름의 중요성

     

『선녀와 나무꾼』은 대표적으로 두 가지 유형의 이야기로 나누어진다. 천상에 올라간 나무꾼이 옥황상제가 내준 시련들을 모두 극복하고 행복하고 사는 이야기(천상시련극복형)와 홀어머니를 그리워하여 지상으로 내려와 어머니를 뵙고 천상으로 돌아가려던 찰라 금기를 어겨 수탉으로 변하는 이야기(수탉유래형)가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볼 때, 다 자란 아이가 부모의 품을 떠나 시련을 이겨가며 주체적인 삶을 사는 ‘천상시련극복형’의 내용과 어머니의 과잉된 모성애가 자식의 날개를 꺾을 수 있다는 ‘수탉유래형’의 내용 중, 옛이야기책을 보는 자식 입장에선 ‘천상시련극복형’이 훨씬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홀어머니를 두고 떠난 아들을 과연 긍정적으로만 볼 수 있는가?’하는 점이다. 만약 ‘나무꾼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산다’라고 상황 설정을 했다면, 어머니를 홀로 두고 떠난 아들에 대해 우호적으로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건 자신의 행복을 위해 당연히 해야 하는 자식으로서의 의무를 내팽개쳤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하지만 민담 자료를 살펴보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천상시련극복형의 경우엔 ‘계모 or 고아’라고 설정을 하고 있다. 나무꾼을 천상에서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선 지상에 미련을 둘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도록 애초에 장치를 해놓은 것이다. 그와 반대로 수탉유래형의 경우엔 ‘홀어머니’라고 설정하여, 효심을 강조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았다. 옛사람들은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면서도 이처럼 치밀했다.

하지만 현대의 옛이야기책 작가들은 그런 흐름은 생각지도 않고 내용을 바꾼다. ‘천상시련극복형’을 쓰면서, ‘홀어머니를 모신 나무꾼’이라는 설정을 그대로 둔 것이다. 그러니 아들은 주체적으로 자신의 길을 따라 떠났으면서도 어머니를 저버린 배은망덕한 자식이 되고야 만다. 이야기의 흐름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러한 예를 통해서 여실히 알 수 있다.                



▲  <사진 출처: 이건호의 파란만장한 공부 중 36>




흥부놀부를 통해본 도깨비의 원래 모습 

    

‘놀부가 박을 여니, 도깨비들이 나와 놀부를 벌준다.’ 『흥부놀부』에 이와 같은 내용이 있다. 이 내용을 보고 이상한 부분이 있다는 걸 눈치 챘는가? 아마 한 명도 이상한 점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요즘 나오는 책에도 이런 내용은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을 읽는 사람들은 도깨비는 ‘징벌자(벌주는 존재)’라고만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인식이다. 도깨비는 잘한 사람에겐 상을 주고 못한 사람에겐 벌을 주는 양면성을 동시에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도깨비를 징벌자로만 받아들이게 된 데에는 일본의 귀신인 ‘오니おに’의 영향이 컸다. 그건 곧 일제시대 당시 일본이 우리의 민족정기를 끊고자 옛이야기를 일본문화에 맞게 고쳐 쓰면서 우리의 전통적인 정서들이 대부분의 일본식 정서로 바뀌었다는 말이다. 요즘도 일제문화청산을 외치며 ‘국어순화운동’을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급히 해야 할 일은 왜곡된 옛이야기의 가치를 되찾는 ‘민담순화운동’이지 않을까.               



▲ 아이앤비본 '흥부와놀부'에 나오는 도깨비들. 이젠 이 장면이 왜 잘못됐는지 보일 것이다.




흥부 놀부를 통해 본 문화순결주의의 폐해

     

그런데 도깨비가 오니로 바뀐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그건 민담에선 아예 도깨비가 나오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도깨비가 나와 벌을 줬다는 민담은 극히 소수고 대부분의 민담은 ‘장비가 나와 놀부를 벌주었다’고 되어 있다. 우리의 옛이야기가 얼마나 많이 훼손되었는지 이런 예를 통해 볼 수 있다. 

박에서 나온 장비는 분명히 중국 문학작품인 『삼국지(연의)』를 통해 유명해진 인물이다. 우리의 문화라기보다 외국문화를 나타내는 인물이라고 평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장비라는 명칭을 쓴 것은 문화사대주의의 한 예다. 그러니 후대에 장비를 도깨비로 바꾼 것일 수도 있다.’라는 문제제기가 가능하다. 



▲ 웅진씽크빅본 '흥부전'의 장비 모습. 생생한 생동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흥부놀부』는 판소리계 소설이라는 점에 유의해야만 한다. 판소리로 불리기 위해선 언어유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언어유희에 대해 모르겠으면 ‘우리는 제도권 킬러 / 동서로 갈라 여야로 갈라 / 싸움은 똑같고 사람만 달라 / 이러지 말라는 모두의 바램은 / 말짱 꽝 빛바랜지 오래야~ / 코리아~이게 무슨 꼴이야~ 아이구 골이야 -싸이 「환희」’라는 식의 라임을 생각하면 쉽다. 랩을 맛깔스럽게 만들어주는 건, 반복구를 통한 리듬감이 있기 때문인데, 그처럼 판소리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장비’나 ‘양귀비’의 중국적인 이름이 나오느냐고 뭐라고 할 게 아니라, 왜 그런 ‘비’자 돌림의 단어들이 쓰였는지를 봐야 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다시 동산으로 올라가서 박 한 통 따다놓고,

“이번 박은 겉을 보건대 빛이 희고 좋으니 이 속엔 응당 보화가 들었을 것이니 정성 들여 타보자!” 하고 한동안 켜보다가 궁금증이 나서 귀를 기울여 가만히 들어보니 박속에서 우뢰같은 소리가 진동하며,

비로라! 비로라”하므로 무더기로 큰 탈이 또 나는 줄 알고서 톱을 내던지고 달아나려 하자 다시 박 속에서 우뢰같은 호령이 터져 나왔다.

“너희가 왜 박을 아니 타느냐. 내가 답답하여 한때를 못 견디겠으니 어서 켜라!” 놀부가 겁을 먹고 물었다.

“‘’라 하시니 무슨 인지 자세히 말씀하시오.”

“이놈, 로라!”

놀부가 다시 물었다.

라 하시니 양귀비입니까? 누구신 줄이나 먼저 알고 박을 마저 켜겠습니다.”

“나는 그런 ‘’가 아니라 나라 사람 장비거니와 네가 만일 박을 아니 켜면 무사하지 못하리라.”

놀부가 장비라는 말을 듣더니 매우 놀란 듯 목 안의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이를 장차 어찌하면 좋은가? 이번엔 바칠 돈도 없으니 죽는 도리밖에 없나 보다.”  『흥부전』          



양귀비는 당태종을 치마폭에 싸고 한 시대를 풍미한 절세가인이다. 놀부는 박을 타다 불길한 예감을 하고서 박타기를 멈춘다. 그 때 박 속에서 ‘비로라!’하는 소리가 나서 놀부는 ‘양귀비’가 아닐까 기대해보지만, 곧 ‘장비’라는 소릴 듣고 실망한다. ‘비’라는 반복구를 통해 위급하며 긴장감 넘치는 상황을 유희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제비가 물어다준 박씨에서 장비가 나올 수밖에 없음을 장비의 고향이 연나라(燕-제비연)라는 것과 그의 턱모양이 제비모양이라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이게 바로 판소리계 소설의 맛이며, 언어를 가지고 놀 줄 알았던 우리 조상의 문화적 품격의 멋이다.

그런데도 그런 전체적인 흐름은 보지 않고 ‘장비’나 ‘양귀비’가 중국출신이라며 그런 장면을 빼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어리석다고 할 수밖에 없다. 순수한 자국의 문화란 건 있을 수 없다. 문화는 흘러들어와 자국의 특수성과 섞이며 변형ㆍ발전되는 것이니 말이다. 더욱이 근대국가가 지닌 분명한 국경, 한국민이라는 자의식, 우리 것이라는 분별지가 없던 조선시대에는 중원의 문화를 함께 공유하며 커왔던 것이다. 공자는 동양 사회 전체의 성인이었고 한문은 동양 사회 구성원의 문자였으며 유교는 동양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원칙이었다. 

바로 이런 관점으로 우리의 과거 문화유산을 바라보아야만 우리 문화에 대해 올바른 평가가 가능해지며, 올바른 계승이 가능해진다. 우리의 옛이야기를 현대에 새롭게 쓰기 위해서도 바로 그와 같은 온고지신의 생각이 있어야 한다. 



 ▲  네셔널지오그래픽에서 공동연구한 인구의 이동 경로. 이처럼 문화도 이동하며 발전을 거듭했다.




목차     


Part 1. 프롤로그당신이 지금껏 본 옛이야기는 엉터리다

같은 뿌리, 다른 이야기

원전을 알아야 옛이야기가 보인다     


Part 2. 옛이야기의 가치

수많은 뿌리는 하나의 줄기로 자란다

예술인은 경계인이다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사람에 의한, 평범한 사람을 위한 민담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결핍을 채워주는 예술의 가치

예술이 지닌 가치를 보여준 명작, 『수호의 하얀말』

넓이는 깊이를 포괄한다

세계 문학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옛이야기     


Part 3. 옛이야기는 흐름 속에서 봐야 한다

세계에 두루 퍼져 있는 동일한 이야기의 비밀

이야기는 흐름이다

『선녀와 나무꾼』으로 본 흐름의 중요성

『흥부놀부』를 통해본 도깨비의 원래 모습

『흥부 놀부』를 통해 본 문화순결주의의 폐해     


Part 4. 에필로그이야기의 원형을 찾다가 나를 만나다

안 해도 될 이유는 지천에 널렸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않는다(不狂不及)

옛이야기엔 우리가 놓치고 살아온 단면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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