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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빵 May 04. 2016

기술이 곧 처방이다

11. 박동섭의 ‘트위스트 교육학’ -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 두 번째

남은 그렇지 않지만 자신만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공명정대하게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번 후기에서 살펴봤듯이, 사람은 태생적으로 ‘객관적으로 인식’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 밖에 비는 오지만, 그래도 강의실은 맑음.




관점을 지우는 게 아닌일그러진 상을 조금이라도 펴나가는 것 

    

그래서 동섭쌤은 “세상에 흔히 유포되는 말 중에 ‘비워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건 근심과 걱정을 비우라는 말임과 동시에,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도록 관점을 지우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그런 것들에 휘둘리지 않고 객관적으로 세상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죠. 하지만 ‘관점이 있어야 상이 맺힌다’는 말처럼 완벽하게 비우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니, 설령 비우는 게 가능하다 해도 관점이 없으면 상조차 맺히지 않아 세상을 인식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조금씩 일그러져 왜곡된 상을 펴나가는 일일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왜곡된 상을 펴나가는 일’이란 말이 매우 심쿵한 말이었다. 그건 사람의 한계를 인정하는 말이면서도, 그 한계에만 머물지 않겠다는 결단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섭쌤은 ‘시지프스의 바위’를 예로 들었는지도 모른다. 돌에 깔아뭉개지지 않기 위해선 돌을 끊임없이 밀어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처럼, 우리도 왜곡된 현실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그걸 조금씩 펴나가는 일을 해야 하니 말이다.                



▲ 우리는 객관적인 시선으로 사물을 본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위 사진처럼 왜곡된 상으로 보고 있다.




일그러진 상 1 - 시스템의 장단점 

    

세상의 모든 일들은 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으로부터 시작된다. 한 사람이 하는 일이라면 자신의 가치 기준에 따라 일을 진행하면 되지만, 여럿이 함께 하는 일이라면 다른 성향과 다른 관점을 아우르며 시너지를 발산할 수 있도록 일사분란하게 통제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래야 일이 효율적으로 진행되어 시간의 낭비를 막고, 지속성을 갖게 되어 원대한 계획을 이룰 수 있다. 

이런 시스템을 통해 우린 엄청 발전한 한국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사람이 달나라까지 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으며,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방대한 기록 문화도 간직하게 되었다. 



▲  실록청을 두어 왕의 행적을 기록하게 하고 왕은 살펴볼 수 없게 한 시스템은 이런 방대한 기록유산을 남겼다.



하지만 때론 시스템이 사람의 역동적이며 창조적인 힘을 억압하기도 한다. 학교에서는 으레껏 진행되는 행사들이 있다. 그 행사에 대해 누구도 ‘왜 해야 하는지, 그리고 지금도 필요한 행사인지?’를 물을 필요가 없다. 했기 때문에 당연히 하고, 하라고 하니깐 한다. 

이뿐 아니라 새로운 일이 발생했을 때도 시스템은 작동한다. 작년엔 메르스라는 전염병이 전국을 휩쓸었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학교는 당연히 취약지대로 분류되어 엄청난 제재를 받게 됐다. 수도 없이 많은 공문이 교육청을 통해 단위학교로 내려왔다. 학생들이 등교할 때마다 체온을 체크하라, 마스크를 착용하라, 수많은 사람이 모이는 장소로의 외부활동을 금하라 등등의 공문이 수도 없이 쏟아졌다. 공문이란 단순히 ‘이런 걸 했으면 좋겠다’는 조언이 아니라, ‘이래야만 한다’는 강요이고, ‘그걸 위반하여 문제가 발생할 시엔 책임져야 한다’는 준협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선 교사들이 하나하나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진땀을 뺄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메르스에 감염되지 않고 어떻게 활기차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상부기관에 ‘우리 학교는 메르스를 철저히 대비하는 학교’라는 이미지를 심어줄까만을 고심하여 보고서만 열나게 작성하는 형국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메르스보다 무서운 건 메르스 관련 공문’이란 말이 떠돌기도 했다.                



▲ 메르스는 한국을 마비시켰고, 메르스 공문은 학교를 마비시켰다.




일그러진 상 2 - 학교 평가의 역설

     

학교 평가시스템도 문제가 된다. 학령인구가 줄고 있다는 기사는 매일 쏟아져 나오고, 그로인해 많고 많은 대학을 정비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대학의 수를 줄이기 위해서는 당연히 학교의 질을 평가하여 하위 등급을 받은 학교부터 점차적으로 줄여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들으면, 매우 맞는 말이며, 더 이상 이의제기가 불가능한 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학교를 어떤 기준에 의해 골라내느냐 하는 것이다. 그걸 일본에선 ‘질 보증’이란 말로 표현한다고 한다. 



▲ 학령인구 감소는 대학에 먼저 직격탄이 되었다. 그 해결책으론 대학교를 정리하자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



학교의 질을 보증하는 방법에 대해 우치다쌤은 재밌는 얘기를 하고 있다. 우치다쌤은 요로 타케시養老 孟司의 ‘츠쿠바 산에 호랑나비는 없다’는 주장을 논증하는 장면을 빌려 설명한다. 그 이야기는 긴 얘기이니 여기선 하지 않도록 하고, 하나만 생각해보자. ‘~가 있다’와 ‘~가 없다’를 증명한다고 할 때, 어떤 주장을 증명하는 게 더 쉽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얘기를 듣기 전엔, 두 가지 모두 증명하는 게 어려운 줄만 알았다. 하지만 우치다쌤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 둘을 증명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가 있다’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하나만 밝혀내면 증명된다. ‘지리산에 반달곰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고 해보자. 이걸 증명하기 위해서는 산에서 한 마리의 곰만 발견해도, 곰을 봤다는 사람을 찾아도, 곰의 흔적(똥, 발자국, 동면을 했던 장소)만 찾아내도 증명이 된다. 직접적인 증거를 찾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관련된 증거를 여러 개 수집해도 충분히 증명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가 없다’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모든 가능성을 철저히 부정해야 한다. 그러려면 샅샅이 지리산 전역을 조사해야 하고, 곰의 흔적마저도 완벽하게 없다는 것을 밝혀야만 한다. 그 뿐인가, 만약 인접한 야산에서 반달곰이 발견됐을 때에도 그 곰이 지리산에서 온 곰이 아니라는 것을 밝힐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니 ‘~가 없다’를 증명하는 것은 ‘~가 있다’를 증명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품과 시간이 든다. 



▲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을 증명하기가 훨씬 힘들고, 그에 따라 많은 에너지도 필요하다.



그런데 대학평가 이야기를 꺼내다가 갑자기 웬 과학적 증명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냐고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건 논지를 벗어난 이야기가 아니라, 대학교 질을 보증하는 방법이 꼭 ‘~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학교는 질이 보장된 학교다’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모든 부정적인 지표들을 철저히 부정해야만 한다. 그러니 우치다쌤은 “질 보증은 논리적으로는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을 보여주는 모든 지표를 부정한다고 하는 절대로 끝을 볼 수 없는 작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평가를 해서 좋은 대학을 걸러내자는 것이 왜 문제예요?’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절대 끝이 없는 작업을 위해 어마어마한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모든 역량을 쏟아 부어야 하는 일이라는 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국립대학 교수 중에는 대학 설치 기준의 완화, 교양 과정의 개편, 학부 재편, 법인화와 관련해서 지난 수십 년 동안 문부성에 제출할 보고서만 계속 써왔기 때문에 그동안 거의 전공연구를 할 수 없었다는 몇 천, 몇 만 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끝이 보이지 않는 작업에 동원되는 사람은 어느 대학이든 젊고 일처리가 빠르며 요령이 좋은 사람입니다. 귀찮은 일은 결국 그런 사람에게 돌아갑니다. 그들이 그런 보고서를 쓰지 않고 연구와 교육에 전념했을 때 얼마만큼의 업적을 내놓을 수 있었겠는가를 상상하면, 저는 그 헛된 노력에 깊은 허탈감을 느끼게 됩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평가활동으로 일본의 고등교육이 잃어버린-그리고 지금도 잃어버리고 있는- 지적 자산이 얼마 만큼인지 문부성은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요?

-『교사를 춤추게 하라』, 우치다 타츠루 저, 박동섭 역, 민들레 출판사, 78pp


          

학교는 어찌 보면 연구를 해야 하는 곳이고,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인지에 대한 거시적인 관점을 말해줄 수 있는 곳이며, 지적 자산을 후배들에게 나눠주는 곳이다. 그런데 현실은 ‘우리학교는 질적으로 좋은 학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자원을 아낌없이 퍼부어, 그에 반비례하여 교육의 질은, 학문에 확장은, 사회에 대해 조감할 수 있는 시각은 사라져갈 수밖에 없다. 이건 애초에 ‘평가를 통해 교육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취지에도 위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야기가 진행되며 영화로 이어진다.




일그러진 상 3 - 부조리에 적응하면 일상이 된다

     

어쩌면 우린 너무도 당연하여, 더 이상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 것을 문제로 부각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문제제기를 하면 ‘세상이 이미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데, 그걸 문제 삼아서 뭐하게?’라는 볼멘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보통 ‘문제를 문제 삼는 그 사람이 문제다(내부자를 부적응자로 보는 시선)’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동섭쌤은 『백만 달러의 사랑』(이하 백만)이란 영화를 인용하며 달리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 영화는 본 적이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순 없으나, 남자와 여자가 박물관에 조각상을 훔치러 갔을 때의 장면이 인상적이다. 박물관엔 흔히 적외선 센서 같은 게 있지 않은가. 바로 이런 장치 때문에 『엔트랩먼트』(이하 엔트)의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 이런 명장면을 [백만 달러의 사랑]에선 볼 수 없다. 절대로.



아마도 ‘백만’의 남자 주인공은 ‘엔트’의 여자 주인공의 적외선 센서를 피하기 위한 피나는 몸부림이 웃겼을 것이다. ‘백만’의 주인공은 그보다 사람의 심리를 이용한 한 단계 높은 방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거 이거 ‘백만’이 훨씬 오래된 작품인데, 사람의 지성은 진보하는 것만은 아닌 게 분명하다. 

‘백만’의 남자 주인공은 ‘캡틴 부메랑’이 울고 갈 정도의 부메랑 명수였다. 그는 박물관에 침입하여 적외선 센서가 작동하는 공간에서 부메랑을 힘껏 던진다. 그 부메랑은 적외선 센서를 건들고 돌아온다. 그러면 경비원들이 그 소리에 놀라 부랴부랴 출동하여 주변을 살펴보게 된다. 그런데 주변엔 아무도 없으며, 사람의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다. 처음이야 ‘센서가 너무 민감하여 그런가 보다’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 상황이 연거푸 계속 되면 경비원들은 ‘센서가 고장 났나 보다’라고 생각하여 아예 센서를 꺼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부조리가 처음에 일어나면, 우린 부당한 상황을 감지하고 그것에 항의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게 수차례 반복되고 일상적인 상황처럼 되어버리면 우린 그걸 ‘그게 왜 문제야?’라고 의식의 센서를 꺼버리게 마련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아이히만처럼 의식의 센서를 끄고, 그저 주어진 일에만 최선을 다하는 무비판적인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다.                



▲ 의식의 센서를 끌 때, 우린 누구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




섬세의 정신으로 기술하고또 기술하라

     

그렇게 무비판적인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선, 있는 현실을 그대로 기술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을 기술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고, 그런 문제들에 우리가 스스로 의식의 센서를 끄며 살아왔는지 여실히 알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문제를 기술만 하다보면, 누군가는 “그래 그런 문제가 있다고 치자, 그래서 대안은 뭔가?”라고 묻게 마련이다. 이럴 때 흔히 하는 말이 ‘대안 없는 비판은 오히려 아니하는 것만도 못하다’는 비판이고, ‘꼭 성공하지 못한 것들이 사회에 대해 불만만 많더라’는 비난이다. 



▲ 대안 무섭다고 기술 말고, 해법 모른다고 스위치를 끄진 말자.



하지만 이에 동섭쌤은 그렇게 답을 요구하며 기술도 못하게 만드는 현실을 비판하며,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런 불편함을 감당하지 못해 얼버무리려 하거나, 자신의 어휘꾸러미로 손쉽게 해결책을 마련하려 하지 말고 ‘지적폐활량’을 키워서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해준다. 그 말과 함께 ‘기술description이 곧 처방prescription이다’라는 말을 인용하여 기술 속에 이미 처방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동섭쌤이 인용한 김영민쌤의 글은 너무도 깊은 울림이 있었다. 그건 기술이야말로 어찌 보면 엄청난 일임을 알려주는 명문이었기 때문이다. 

그 인용문을 마지막에 인용하며 이번 후기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다. 다음 후기는 기술을 통해 현실을 인식했다면, 과연 우린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다. 이 얘기엔 ‘브리콜라’에 대한 이야기, 전국시대의 거부인 맹상군에 대한 이야기, 아이폰4의 유작을 남긴 잡스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이를 통해 ‘사후적 지성’이란 생소하고도 뭔가 있어 보이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아무쪼록 5월의 연휴가 코앞에 다가온 날,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간절히 바라며, 이번 후기는 이만!          



모든 정답이 단순하고 명쾌하게 주어진 표피, 즉 이념의 옷Iddenkleid이 주는 편익에 마취된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처방적prescriptive이다. 

그러나 절절하고 형용할 수 없는 삶의 층층면면과 복잡성을 깊이 살아내는 글쓰기는 종종 기술적(descriptive)인 고백에서 멈출 도리밖에 없다. 

파스칼의 변별처럼 <기하학적 정신>을 넘어서서 <섬세의 정신>을 익힌 글쓰기는 주변의 소외된 지역을 찾아다니며 펜 끝으로 어루 만져준다.

-김영민,『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



 ▲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김영민쌤의 강의를 들을 수 있는 날이 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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