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한강 자전거 여행 23 - 15.10.6(화)
밥을 먹고 나서 못 찾았다고 속였던 캠코더를 갑자기 들이밀며, 한바탕 깜짝쇼를 했다. 자전거도 잘 고쳐졌겠다, 캠코더도 고장 난 데 없겠다 산뜻한 기분이 절로 든다. 이제 겨우 자전거 여행을 시작한지 이틀이 지나 삼일 째가 되었을 뿐인데, 벌써부터 시즌 2를 시작하는 기분이 든다. 그건 아무래도 어제 저녁을 계기로 맘도 한결 여유로워졌기 때문이리라.
어제의 리더는 김민석이었다. 영화팀 막내로 시작하여 조금씩 리더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 자전거 여행 중엔 처음으로 리더 역할을 하는 것이기에, 어떻게 하는지 유심히 지켜봤다. 더욱이 어제 같은 경우는 준영이와 다투기도 했고, 저녁엔 온갖 어려운 일들이 몰려들기도 했으니 리더의 역량을 판단하기에 최적의 날이었다.
어제 하루 동안 리더를 하며 도드라진 민석이의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긍정적인 마인드’였다. 연속해서 펑크가 터지고 심지어는 캠코더도 잃어버렸으며, 추위에 온갖 비극이 몰려오는 그 순간에도 “쌤요, 완전 재밌다요”라는 말을 하며 활기를 북돋워졌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그 위기의 상황에서도 먼저 나서서 고치는 것을 도와주고 캠코더로 그 장면을 촬영하며 “이런 건 남겨야 해!”라는 투철한 리더 의식을 보여주기도 했다. 어제는 남한강 도보여행 때나, 지리산 여행에 비하면 달라진 민석이의 모습을 충분히 볼 수 있던 하루였다.
하지만 어제 준영이와 다투고 보인 반응은 함께 여행을 하는 우리들에게 악영향을 끼쳤다. 다툰 후에 서로 한 마디 말조차 섞지 않았으며, 그 후 준영이가 먼저 달려 대열이 흐트러졌음에도 더 이상의 분란을 만들긴 싫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민석이의 리더십에 대해 평가를 할 때 가장 박하게 점수를 주게 된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거기엔 아마 ‘리더란 모든 팀원을 잘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이 기본에 깔려 있기 때문이리라.
다투게 되는 일은 여행 중엔 당연히 발생하는 일이기에, 그걸 어떻게 해결하려 하는 가가 가장 중요하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는 시간이 약인 경우도 있어, 개인의 판단에 따라 방법을 마련하면 된다. 하지만 민석이는 어떤 방법도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 언제까지 이런 상황이 지속될지 모른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라고 할까. 그렇다고 개입하여 상황을 바꿔놓을 순 없기에, 그저 민석이에게 맡기고 기다리며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의 리더는 이재익이다. 2014년 2학기부터 연을 맺어 함께 생활하고 있다. 학교에 열심히 다니던 녀석은, 어떤 바람이 불었는지 하루 이틀 빠지게 되더니, 급기야 나가는 날보다 나가지 않는 날이 더 많아졌다. 재익이 마음에서 어떤 심적인 변화가 생긴 것이지만, 이게 어른들의 시각으로 보기엔 ‘문제가 있다’는 것으로만 판독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단재학교에 왔음에도, 마음을 잡지 못하고 나오는 둥 마는 둥 하며 그렇게 2학기를 보냈다. 그 때 그나마 남한강 도보여행에 함께 간 것이 가까워질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다.
남한강 도보여행에서 재익이가 보여준 모습은, 한 번 하지 않으려 한 일을 하지 않겠다는 거였다.
첫날 양평역에서 여주까지 걸어갈 때 오전엔 최선을 다해 걸었지만, 오후엔 급격한 체력저하(그 당시 거의 방콕을 하였기에 근육들이 거의 잠자고 있는 상태였음)와 허벅지의 살이 청바지에 쓸리는 바람에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주저앉았다. 그 후론 한 걸음도 나가려 하지 않더라. 그곳에서 무려 2시간이나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끌어봐야 결국 자신이 뒷감당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나도 그 옆에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어찌 되었든 그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도보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여행을 잘 마쳤다고 갑자기 상황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그저 예전과 똑같았으니 말이다. 2015년 새학기가 밝았는데도 여전히 나오는 둥 마는 둥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스스로 뭔가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던지, 나와 약속을 하게 되었고 급기야 우리 집에서 일주일간 함께 생활하며 생활 습관을 잡아갔다.
어찌 보면 1년 6개월이란 시간은 그렇게 서로 모르던 사람에서, 서로 아는 사람으로 변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처음 재익이가 왔을 때부터 나는 줄곧 어떤 해결책만을 제시하려 했었고, 그럴 때마다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학교에서 학부모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많다. 대부분 ‘어떤 문제 상황’이나 ‘어떤 바람’ 같은 것을 얘기해주신다. 그럴 때 교사의 입장으로 이야기를 들으며 압박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떤 식의 해결책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학교는 아이들의 성장을 위한 곳’이라는 생각이 기본에 깔려 있다 보니(물론 학교에 대한 정의는 각자마다 다르지만, 아이들을 성장시키는 곳이라는 데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아이의 지금 문제 행동이나, 어떤 부분의 부족한 것들을 말하게 되고 교사는 그에 대해 해결책 내지 성장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재익이의 예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시피, 그건 너무도 현실을 단순화시키고 근본은 무시한 채 말단적인 해법만을 제시할 뿐이었다.
‘아이가 학교에 잘 나오지 않는다’라는 문제 상황이 있다고 해보자. 이 때 문제는 ‘학교에 잘 안 나온다’이니, ‘잘 나오는 상태’로 만드는 게 결론이 된다. 그 때의 해결책이란 아주 기계적으로 나오게 된다. ‘잘 나오게 하려면, 학교에 잘 나갈 때마다 상을 주면 된다’던지, ‘학교에 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들을 제거한다’던지, ‘학교에 나가지 않으면 벌칙을 준다’던지 등등의 ‘파블로프의 개’처럼 고전적 조건형성에 기초한 해결책들을 쏟아내는 것이다.
나 또한 이런 대화나, 이런 식의 해결책을 마련해 주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예전부터 줄곧 들어서 아는 얘기인 ‘서술이 곧 처방이다’라는 말이 어쩌면 이런 상황에 가장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대해 박동섭 교수는 재밌는 일화를 얘기한다(전문 보기).
교감 대상으로 강의를 했는데, 마지막 질의응답 시간에 어떤 교감 선생님에게 질문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해결책이 뭔가요?”라는 것 말이다. 자신은 여느 자기계발서 같이 처방전을 던져주는 강의를 한 게 아니고, 문제를 확대하여 볼 수 있도록 상황 상황을 서술해 나가는 강의를 한 것인데, 역시나 질문은 처방전을 바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어떠한 형태의 교사대상 연수를 가보아도 그리고 어떤 지역에 있는 교사대상 연수를 가보아도 교사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에토스는 ‘문제’를 ‘문제’로서 계속 숙지하고 견뎌내는 지적폐활량의 부족이다”라고 진단하며 『아이들이 있는 곳에서부터』라는 책의 역자후기를 인용한다.
따라서 곤란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는 곧바로 결론을 내리지 말고, 문제가 자신 안에서 입체적으로 보일 때까지 계속 몰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지성의 폐활량을 늘리는 방법이다. 눈앞에 있는 양자택일, 혹은 이항대립에 계속 스스로를 노출하는 것, 대립을 앞에 두고 생각에 잠기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바깥’으로 나가는 것, 그것이 사고의 원형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대립을 미리 없애려 하고 남들에게 맞춰가려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고습관이 아닌가 싶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에 둘러싸여서 초초함과 불만과 위화감으로 숨이 막히면 그 사태를 벗어나기 위하여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기 쉬운 논리로 감싸버리려고 한다. 그리고 그 논리에 안주하려고 한다. 모르는 것을 모르는 채로 방치하는 상황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기 쉬운 이야기에 곧바로 달려든다.
-오자와 마키코 저, 박 동섭 역, p. 259
이 글을 읽는 순간, 머리를 둔기로 맞은 양 강한 충격을 받았다. 지금껏 내가 단재학교에 교사로 있으면서 했던 수많은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했던 노력이, 어찌 보면 자리를 건사하기 위해 알량한 지식으로 꾸며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난 열심히 ‘있는 척’, ‘고민하는 척’ 하고 있었을 뿐 직면할 수 없어서, 또는 그 상태로 지켜볼 수 없어서 도망가고 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지적폐활량’이 부족하여 조금만 지적인 숨이 가빠오면 해결책을 찾기에 급급했다.
이 이야기 말미에 박동섭 교수는 “자신이 이미 무엇을 알고 있는지에 대해 자문하는 습관이 없으면 그리고 그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자신의 생각을 규정짓고 있는 지에 대한 반성이 없으면 어떤 강의를 듣던 나올 수밖에 없는 질문은 “그래서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와 같은 해결책solution을 구하는 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며 강한 메시지를 던진다. 해결책만을 구하려 하고, 해결책만을 생각하려하는 그 심리엔 ‘자문하는 습관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감히 고백할 수밖에 없다. 내가 여태껏 그러했노라고 말이다.
위의 결론은 이오덕 선생님의 “자각 없는 교사는 아이들을 꼭두각시로 훈련시키는 교관이 될 뿐이다.”라는 말과 공명하는 말로 읽혀진다. 자각이든 자문이든 어찌 보면 내 생각과 다른 어떤 말들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는가라고 묻는 것과 같다. 받아들이지 못하면, 내가 아는 지식으로 남을 정의 내리려 하고, 해법을 제시하려 하고, 이상적인 모습으로 바꾸려 노력하게 된다.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재익이와 함께 한 1년 6개월은 ‘서술이 곧 처방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게 한 시간이었고, 나의 지적 폐활량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알게 한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재익이를 알게 되고 만나온 시간은 여러모로 나를 성장 시키는 기간이기도 했던 셈이다. 아이들도 성장해가듯, 교사도 어떤 사람들과 만나 함께 하느냐에 따라 성장해 간다.
재익이는 어느덧 성장해 이제는 학교에 잘 나올뿐더러, 자신의 역할도 충실히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필요했던 건 어떤 처방적인 것들이 아니라, 기술적인 그래서 좀 더 자신을 잘 들여다 볼 수 있게 하는 것들이었음을 안다.
과연 리더 이재익은 오늘 어떻게 아이들을 이끌어 갈 것인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이 상황들을 기술해 나갈 것인가? 생각과 생각이 마주치는 가운데, 우리의 셋째 날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