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한강 자전거 여행 24 - 15.10.6(화)
캠코더를 찾고, 자전거를 고치고, 아침밥까지 먹고 출발하려다 보니, 시간이 무한정 지체되었다. 벌써 11시 30분이 훌쩍 지나버렸다. 오늘은 상주박물관에 들러 미션을 하고 문경새재게스트하우스까지 63km를 달려야 한다. 어제의 일이 없었다면 한결 여유로웠을 텐데, 맘이 바쁘다.
그래서 후회하느냐고?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행이란 어찌 보면 동섭쌤의 “배움이란 것은 배우려 생각했던 것 이외의 것을 배우는 것, 또는 그 이상의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라는 말이나, 우치다쌤의 “교육의 본질이 여기와는 다른 장소, 여기와는 다른 시간의 흐름, 여기에 있는 것과는 다른 사람들 사이를 연결해주는 회로를 뚫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교육의 본질은 ‘외부’와의 통로를 열어가는 것입니다.”라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계획된 것 이외의 것을 경험하며, ‘외부’와의 통로를 열어가는 것이니 말이다.
여행을 떠나지 않고 그냥 일상생활만 하고 있었다면, 아마도 ‘삶은 내 계획대로 될 거야’라는 착각 속에서 살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그런 착각을 유지하기 위해, 판에 박힌 생활만을 하며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행을 하다 보니, 자연히 우연한 상황들에 부딪혀 계획 이외의 것을 경험하게 되었으며, 타자와 어울리며 외부와의 통로를 열어가게 되었다. 그저 여행을 하고 있는 것뿐인데, 이걸 통해 동섭쌤이 말한 ‘배움’에 대해, 우치다쌤이 말한 ‘교육’에 대해 좀 더 잘 알게 되었다. 이게 바로 여행이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기에, 전혀 후회 같은 건 없다.
재익이는 아이들을 이끌고 간다. 아무래도 처음으로 지도앱을 사용해보는 거라 ‘어떻게 봐야 하는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해 하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요즘 아이들을 만나며 가장 주의 깊게 보는 게, ‘하려는 마음이 있느냐?’는 것이다. 내가 중고등학생 땐, 하려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회 분위기 상, 학교 분위기 상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에 하라니까 하고, 까라니까 깠다(문제 없는 내 아이가 문제다).
그렇게 살았던 내가 ‘무언가 하지 않으려는 아이들’을 만나게 된 것이니, 대략난감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그들이 이해될 리도 없을뿐더러, ‘신종인류’처럼 느껴졌다. 단재학교에서 지낸 4년은 굳어질 대로 굳어진 나의 생각을 깨고, 전혀 다른 타인들을 이해하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이젠 어느 정도 ‘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거기엔 단순히 한 개인이 지닌 게으름이나 자포자기만 있는 게 아니라, 사회와 학교의 낙인이, 또는 ‘해봐도 한계가 있을 바엔 아예 안 하겠다’는 부모의 과도한 기대에 따른 저항심도 있으니 말이다.
작년의 재익이였다면 이런 리더미션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재익이도 시간을 버텨내며, 여러 상황 속에 자신을 돌아보며 조금이나마 하려는 마음을 되찾게 되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이젠 어느 정도 자신을 앞가림 할 수 있는 힘이 생겼고(이건 사람이면 당연히 있는 힘이지만, 사회적으로 억누르고 쓸데없는 힘이라 생각하게 만들었음), 그 힘으로 인해 친구들도 챙기며 함께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시간 정도를 달리니 상주박물관이 보인다. 이미 박물관 안엔 초등학생들이 단체 견학을 하고 있었고, 박물관 앞산엔 어떤 공사를 하는지 포크레인이 브레이커로 돌을 뚫고 있어서 시끄러웠다.
이번엔 ‘준영&현세’가 한 팀, ‘재익&민석’이가 한 팀이다. 이곳에서 해야 할 미션은 퀴즈 대회다. 작년 명성황후 생가에서 이미 퀴즈대회를 했었는데, 그 때는 함께 공부를 한 후 내가 낸 문제를 한 명씩 맞히는 식이었다.
그건 이미 해본 방식이기에, 이번에는 좀 다르게 진행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엔 ‘1. 두 명씩 한 팀을 구성한다. / 2. 박물관에 들어가 20분 동안 공부하여 중요한 단어를 문제지에 적는다. / 3. 상대팀이 내온 문제는 우리 팀이 풀어야 하는데, 한 명은 그걸 설명하고 한 명은 맞힌다. / 제한시간 4분 동안 10개의 문제 중 많이 맞히면 된다.’는 식으로 진행했다.
퀴즈에 대한 기본 규칙을 알려줄 때만 해도, ‘아이들이 박물관을 샅샅이 둘러보고 공부한 후에 문제를 내겠지’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애초부터 ‘당신이 무얼 기대하든 접으슈’라 외치듯 공부를 하기보다 대충 보며 단어만 적기 시작했다. 채 5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아이들은 어느새 벌써 단어를 모두 적고 의자에 앉아 쉬고 있다. 속마음을 물을 순 없었지만, ‘쌤~ 날도 덥고 갈 길도 먼 데 여기서 그냥 쉬어요’라는 말을 하는 듯 했다.
하지만 단어만 적는 게 핵심이 아니라, 상대 팀이 적어온 단어를 보고 맞히는 게 핵심이니 잠시 쉬고 공부할 거라 생각했다. 단어의 뜻을 알아야 설명도 하고 풀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한 문제라도 더 맞히려면 좀 더 돌아다녀 보면서 어떤 내용들이 있는지 살펴보기라도 해”라고 말했는데, 그건 대답 없는 울림이 되어 박물관 한 켠을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드디어 본격적인 퀴즈대결 시간이다. 얼마나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했고, 얼마나 재치 있게 설명하는지 지켜보자.
‘재익&민석’팀이 먼저 하게 되었다. 재익이가 설명하고 민석이는 맞춰야 한다. 처음으로 나온 단어는 ‘금동관’이었다. 신라의 금속공예기술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유물로 왕자라는 신분을 나타내주는 것이 바로 금동관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설명을 재익이는 전혀 하지 않는다. ‘단어를 적어 와’라고 했을 때부터 공부할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뜻을 몰라도 문제를 맞히는 건 어렵지 않아요~’라고 이미 생각한 듯 했다. 아마도 그런 계산이 깔려 있었기에 아까도 공부를 하기보다 그냥 쉬었던 걸 테다. 재익이는 낱말퀴즈대회라도 되는 듯 한 글자, 한 글자를 풀어서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Gold”, “Bronze”, “미라가 살던 곳?”과 같이 설명 아닌 설명을 한 후, 그걸 이어 붙여 답을 말하도록 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재익&민석’ 팀이 문제를 맞히니, ‘준영&현세’ 팀도 그대로 따라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떤 평가식 교육의 한계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평가에 집착하다 보면, 빨리 맞히는 게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각종 편법을 아무렇지 않게 쓰게 된다. 왜 알아야 하는지, 그게 뭔지는 중요하지 않고 그걸 맞췄느냐, 못 맞췄느냐만 중요할 뿐이다. 얼핏 학창시절에 내용은 몰라도 정답을 맞히기 위해 앞 글자만 달달 외우던 때가 생각났다. 이걸 ‘두문자암기법’이라는 유식한 말로 불렀으니, 평가식 교육의 폐단을 확인할 수 있던 시간이었다.
이런 상황을 동섭쌤은 “공부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의 차이점을 아십니까? 공부 잘하는 사람은 시험이 끝난 다음에 잊어버리고, 공부 못하는 사람은 시험보기도 전에 잊어버립니다.”고 우스갯소리로 표현했었다.
퀴즈대회가 끝나고 “오늘 상주박물관에 와서 봤던 것 중에 기억에 남는 게 있어?”라고 아이들에게 물으니, 누구 하나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아이들에게 상주박물관은 ‘그저 미션을 하기 위해 온 곳’이었을 뿐, ‘궁금한 곳’, ‘알고 싶은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그건 아이들을 비판할 게 아니라, 교사인 내가 비판 받아야 할 일이었다. 상주에 왔으면서도 상주에 대한 어떤 심상을 전해주지 못했으며 그저 미션만 잘 하면 된다는 생각만 하게 했으니 말이다.
아래에 인용한 시는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 쓴 시인데, 어찌 보면 지금 우리네 학생들의 마음을 잘 대변해주는 시라고 할 수 있다.
교실 뒤에 늘어 붙은
갖가지 표들은
우리들의 몸을 대신합니다.
□칸에 갇혀 있는 ○△×가
우리들의 몸을 대신합니다.
우리들의 일상과
모든 일들은
갖가지 표들이 확인시키고
우리들은 모두
□칸에 갇혀서
○표 받기를 소원합니다.
교실 뒤에 늘어 붙은
갖가지 표들을
나는 미워합니다.
그 표 안에 갇혀
빠져 나오지 못하는 우리가 원망스럽습니다.
-「표」, 이상욱, 에듀니티, ‘이오덕 삶과 교육사상’ 14강 중
교실에서 행해지는 교사들의 평가는 ‘○’와 ‘×’로 표시된다. 당연히 앞의 것은 승인을 나타내기에 좋은 것이고, 뒤의 것은 거부를 나타내기에 안 좋은 것이다. 그걸 교사가 교실 뒤에 붙여 놓은 이유는 ‘늘 보면서 분발하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달해주기 위해서다.
하지만 여기엔 그와 같은 긍정적인 의미 외에 ‘끊임없이 경쟁하라’는 속내가 감춰져 있음을 어린학생도 눈치 채고 있다. 그러니 ‘갖가지 표들을 나는 미워합니라’라고 속마음을 얘기한 것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점은 그 표라는 게 단순히 생활의 한 단면만을 나타낸 표가 아니라 ‘우리들의 몸을 대신합니다. 우리들의 일상과 모든 일들은 갖가지 표들이 확인시키고’라며 학생 개개인의 의식을 옥죄며 일상을 통제하는데 사용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난 위의 시에서 ‘교육이란 이름의 폭력’을 읽을 수 있었고, 끊임없이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려는 ‘24시간 통제하고자 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아이들이 ‘○’만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아이들을 탓할 게 아니라, ‘○’만을 좋아하도록 만든 장본인이 교사임을 반성해야 한다.
나 또한 이번 ‘스피드 퀴즈’ 미션을 통해 이미 ‘○’만을 좋아하도록 길들어진 아이들의 그 욕망을 부추기고 편법을 써서라도 한 문제라도 맞히는 게 낫다는 마음을 갖도록 만든 것이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나 또한 ‘그 표 안에 갇혀’서 살아왔기에 그런 식의 활동 밖에 할 수 없었다는 것이 한계라 할 수 있다.
여러모로 상주박물관에서의 퀴즈대회는 다시 한 번 ‘교육’에 대한 생각을 다듬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팀 아이들에겐 다시 한 번 미안하다.